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일보 '박상현의 디지털 읽기'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칼럼이 제가 원고를 출고(신문사에서는 원고를 편집부에 넘기는 걸 그렇게 부릅니다)한 날에 발행된 유용원 기자의 칼럼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는 바람에 원고를 수정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용원 군사전문기자의 글도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첫 전면전이라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는 두 ‘내러티브(narrative·사건에 맥락을 부여하는 서사)’가 있다. 첫째는 푸틴이 자주 불평해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끊임없는 확대’다. 러시아가 이를 참지 않기로 하면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전통적 현실 정치 계열 학자도 일부 동의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엄연한 주권국가를 침범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여기에 푸틴의 둘째 내러티브가 등장한다. 우크라이나는 원래 러시아와 분리될 수 없는 한 지방에 불과한데 서방세계의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서서 우크라이나를 떼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푸틴은 “우크라이나 정부는 ‘네오나치 마약중독자들’이고 친러시아 주민들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은 지난 10년 넘게 첫째 이유를 들며 전쟁을 준비해왔고, 준비가 끝난 후 침공 직전에 둘째 이유를 꺼내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는 핑계를 삼았다.

러시아군이 아군 식별 표시로 사용하는 'Z'는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첫째와 달리 둘째 내러티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유는 미국이다. 지난 몇 년 간 러시아의 정보전을 연구한 미국은 정보 당국이 수집한 푸틴의 전쟁 내러티브 조작 계획을 낱낱이 공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많은 정보 전문가가 미국의 방침 변화에 깜짝 놀랐다. 수집한 정보를 공개하는 건 정보를 수집한 루트와 정보원을 노출할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금기처럼 여겨져왔는데 바이든 행정부가 그런 전통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입수한 정보를 군에서만 사용했다면 이제는 적국의 전쟁 정당화 논리를 무력화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쟁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를 보는 세계인의 여론이 러시아 제재를 끌어내는 데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결정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친러 성향 양민들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조작 영상까지 제작해둔 상태였는데 미국의 이런 폭로로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바이든이 한 달 전부터 침투 예상일까지 기자회견에서 예견하면서 푸틴의 계획은 미국의 손바닥 위에 있음을 과시했다. 정보 분야 전문 기자들에 따르면 미국 정보부는 처음에는 이런 정보 공개를 몹시 꺼렸지만, 그렇게 공개한 정보가 들어맞으며 푸틴의 내러티브가 좌절되자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KGB 시절의 블라디미르 푸틴

결국 푸틴은 세계인의 동의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군의 침공 초기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내러티브에 따르면 젤렌스키 정부의 압제 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군을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었고, 그런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공격을 최소화하고 정부의 항복을 빠르게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런 푸틴의 기대는 환상에 불과했고, 미국은 이를 두고 “푸틴은 자신이 만들어낸 대외용 메시지를 스스로 믿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전직 KGB 요원으로 뼛속까지 정보기관 체질이 남아있다는 푸틴은 왜 이런 어설픈 실수를 했을까? 미국 정보 당국에서는 그가 지난 2년 팬데믹 기간에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킨 것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푸틴과 가까운 인사라 해도 직접 만나서 대화하려면 2주일 격리 기간을 거치도록 하는 바람에 그에게 ‘바깥세상,’ 즉 현실을 전달해 주는 이너서클이 아주 작아졌다는 것이다.

코로나 결벽증으로 푸틴은 현장을 아는 군 지휘관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기를 꺼렸다. 많은 전략 논의를 휴대폰으로 나눴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휴대폰 전파는 통신 보안을 지키기 쉽지 않은데, 푸틴의 이런 무모한 행동으로 미국의 정보기관은 “48시간 내에 러시아군이 움직일 것”이라는 족집게 예측까지 할 수 있었다.

푸틴의 내러티브 조작을 꺾은 요인 또 하나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다. 정치에 뛰어들기 전에 배우로 활동하면서 미디어의 본질을 아주 잘 이해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푸틴에게 복병이었다. 연기 생활을 대부분 러시아어로 했고, 러시아에도 많은 팬을 거느린 젤렌스키는 푸틴의 침공 직전에 러시아어로 러시안들에게 직접 호소했고, 이를 소셜미디어로 접한 많은 러시아 국민이 반전 시위에 참여하며 러시아 정부를 당황하게 했다. 그는 러시아 침공 이후에도 수도를 떠나지 않고 매일 인터넷에 올리는 동영상을 통해 소탈한 태도와 진솔한 말투로 세계 각국 리더와 국민 마음을 사로잡고, ‘진정성(authenticity)’을 무기로 맞서고 있다. 크렘린이 쏟아내는 허위 정보가 발 붙일 틈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만은 푸틴의 내러티브가 아직 먹히고 있다. 푸틴은 집권 후 러시아의 미디어를 엄격하게 감시·통제해왔고,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더욱 강도를 높이고 있다. 게다가 전쟁 직후 페이스북을 비롯한 해외의 소셜미디어 기업들을 차단하면서 러시아는 북한과 비슷한 ‘정보의 섬’으로 빠른 속도로 전락하고 있다. 해외를 상대로 한 정보전이 여의치 않게 되었지만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보 통제는 훨씬 더 막강해진 것이다. 심지어 경찰이 길 가는 시민들을 붙잡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무자비한 감시까지 일어나고 있다.

국제 해커 단체가 러시아 미디어를 해킹해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려는 시도도 있지만, 러시아인의 절대 다수는 푸틴의 주장을 그대로 믿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러시아가 경제 제재 등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푸틴의 지지율은 오히려 상승해 71%에 이른다. 국내용으로 전락한 푸틴의 내러티브 조작으로 이제 러시아인들은 세계인들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푸틴의 내러티브, 정보의 평행 우주에서 살게 된 셈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레이션: 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