여기에서 나는 내가 가진 사각지대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비록 독일의 밀레니얼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독에서 태어난 밀레니얼들은 세상을 다르게 볼지 모른다. 내가 아래에 기술할 서독인들의 경험–안정, 그리고 우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깊은 확신–과 달리, 내 세대의 동독인들은 해체(disintegration)의 과정에 있는 세상에 태어났다.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의 공식 명칭–옮긴이)은 1990년에 해체되었고, 그 결과 동독의 경제는 그 구조가 완전히 개편되었고 새로운 화폐가 도입되었다. 동독은 경제 위기에 빠졌고,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수십 년 동안 (동독을) 지배하던 정당–그리고 이데올로기–이 사라졌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 십 대였던 어떤 이의 글

독일이 이런 과정을 지나는 동안 성장기를 보냈다면 그 자체로 얻게 되는 교훈은–비록 내가 그 증거는 되지 못하더라도–분명히 있었다. 그런 이유로, 비록 나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도출된 교훈이 서방세계와 다른 유럽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일반화될 수는 있다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 경험과 교훈이 가장 잘 설명해주는 건 유럽을 좋아하고 교육을 받은 중산층 서독인들일 거다. 이게 내가 속한 세대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현재 정치계의 지도급으로 성장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많은 사람들을 설명해준다.

독일의 밀레니얼 세대가 전략적 사고를 중요시하는 세상에 준비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는 이례적인 수준의 지정학적 안정기에 성장했다. 이게 (내가 자라면서 들었던) 프로인데크라이스의 노래가 표현하는 바였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의 일부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우리는 중요한 사건 이후에 태어나 그렇게 변화하는 역사에서 비껴나 있다고 느꼈다. 정치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지리나 기하학, 지질학을 배우려는 것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중요한 영역이기는 해도 당장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는 얘기다.

둘째, "역사의 종말(end of history)"라는 아이디어가 독일만큼 (사람들에게) 내재화된 곳도 없었다. 1989년을 경험한 독일인들은 이데올로기를 두고 경쟁하는 것이 이미 과거의 일이라는 생각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독일의 밀레니얼 세대는 이게 원래 세상이 작동하는 방법이라고 단순하게 내재화했다. 정치적 논의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우리 윗세대가 찾아냈고, 가장 좋은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사회적인 측면을 조금 다듬어야 하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른 문제에 관심을 쏟아도 상관없었다.

조용한 노멀

너무 어려서 소련의 종말과 독일의 통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의 독일인들은 모두 이례적인 수준의 안정과 평화 속에서 자랐다. 군사적으로 우리는 미국과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보호를 받았고, 그 덕분에 우리는 군대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는 우리 세대에게 좋은 일이었지만,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노멀이라고 생각하는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독일은 종종 유럽과 세계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독일의 역사는 국경선과 조직의 정치적 형태의 변화, 이데올로기적 싸움과 전쟁, 갈등의 롤러코스터였다. 하지만 1989년이 지나고 1990년에 독일이 재통일되면서 상황이 많이 조용해졌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해도 독일에는 맞는 얘기였다. 1989년 이후로 독일에는 거의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계는 지난 30년 동안 완전히 멈춰있지 않았다. 하지만 9/11부터 테러와의 전쟁, 금융위기 같은 사건들이 '독일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 연방군(Bundeswehr)이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싸웠지만 그 일이 독일 국내 사회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때 독일 밀레니얼 세대의 일부가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시위를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우리 독일의 현실과는 먼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다른 나라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그나마 금융위기가 독일 밀레니얼 세대를 정의하는 사건에 가까웠지만 독일이 이를 잘 극복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보다 우수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강화했을 뿐이다.

게다가 국내적으로 독일은 지난 30년 동안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continuity)을 경험했다. 나는 현재 34세인데 내가 기억하는 독일 총리는 세 명뿐이다. 나는 헬무트 콜 총리(총리 재임기: 1982~1998)의 임기가 끝날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5년 전에 총리가 되었고, 내가 열한 살 때 게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그 뒤를 이었다. 슈뢰더는 7년 동안 총리로 재임했고, 지난 16년 동안은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로 있었다. 이에 비하면 같은 기간 동안 미국에는 일곱 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내 또래의 영국인들 역시 일곱 명의 총리를, 이탈리아는 스무 명에 가까운 총리를 경험했다. 더 놀라운 건 내가 태어난 이후 7년을 제외한 모든 기간을 같은 당, 즉 독일 기독민주연합(CDU)와 바이에른 기독사회연합(CSU)이 집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CSU는 독일에서 가장 큰 바이에른주에서만 활동하는 정당으로 CDU의 '자매정당'으로 불린다. CDU와 연합정부를 구성해서 흔히 CDU/CSU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옮긴이)

