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세계 ⑤ Casus Belli
• 댓글 남기기미국 시간으로 금요일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피할 가능성이 희박하다(prospects for averting war appear dim)"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월만 해도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배치된 러시아 병력이 10만 명 규모였는데, 최근 파악된 바에 따르면 현재는 16만 9천 명에서 최대 19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약 20년 전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2003년에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가지고 있다는 조작된 정보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침공 전쟁을 벌였다. 대부분 미군 병사들이었지만 우방국인 영국과 호주 등의 국가들도 파병한 전면전이었다. 그리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지금 러시아가 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몇 주에 걸쳐 국경지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침공을 개시했던 시점의 연합군 병력이 17만 7천 명이었다. 지금 러시아가 동원한 병력과 똑같은 숫자다. 이라크와 우크라이나는 대국은 아니지만 작은 나라도 아니다. 얼추 비슷한 규모의 이 두 나라를 침공해서 무력으로 압도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가 그만큼이라는 거다.
소말리아의 해적도 아니고 현대 국가, 그것도 강대국이 무작정 다른 나라를 침공할 수는 없다. 침공을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 명분은 다른 나라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프로파간다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허위정보 캠페인이면 충분하다. 미국은 이를 위해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에게 허위 정보를 주어 UN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침략 명분을 주장하게 했다. (여기에 관해서는 Fall Guy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미군은 사담 후세인의 WMD를 없애러 가는 줄 알고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점령 후에 보니 WMD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 전쟁을 주도한 조지 W. 부시나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 전쟁으로 민간인만 약 20만 명이 죽었는데도 말이다. 강대국에게 전쟁의 명분은 그렇게 허접해도 상관없다. 폭력배의 룰이지만, 폭력배가 힘을 발휘하는 한 그게 공식적인 역사가 되는 거다.
이게 전쟁 명분(casus belli)의 본질이다.
가짜 깃발 작전
그럼 러시아는 어떤 명분을 들고 나올까?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약속을 어기고 우크라이나를 가입시키려 한다는 건 개전의 명분이 되지 못한다. 우선 나토가 그런 약속을 했다는 서명된 공식 문서가 없다. 하지만 서명된 공식문서가 있더라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명분은 되지 못한다. 비록 그게 러시아가 군사행동을 하는 진짜 이유이겠지만, 이유와 명분은 다르다.
미국은 첩보활동을 통해 러시아가 어떤 명분을 준비하는지 알아냈다. 그런데 바이든은 이를 숨기지 않고 공개하기로 결정하면서 전 세계가 러시아가 준비한 작전을 알게 되었다. 바로 가짜 깃발 작전(false flag operation)이다. 여기에서 '깃발'은 국적을 의미한다. 대항해 시대 범선들은 항해 중에 국적을 밝히는 깃발을 달았는데, 해적선, 혹은 적국의 배가 특정 선박에 가까이 접근해서 공격하기 위해 표적이 되는 배와 같은, 혹은 우방국의 국기를 다는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즉, 가짜 깃발 작전이란 국적을 숨기거나 속이고 벌이는 일을 의미한다.
참고로, 해적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그렇게 가짜 깃발을 달고 접근했다가 돌연 공격을 시작하면서 해적 깃발(Jolly Roger)을 올리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왜 굳이 깃발을 바꿔 다는 수고를 했을까? 이게 당시의 룰이었다고 한다. 치사한 방법이지만 가짜 깃발을 달고 접근해서 공격을 하는 게 국가들 사이에 받아들여졌는데, 그래도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진짜 깃발을 올려야 한다는 게 일종의 에티켓(?)이었다는 거다.
16세기 해상전투에서 비롯된 가짜 깃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적국으로 국적을 가장해서 적국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적국의 국적으로 가장해 스스로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한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A국가가 B국가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B국으로 가장한 아군이 스스로를 공격한 후에 "B가 먼저 도발했으니 응전한다"라는 이유로 대대적인 공격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이 사용된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이다. 미국의 USS 매독스 함이 북베트남(베트콩) 소속의 어뢰정들로부터 선제공격을 받아 교전한 사건이다. 미국 정부는 이 공격을 베트남 전쟁에 개입할 명분으로 삼아 의회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이의가 제기되었고, 국방부의 자료를 입수해 살펴본 뉴욕타임즈의 기자가 매독스 함이 개입된 전투는 전쟁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시인하지 않았다.
