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볼로디미르, 블라디미르

공교롭게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대통령은 같은 이름(first name)을 갖고 있다. 물론 스펠링과 발음은 조금 다르다. 젤렌스키의 이름 볼로디미르(Володимир)와 푸틴의 이름은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는 '세계의 지배자'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슬라브계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름으로, 같은 이름을 각각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로 표기한 것 뿐이다. 둘은 분명히 다른 언어이지만, 폴란드어부터 러시아어를 망라하는 슬라이브어파에서 같은 동슬라브어군에 속한다.

슬라브어파의 세 갈래: 서슬라이브어군, 남슬라브어군, 동슬라이브어군

그럼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는 서로 얼마나 가까운 언어일까? 이 지역 언어를 이야기하는 한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어로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약 50% 정도 알아들을 수 있고, 벨라루스어의 경우 러시아어와 더 가까워서 74%를 알아듣는다고 한다. (글로 접하면 두 언어 모두 약 85%를 이해한다고 한다.) 그런데 두 나라의 친 러시아 성향은 언어의 거리와 비슷해서, 벨라루스는 여전히 모스크바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점점 거리를 두고 있다. 국제 정세에서 언어와 문화를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관계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선 이 두 나라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단단하게 얽혀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이야 말로 러시아인들의 뿌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뿌리가 바로 키예프 루스(Kievan Rus, 882~1240)라는 나라로, 지금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의 후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세 나라가 모두 동슬라브어군에 속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키예프 루스 이후 이 지역에 (러시아가 아닌)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국의 그늘

시간을 앞으로 빨리 돌려서 1800년대로 가보자.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은 분할되어 서쪽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쪽은 러시아에 속해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공장"이라고 불릴 만한 곡창지대이기도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이 땅을 "당연히" 러시아의 일부로 생각했다. 여기에는 언어로 나라와 문화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근현대 동아시아식 국가관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서구인들에게는 엠파이어(empire, 제국)와 스테이트(state, 영방, 주, 국가)라는 이중적인 통치구조가 익숙하다. 가깝게는 중세 봉건제도, 멀게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시스템에서 개별 국가는 자신들의 지도자와 언어를 유지하면서 황제와 제국에 속한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우크라이나는 그런 작은 스테이트 정도로 생각했을 거다. 당시만 해도 (혹은 지금도) 많은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안의 방언, 사투리 정도로 취급했다고 하니 당시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3년만에 새로 태어난 소련에 다시 복속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는 아니어도) 많았다. 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다. 1862년 키예프 출신의 파블로 추빈스키(Pavlo Chubynsky)가 쓴 시의 첫 구절이 이를 잘 반영한다.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아직 죽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의 자유도 아직 살아있다. 운명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리." 이 시가 유명한 이유는 1917년부터 약 3년 동안 존재했던 독립국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국가의 가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러시아 내전에 말려든 이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이름은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소련이라는 엠파이어에 속한 스테이트였던 셈이다.

독립을 위한 새로운 시도

다시 언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대개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바이링구얼(bilingual, 이중언어구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난 20세기 동안 그들에게 러시아어는 문명과 도시, 지식인의 언어였고, 우크라이나어는 농민과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민중의 언어"였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상점에 들어가서 우크라이나어로 물어보면 모두 알아듣고도 러시아어로 대답하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이런 러시아어를 중심으로 한 언어생활이 본격화된 건 2차 대전 후 소련이 합병된 지역들의 문화적 통합을 강조하면서였다. 연방으로서의 소련은 제국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큰 불만 없이 소련의 일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모스크바를 신뢰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사건이 바로 1986년, 사상 최악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인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였다고 한다. 이 발전소는 벨라루스와 접경한 우크라이나 땅에 위치해있지만 궁극적으로 사고 수습의 총지휘는 소련 정부의 책임이다. 하지만 사고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그야말로 변방 사람들로 취급했다는 배신감을 느꼈다.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태어나 미국 캔자스 대학교에서 슬라브어를 가르치는 비탈리 체르넨스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은 소련의 시민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가 (체르노빌 사고 이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소련/러시아의 변방에 속한 존재임을 인식했다고 한다. "식민지 이론에서 말하는 식민지/주변부 사람들이 중심부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인식은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공유했고, 소련의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는 비로소 독립을 맛보게 된다. 1991년의 일이다.