이런 국내외적 정치적 연속성은 정치가 우리(밀레니얼 세대)에게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시기를 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공통의 경험으로 뭉칠 수 있는 1968년 시위나 함께 축하할 수 있는 1989년의 장벽의 붕괴, 혹은 공통의 트라우마로 작동할 수 있는 전쟁이 (정말 다행히도!) 없었다. 혁명도, 정치적 저항도, 지정학적 대격변도 없었다. 우리 세대를 특징 지울 수 있는 순간이라고는 기껏해야 2006년 독일 월드컵 정도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독일 국내에 영향을 미친 지정학적 사건은 2015년에 있었던 난민사태였다. 하지만 2015년이면 가장 어린 밀레니얼도 스무 살이었고, 대부분은 25세 이상이었다. 하지만 세계관의 근본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늦게 일어난 사건이었(을뿐 아니라 충격도 크지 않았)다. 현재 겪고 있는 팬데믹도 마찬가지다.

더 중요한 건 우리 세대가 연속성을 당연한 것(norm)으로 내재화했다는 사실이다. 감정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가 아주 빠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1989년을 보면 베를린 장벽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정권 전체가, 특정한 삶의 방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지정학적 기반이 흔들렸던 거다. 흥분되는 동시에 방향감각을 잃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일이다.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안정(stability)은 보장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 세대는 그런 정치적 지각변동을 경험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기반이 전혀 흔들리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상황이 가능하겠어?' 우리도 안정이 영원히 보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인 수준에서는 이해하지만 그건 같은 게 아니다. 지진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 배워서 아는 것과 지진을 경험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나는 우리 세대에게 지진을 상상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지진에 대한 대비는 더더욱 되어있지 않다.  

누군가에게 "흥미로운 시대를 살기 바란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사건이 많은 시대를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뒤돌아봤을 때 그런 것일 뿐, 그 시대를 직접 사는 것은 불안한 일이고, 무력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위험하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내 세대의 경험에) 불만이 없다. 하지만 조용한 시대를 사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를 갖고 있다. 특히 상황이 바뀔 경우 그렇다.

'역사의 종말'을 믿고 자란 세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아이디어는 종종 "중요한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단순한 의미라는 오해를 받는다. 비록 그런 단순한 해석조차 독일에는 크게 틀리지 않게 적용되지만, 후쿠야마가 이야기한 것은 사건(events)이 아니라 사상(ideas)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냉전의 종식이나 전후 역사의 특정 시기가 끝나가는 게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의 역사가 끝나는 것일지 모른다. 즉, 인류 이데올로기의 진화가 끝나고 서구의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인류 정부의 최종 형태로서 보편화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누구보다 독일인들이 후쿠야마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토마스 바거는 3년 전에 1989년이 독일인들의 사고에 가져온 충격에 관한 뛰어난 글을 썼다. 그는 독일인들이 유독 역사의 종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 이유가 "독일이 두 번이나 역사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비로소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개념에 동의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세상은 힘(군사력)을 평가절하하고 법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체제로 수렴하게 된다. 나라들은 국가 간의 문제를 국제기구를 통해 해결하게 되고, 민족주의와 이데올로기는 매력을 잃는다. 1989년으로 상징되는 수문(水門)이 열리게 되면서 이런 변화는 불가피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독일인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세계가 독일이 군사력을 갖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상황에서 법이 군사력보다 더 큰 힘을 갖는 체제는 독일인들에게 훌륭한 개념이었다. 정치에서 개별 정치인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을 포함한 자유주의적 사고(liberal idea)도 독일에 잘 맞았다. 역사의 궤도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해 가고 있었고, 개별 정치인의 중요성은 훨씬 떨어지게 되었고, 독일인들 사이에서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한 '총통'(Führer, 히틀러의 공식 칭호)이 아닌, 불가피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과정을 감독하는 관리인(행정가) 정도면 되었다. 독일의 정치인들이 대부분 지루한 사람들인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다. 앙겔라 메르켈에 관한 가장 흥미진진한 뉴스 중 하나는 그가 감자수프를 직접 요리한다는 거다. 정치인이 지루하다는 것이 독일에서는 흠(bug)이 아니라 자질(feature)이다.

바거는 이런 경험이 자신이 속한 세대(바거는 1965년 생이다–옮긴이)의 독일인들이 오늘날 변화한 지정학적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역사의 종말'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의 주장은 맞지만 그는 이를 경험한 세대보다 더 큰 영향을 받은 세대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역사적 순간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확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세대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1989년 이후의 낙관론을 순진하다고 조롱할지 모르지만, 다른 걸 경험한 적 없는 우리가 어떻게 그걸 던져버리겠는가? 당신들(바거의 세대)은 1989년의 정신을 받아들였을 뿐이지만, 우리 세대는 그것으로 형성된 사람들이다.