푸틴의 자작극
지난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푸틴 역시 과거 가짜 깃발 작전을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바로 1999년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아파트 폭탄테러 사건이다.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지지율이 바닥(2%)을 치고 있었다. 이 테러는 그런 옐친이 (당시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한 지 한 달만에 일어났다. 9월 9일 새벽에 한 아파트 건물에 폭발사고가 일어나 1백 명이 넘는 주민이 사망했고, 며칠 후인 13일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빌딩에 폭탄이 터져 역시 1백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뿐 아니었다. 두 테러 사건 전후에 체첸 지역을 비롯한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있었다. 신임 푸틴 총리는 이를 체첸 반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반군이 있는 북캅카스(North Caucasus, 북 코카서스) 지역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하루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그들(테러리스트)이 어디에 있는 찾아낼 것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해서 미안하지만, 그들이 화장실에 있어도 잡을 것이다."
푸틴의 이 말은 체첸 반군의 공격에 지치고, 서구에 무력한 옐친에 분노한 러시아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강한 러시아'를 되찾아 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과 러시아 문제를 잘 아는 저널리스트인 데이빗 새터(David Satter)에 따르면 당시 옐친의 지지율이 너무나 낮았기 때문에 그런 옐친이 후계자로 지목한 푸틴이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스크바 아파트 테러사건과 그 대응으로 푸틴은 러시아의 구원자로 떠올랐다.
그런데 당시 모스크바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일련의 테러가 러시아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뚜렷했다는 게 새터 기자의 설명이다. 특히 모스크바 남부의 도시 랴잔에서는 다섯 번째 폭탄이 발견되었는데, 가서 물어보니 관계자들은 테러대비 훈련의 일부라고 둘러댔다는 것. 더 우스운 건 후에 그 폭탄을 설치한 범인 세 명이 잡혔는데, 체첸 사람들이 아니라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KGB의 후신) 요원들이었다고 한다. 푸틴이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자작극이었다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
드러난 각본
따라서 미국이 "푸틴이 가짜 깃발 작전을 사용해 전쟁 명분을 조작해낼 것"이라고 확신하는 건 입수한 세부계획뿐 아니라, 이게 푸틴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고 미국 역시 종종 사용했던 흔하디 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난 3일, 미국은 "러시아가 아주 잔인한 모습이 담긴 가짜 비디오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밝히면서 러시아가 준비하는 영상에는 폭격에 무너진 빌딩과 가짜 우크라이나 무기, 시신, (우크라이나가 사 온) 터키제 드론, 그리고 러시아어로 울부짖는 배우들 등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가 이런 공격을 감행했으니 우리는 반격할 뿐"이라는 명분 준비다. 하지만 누군가 지적한 것처럼 대규모 병력을 주둔한 후에 갑자기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건 뻔뻔스럽고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푸틴은 미국이 예고한 대로 "(친러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시신들이 암매장된 걸 발견했다는 것. 사람들은 푸틴의 어설픈 주장을 두고 "각본이 유출되었지만 하기로 한 연기라서 열심히 해야 할 때(When the script is leaked but you're already committed)"라며 비웃는다.
미국은 러시아의 침공을 막을 수는 없어도 명분을 가져가는 것만은 막으려고 작정한 듯 푸틴의 다음 행동을 약 올리듯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 역시 이미 드러난 패임에도 개의치 않고 고수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친러 반군들이 우크라이나의 마을을 향해 24시간 넘게 포격을 가하면서 우크라이나 군대의 공식 반격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경고를 들은 우크라이나는 푸틴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반격을 삼가고 있는 중이다.
앤서니 블링킨 미 국무부 장관은 심지어 러시아가 친러 반군이 장악한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을 향한 박격포 사격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푸틴이 1999년에 러시아인들을 희생시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글을 쓴 후 뉴스 업데이트가 올라왔다. 바이든에 따르면 푸틴은 침공을 결정했고, 침공할 경우 수도 키예프를 타깃으로 할 것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 아니 러시아의 문제가 지금의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은 미국의 외교적 실패라는 비판론이 미국 내에도 존재한다. 소련 말기에 미국 대사로 파견된 직업 외교관 잭 매틀록 주니어(Jack F. Matlock Jr.)가 쓴 아래의 글이 그 시각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소개한다.
클린턴 대통령이 나토의 확장을 시작한 이후로 후임 미국 대통령들은 러시아의 우려를 거듭 무시하고, 심지어 러시아의 정권교체까지 부추기면서 푸틴을 지금의 상황까지 몰고 갔다는 주장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친 러시아 대통령이 쫓겨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혁명을 지지한 것은 푸틴으로 하여금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본 시각이 미국의 전직 외교관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를 보는 시각에 균형추가 될 만한 글이다.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