그리고 국가는 1917년의 국가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각성

우크라이나는 1991년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당시 많은 옛 소련의 위성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독립국가연합'이라는, 러시아 주도의 연합체 안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연합의 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정치는 친 러시아 정치인들이 이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일부라고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모스크바의 영향력에서 분리하려는 흐름이 점점 더 강해졌고, 이를 주도하는 세력과 친 러시아 세력 사이의 갈등도 커져갔다. 이들은 각각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2005~2010년 재임)과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2010~2014년 재임)을 지지하며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유럽의 일부로 끌고 갈 것이냐,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잔류할 것이냐를 두고 싸웠다. 특히 유셴코 대통령 시절에는 친 러시아 세력이 반발해서 러시아와 가까운 동부지역을 우크라이나에서 분리하겠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참고로, 이 지역이 현재 친 러시아 반군이 점령해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싸우고 있는 돈바스 지역이다.)

21세기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은 이 과정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그는 우크라이나를 복속시킬 수 없으면 최소한 친 러시아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바람은 2010년에 이루어져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2013년 말에 일어난 '유로마이단' 시위로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대한 시위였기 때문에, 시위의 성공은 우크라이나 정치를 친 러시아에서 유럽연합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어 사용자 비율이 높은 동부의 돈바스 지역과 크림 반도에서 친러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이를 푸틴이 도우면서 우크라이나는 내전 상황으로 치달았다. 2014년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푸틴은 크림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해 '크림 공화국'을 세우고 러시아에 복속시킨다.

푸틴의 생각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리는 2014년부터 계속 전쟁 중이었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부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겼고, 동부 지역에서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과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푸틴의 눈으로 보면 다르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준비 과정에서 푸틴은 줄곧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확대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던 1990년의 약속을 어겼다"라고 주장해왔다. 당시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용인하되, 통일 독일이 나토의 일원이 되는 것을 끝으로 나토가 동쪽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했고, 미국이 동의했다... 는 것이 푸틴의 주장이다.

하지만 서방세계는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거나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는 태도다. 가령 나토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팩트체크 항목에 "나토는 냉전(Cold War) 이후 나토가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는 나토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미국은 어떨까?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하는 조슈아 쉬프린슨 교수는 2016년에 엘에이타임스(L.A. Times)에 기고한 칼럼에서 나토의 확산 금지 문제와 관련해서 "러시아의 말이 맞다(Russia's got a point)"라며 미국이 약속을 어겼다고 했다. "1990년 2월 초에 미국의 리더들이 소련에게 제안을 했다. 2월 9일의 회의록을 보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가 (러시아가) 독일 (통일) 문제에 협조를 해준다면, '나토가 동쪽으로는 1인치도' 확대되지 않을 것을 '완벽하게 보장(iron-clad guarantees)'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후에 러시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협상을 시작했다. 공식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회의 기록 등) 모든 증거를 보면 이는 조건부(quid pro quo)였음이 분명하다. 고르바초프는 독일이 서방세계로 귀속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미국은 나토의 확대를 제한하는 게 그 조건이었다."

오른쪽부터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부장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

나토의 웹사이트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합의, 서명한 문서가 없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서방세계가 약속을 깼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구두로 약속한 기록이 엄연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오는 수요일(2월 15일)에 침공할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바이든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러시아의 아주 상세한 침공계획을 입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다음 편 '불안한 세계 ➃ 푸틴의 선택'에서는 푸틴이 이 복잡하고 어려운 전쟁을 정말로 시작할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설계 중인지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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