오래도록 현실은 우리의 확신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잘 살고 있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되고 싶어 했다. 1990년대–우리의 어린 시절–내내 서유럽에는 진보(progress, 진전)의 기운이 느껴졌다.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참여를 원하면서 유럽연합(EU)은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거대한 수렴(grand convergence)에 대한 기대, 세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이동할 거라는 기대, 그리고 모두가 우리처럼 변할 것이라는 생각들이 우리 세대 DNA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가 결국 독일의 모범을 따르게 될 거라 믿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나 -주의(-isms)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생각에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라는 건 역사책에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런 구시대적 싸움을 하고 있는 나라들을 다소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우리는 더 나은 단계로 이동한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그리스나 폴란드 사람이라면 내가 바로 위에 설명한 독일식 사고가 오만할 뿐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독일은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적은 것 같은 계몽적인 자세가 아니라 그냥 자국의 이익에 맞는 정책을 추구하지 않았나?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노드 스트림2는? 긴축정책은? 유럽의 통합과 유로화 도입으로 유럽에서 가장 혜택을 많이 본 나라가 독일 아니었나? 가치니, 우정이니 하는 말들이 결국 과거와 다를 게 없는 이익정치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거 아닌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럽연합은 독일에게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이 자신의 이익을 더 많이 챙기는 나라들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희생을 기꺼이 치르지 않았다면 유럽연합이 현재의 자리에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로화를 위해 마르크화를 포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노드 스트림2는 독일인들이 전략적 사고를 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그리고 세계가 힘의 정치를 넘어 경제가 가장 중요하고, 무역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줄 거라고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하지만 당신은 동의하지 않아도 독일의 밀레니얼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다. 밀레니얼들은 이제 막 권력의 자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힘의 정치는 나쁜 것이라는 내러티브로 자랐다. 이 내러티브에 따르면 독일인들이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위험한 도덕적 우월감

만약 이 말이 당신의 귀에 오만하게 들린다면, 당신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다. 힘의 정치, 현실 정치(realpolitik),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거부하는 태도에는 도덕적 우월감(moral superiority)이 배어있다. 우리는 역사를 잘 이해하고, 민족주의를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대중선동에 혹하지 않을 만큼 성숙했다는 것이고, 우리가 과거에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편적 진리를 우리보다 더 잘 배운 사람들은 없다는 거다. 지정학, 이익 정치, 현실 정치는 그러니까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이나 한다는 거다.

이런 도덕적 우월감은 매력적이지 못하고, 계몽이 덜 된 나라로 취급받기를 원치 않는 동맹국들을 무시하는 태도일 뿐 아니라 무비판적(uncritical)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우리는 1989년의 격언(='역사의 종말')을 믿었지만, 오로지 우리만 미래에 관해 읽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수렴은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했다. 중국의 중산층(mittelschicht)이 힘을 얻게 되면 민주주의를 요구할 것이고,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잦아들 것이었다. 최근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변화한 세상에 우리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건 부분적으로 우리들의 이런 믿음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만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국내외에서 가해오는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체제(시스템)를 제대로 방어하고 있지 못하다. 만약 당신이 통합된 유럽이 답이고, 국제협력이 필요하고, 법치가 힘의 정치보다 낫고, 이 모든 것들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이를 설명하기는 놀라울 만큼 어렵다.

도덕적 우월감은 또한 우리가–우리 생각에–군사력과 같은 오래된 사고방식을 넘어 발전했다고 해도 다른 이들–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미국–이 우리를 군사적으로 보호해주고 있다는 사실, 그들의 보호 덕분에 우리는 군사력을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치를 누리고 있음을 무시한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은 우리의 미래를 빼앗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과정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정치는 이데올로기의 경쟁이 아닌 행정활동이 되면서 지루해졌다. 독일의 정당들이 다들 정치적 "중도"를 표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에 대해 전략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론

나는 우리 세대가 좋은 유년기를 보냈다고 불평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유년기는 안정적이었고, 안전했으며, 미래는 지금보다 더 좋을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는 예외적인 세상에서 자란 거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정상(normal)이라고 생각했다. 국제정치가 변화하자 우리는 방향을 잃었다.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누군가 나를 두고 "내가 아는 가장 나이 많은 젊은이"라고 한 적이 있다.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나는 칭찬으로 받았다. 따라서 나야말로 세상이 변화한 것을 모르는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다른 밀레니얼들과 워게임(wargame, 독일에서는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른다)을 해보면 직관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능력, 상대편의 이익과 능력을 파악해서 상황을 가늠해 전략을 구상하는 접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그리고 국제적인 체제가 흔들리고, 그걸 대체할 대안을 들고 나오는 나라들이 우리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이 시대에 우리가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나는 우리가 다음 세대의 독일 외교 정책가, 외교정책 입안자들을 의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독일의 한 세대가 가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당면한 문제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속으로 세상이 '우리의 노멀'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고, 계몽이 덜 된 힘의 정치를 벗어나 기후변화와 같은 진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는 우리의 그런 바램을 들어줄 것 같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 세대는 전략적 근육을–그것도 서둘러서–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