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이 이번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거대한 전제(premise)가 있었다. 미국과 나토(NATO)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크라이나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 강력한 성명을 발표하고 경제 제재를 시작하겠지만 몇 년만 고생하고 나면 유럽과 미국의 정권은 바뀌고, 사람들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세계는 경제적 번영을 위해 러시아와의 화해를 반길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직접 싸운 미국과 중국도 다시 화해하고 손을 잡는데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상대방의 피를 흘리지 않은 경우라면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작업은 몇 년 안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이상정치를 위한 반론'에서 소개한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미국이 자국민으로 이뤄진 군대를 보낼 지역은 소수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그중 1순위는 서유럽이다. 미국은 이미 유럽에 많은 국민을 보낸 적이 있고, 다시 서유럽이 위협을 받아서 군대를 보낸다면 미국인들은 찬성할 거다. 미어샤이머는 동아시아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나토의 회원국이 아닌 동유럽 국가는 절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미국의 유권자, 유권자의 자녀, 유권자의 배우자를 죽으라고 보내기에 우크라이나는 미국에서 너무나 멀고 관심 없는 땅이다.

나토도 마찬가지다. 이 조약기구가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회원국 중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모두가 똑같은 공격을 받은 것처럼 대응하기로 한 문서에 서명을 했으면 개입해야 하고, 그건 대통령 개인이나 정당의 결정이 아니다. 여기에 마법이 숨어있다.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민주국가의 지도자를 "왜 내 자식을 전쟁터에 내보내느냐"라는 유권자의 항의로부터 보호해줄 방화벽이 바로 조약이다. 이건 대통령 개인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 개입의 의무가 없는 전쟁에 자국군을 보낼 때는 리더의 결정이고, 그 결과로 인한 책임은 그와 그가 속한 정당이 져야 한다. 푸틴은 전 세계인들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우크라이나라는 땅에 자국민의 목숨과 자신의 정치적 목숨을 걸 지도자는 없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No Conundrum

그걸 잘 보여준 일이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상공을 '비행금지구역(No-fly Zone)'으로 설정해달라는 거듭된 요청을 미국과 나토가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비행금지구역은 말로 설정하는 게 아니라 공군기로 하는 거다. 나토의 공군기가 날아가서 침범한 러시아 공군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한 금지구역은 금지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토 국가들은 나토군과 러시아군이 직접 싸우는 상황을 '3차 세계대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젤렌스키가 비행금지구역 설정 대신 차선책으로 부탁한 폴란드 미그 29 전투기 제공도 사실상 무산됐다. 백악관과 민주, 공화 양당이 합의한 드문 일이었지만, '미그기가 나토의 군 공항에서 출발하면 나토의 개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나토 개입=3차 세계대전'이 또 한 번 발목을 잡은 거다. 푸틴이 이번 전쟁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항전의지는 완전히 잘못 짐작했지만, 미국과 나토의 항전의지는 '0'이라고 제대로 맞춘 셈이다.

트롤리 딜레마

나토가 처한 상황은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Trolley Conundrum)'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섯 명이 죽게 된 상황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대신 죽일 수 있느냐는 이 질문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윤리적인 딜레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문제는 트롤리 딜레마가 아니다. 트롤리 딜레마를 설명에 동원한 이유는 미국과 나토에게 우크라이나 사태는 처음부터 명백한 답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트롤리 문제가 딜레마인 이유는 '레버를 잡은 사람이 행동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토의 눈에 우크라이나의 문제는 아래 그림과 같다. 즉, '레버를 잡은 사람이 행동하지 말아야 더 적은 사람이 죽는' 상황이다. 나토가 나서서 러시아와 대결하면 전장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핵무기가 사용될 확률도 크게 높아진다. 그야말로 인류가 두려워하던 3차 세계대전이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우크라이나만 러시아가 차지하고 끝난다. 그리고 젤렌스키의 항복은 빠르면 빠를수록 나토와 미국의 양심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즉 이 사태는 애초에 전혀 딜레마가 아니었다. 푸틴이 바로 여기에 베팅을 한 거다.

미국의 문제

그런데 그런 마음속 기대와는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이 단결해서 싸우기로 하면서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CNN의 한 기자는 이를 두고 "젤렌스키는 서구의 도덕적 양심(moral conscience)"이라고 했다. 젤렌스키가 서구의 도덕적 양심을 대변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머지 서구 국가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름을 걸고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을 나라는 (거의) 없다.

