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력 세계 2위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만 해도 전쟁이 한 달이 넘게 지속될 거라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특별 군사작전"이 일주일 내로, 아니 3일 안에 상황이 종료될 거라고 생각한 것은 푸틴만이 아니었다. 그랬던 전쟁이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군의 무능이 사실상 전 세계에 생중계되다시피 했지만 우크라이나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군사력 세계 2위는 단순한 러시아의 주장이 아니라 엄연한 숫자에 근거한 외부의 평가였다. 따라서 푸틴의 군대가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전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전망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원래 전쟁 초기에는 실수와 착오가 많은 법이며, 군대는 전투를 경험하면서 배우고 성장한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도 침공을 시작한 직후에는 작전 실수가 많았지만 빠르게 학습을 하면서 강한 군대로 거듭났기 때문에 러시아군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제 실력을 찾을 거라는, 그래서 낙관하지 말라는 조심스러운 접근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지 이제 3개월이 되었음에도 러시아군이 학습을 하고 있다는 징후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이번 전쟁에서 최악의 전투는 지난 12일에 일어났다. 한 자리에서 대대 규모의 인원(400명)이 사망하고, 탱크, 장갑차를 비롯한 군장비 80여 대가 파괴되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진 거다.

이 전투(라기보다는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보는 게 맞다)는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러시아군과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을 포위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대대급 병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발생했다. 위의 지도를 자세히 보면 북쪽에서 진격 중인 러시아군(빗살 무늬로 표시된 지역)은 시베르스키도네츠 강(Siverskyi Donets River, 흔히 그냥 '도네츠 강'이라 부른다) 때문에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군은 지난 12일에 이 강을 건너기로 한 것이다. 이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으면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포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제까지 건너지 않고 있었을까? 아무리 21세기 전쟁이라고 해도 산과 강 같은 큰 지형지물(地形地物)은 군사작전에 거대한 장애물이다. 이 글의 3편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지형지물은 경우에 따라서 수비하는 쪽에, 혹은 공격하는 쪽에 큰 부담이 된다. 특히 탱크와 같은 대형 군장비로 강을 건너는 큰 규모의 도하작전(渡河作戰)을 한다는 건 전세가 유리한 상황에서도 위험하다.

도하작전은 한국에서 군이 대규모 훈련을 했다는 뉴스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자료화면이라서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아래 영상에서 도하작전을 수행하는 병력이 적의 공격에 얼마나 크게 노출되어 있는지를 보면 위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탱크가 건널 수 있는 부교(浮橋, 떠있는 다리, pontoon bridge)를 만들기 위해 많은 배를 강에 연결해야 하고, 워낙 고난도의 작업이라 밝은 대낮에 해야 하는데, 강 주변은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엄폐물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몇 시간 동안 병력과 장비가 고스란히 적에게 노출된다.

그래서 함부로 감행할 수 없는 것이 부교를 이용한 도하작전이다. 위의 지도에서 러시아군이 강을 넘지 못하고 북쪽에 머물러 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러시아군은 지난 12일에 무리한 작전을 감행했고, 우크라이나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도하 지점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아래 영상은 포격이 끝난 후의 상황을 드론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강을 건넌 장비와 대기 중인 장비들이 모두 파괴된 것으로 보아 우크라이나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시점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400명이 넘는 러시아 병력이 숨졌고, 탱크들을 비롯해 80여 대의 차량/장비들이 파괴되었다.

러시아군이 이번 전쟁에서 단일 전투로서는 최악의 피해로 기록될 이 사건이 보여주는 건 전문가들이 생각했던 러시아군의 학습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전쟁 자체가 러시아에게는 무리한 도발이었는데, 두 달 반 동안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고도 최악의 무리수를 감행한 것이다.

큰 뉴스가 된 러시아군의 피해들이 있다. 수도 키이우를 향해 일렬로 진격하다가 멈춰 선 수십 킬로미터의 행렬을 우크라나이의 드론들이 공격했던 것, 러시아가 자랑하던 순양함 모스크바의 격침, 이번 도하작전 실패가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의 피해가 가진 공통점은 러시아군의 무능력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능력과 투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지원은 물론 중요한 요소이지만, 러시아가 (서방 세계가 생각했던 수준만큼만) 준비가 되어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피해들이다.