문제는 그 가책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이다. 서구 국가들은 빠르게 단결했고,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직접 전투 외에 할 수 있는 건 모두 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장 러시아의 폭격 아래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많은 나라들이 참여한 러시아 경제제재는 유례없는 강도로 진행 중이고 러시아의 경제를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 규모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많은 부분이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러시아를 세계 경제에서 차단해버리면 그 충격은 러시아만이 아닌 제재에 참여한 나라들에게도 간다. 러시아의 해외 자산을 동결하고 러시아 은행들을 스위프트(SWIFT) 결제망에서 배제하는 강도 높은 제재를 하면서도 러시아의 에너지만큼은 여러 나라들이 수입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도그거다. 유럽이 사용하는 천연가스의 40%, 석유의 27%가 러시아에서 오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미국도 러시아에서 석유를 수입하지만 비중은 2%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정은 훨씬 낫다. 미국의 의회가 유럽을 놔두고 단독으로 러시아 에너지 수입을 금지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미국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우선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로 에너지 값이 폭등하기 시작했고, 미국만 해도 1갤런 당 휘발유 값은 하루아침에 3달러대에서 4달러대로 치솟았다. 가뜩이나 인플레이션으로 올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할 거라는 예측이 파다한 상황에 말 그대로 '기름을 부은' 셈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야당인 공화당도 우크라이나 원조와 러시아 제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바이든에 대한 공격을 늦출 생각은 없다. "지금 기름값이 올라간 건 러시아에 대한 제재 때문이 아니라, 재생 에너지 정책을 추구하면서 화석 에너지 생산을 억누른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라며 민주당의 기후위기 대책을 공격하고 있다.

지정학적 구도 변화

이번 전쟁으로 초래된 변화는 단순히 미국의 대러시아 정책만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생각하는 세계 구도의 모든 것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이 생각하던 구도는 '미국 대 중국'의 경쟁 관계였고, 유럽은 미국의 관심사에서 2선으로 밀려나고 있었지만, 이제 갑자기 '민주주의 진영 대 독재 진영'으로 급선회하면서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들을 모조리 챙겨야 (혹을 "줄을 세워야") 하게 되었다. 한국이 이번에 러시아에 전략물자 수출을 중단하기로 한 것도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20세기에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이었고, 지금은 민주주의와 독재국가의 대립이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이런 구도는 지난 냉전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제2의 냉전(Second Cold War)이라 불린다. 하지만 냉전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지정학적 구도가 그렇게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왜냐하면 각 나라의 정치 지형이 자본주의, 공산주의의 구분선을 따라 나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대표적인 예다. 미국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한 한국의 정부가 민주주의인지 독재 정부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 한국의 1980년대 반미시위는 미국의 그런 위선적 태도를 비판한 것이었다. 미국은 자국의 지정학적 전략에 부합하기만 하면 민주주의 실행 여부는 눈감아줄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동의 산유국들에서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해도 미국은 여전히 감싸 보호해주었다.

이는 현재 중국이 신장의 위구르인들의 인권을 탄압한다는 미국의 비판에 콧방귀를 뀌는 이유이기도 하다.

Why Chinese feel free to dismiss America’s human rights concerns
China’s anti-imperialist language should remind US policymakers why they have failed to convince the world of human rights abuses in Xinjiang. America’s foreign policy double standards have undermined the credibility of its claims.

뉴욕타임즈는 21세기에 다시 시작되는 두 번째 냉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비록 이번 전쟁이 미국이 푸틴의 러시아를 상대로 도덕적 우위를 자랑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단순한 도덕적 우위를 넘어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원해야 하는 국가들이 있고 그들 중에는 미국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나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중국이 그렇다. 오늘 나온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러시아가 중국에게 경제 원조와 군사 장비 원조를 부탁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정보 입수 채널을 보호하기 위해 정확하게 어떤 장비의 원조를 요청했는지, 중국의 답변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러시아가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 중국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중국을 지나치게 몰아세우면 안 되는 입장이 되었다.

또한 폴란드, 헝가리, 터키와 같은 나라들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나라들로 분류되지만 당장 러시아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 나라들의 국내 정치문제는 눈을 감아줘야 한다. 이는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도 마찬가지다. 당장 러시아 석유를 수입하지 않기로 한다면 베네수엘라의 석유가 필요하게 되고, 마두로 정권을 물러나게 하려던 과거와 달리 사이좋게 지내야 할 나라로 바뀐다.

즉, 각 나라들이 분명한 편 가르기를 해야 하는 냉전에서 각 나라의 국내 정치에 대해서 눈을 감아줄 수밖에 없는데, 21세기 냉전의 구도는 첫 번째 냉전과 달리 '민주주의 체재 대 독재 체제'라는 구도를 설정해야 하는 상황이라 처음부터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순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미국이 아프게) 사용할 나라는 중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일은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인들이 푸틴에게 빠르게 항복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크라이나를 나무랄 수 없다. 원인의 제공자는 그 누구도 아닌 푸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