분노한 인플루언서

그렇다면 러시아 국민들은 이런 군의 무능을 알고 있었을까? 몰랐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뉴스 매체인 국영 TV 방송은 철저하게 크렘린의 프로파간다를 전달하고 있고, 온라인 미디어들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미디어의 보도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러시아 국민들이 철저한 "정보 버블" 안에 있다고 한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 도네츠 강 도하작전의 실패는 달랐다. 러시아 국방부의 편에서 러시아군에 유리한 소식만을 철저하게 전달해온 러시아 전쟁 블로거들("milbloggers") 중에 이번 작전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메시징 앱인 텔레그램을 통해 퍼진 이들의 비판은 러시아의 병사들이 아닌 지휘관들을 향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

미국, 영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를 러시아군이 빠르게 바뀌는 전투 현장에 있는 장교, 하사관들에게 재량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미국 및 나토 국가들과 달리 러시아군은 20세기 때 사용했던 상명하달식 전투를 하고 있어서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도 수정이 불가능하고, 현장의 상황이 상부로 전달되기 힘든 구조다. 이에 관해서는 '3 대 1'을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

텔레그램에서 무려 210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친 러시아 블로거 유리 포돌리아카(Yuri Podolyaka)는 "나는 오랫동안 말을 참아"왔지만 "멍청함에서 비롯된 빌로호리우카의 일(=도하작전의 실패)로 내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군 지휘부가 멍청해서 최소 한 개, 어쩌면 두 개의 대대전술단(BTG)이 날아갔다"라고 말하고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크렘린의 주장을 비웃었다. "전쟁에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똑같은 문제가 3개월 동안 지속되고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나를 비롯해 수백만 러시아인들은 이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리더들을 의심하게 된다."

텔레그램에서 활동하는 또 다른 블로거는 "이건 멍청한 게 아니라 고의적인 방해행위(사보타주)"라고 까지 비난했고, 또 다른 블로거는 (우크라이나군이 공격하기 쉽게) "대대전술단을 강가에 전개해 놓은 이 '천재적인 장군'이 누군지 이름을 확인하기 전에는 군 개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군 지휘부에 대한 비난은 온라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한 퇴역 대령은 러시아 국영방송의 뉴스 프로그램에 나와서 몇 주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을 쏟아놓았다.

"우선 우리는 정보의 마취제를 맞으면 안 된다는 점(정부의 프로파간다를 무조건 믿지 말라는 의미–옮긴이)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이 사기가 떨어지고 심리적 붕괴를 겪고 있어서 큰 위기에 놓여있다는 얘기를 돌아다니는데, 좋게 말해서 전부 가짜 뉴스입니다. 유럽의 원조가 우크라이나에 모두 도착하면 우크라이나인 1백만 명이 무장하게 된다는 것은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러시아는 이를 작전과 전략 계산에 고려해야 합니다. 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입니다."

"게다가 러시아의 정치학자들 사이에는 '군에서 복무하기로 계약한 사람은 모두 프로페셔널'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는데, 이는 절대로,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반면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조국을 지키려 하고 있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허한 위협은 소용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상황 전체를 전략적인 관점에서 바라봅시다. 핀란드를 향해 미사일을 쏠 수 있을 것처럼 위협하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우스운 일입니다. 결국 현재 러시아의 군사정치학적 상황에서 불리한 점은 사실상 전 세계가 우리를 적대시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건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군 지휘부의 무능을 비판한 블로거들과 달리 이 퇴역 대령의 지적은 이 전쟁을 이끄는 푸틴의 전략적 결정, 즉 핀란드와 스웨덴에 대한 위협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이 국영 TV에 등장한 것은 푸틴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겠지만,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푸틴은 이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앞으로 내려야 하는 선택은 석 달 전의 선택, 즉 침공에 대한 결정과 달리 푸틴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토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과거의 방침을 완전히 버렸고, 사실상 공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틴이 가진 옵션을 살펴봐야 한다. 핵무기는 정말로 푸틴의 옵션일까? 나토는 정말로 끝까지 개입을 피할까?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푸틴에게 다른 선택이 있을까?

('푸틴의 선택 ② 푸틴과 핵단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