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961년 예루살렘의 법정으로 돌아가 보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을 수행한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라 사실은 범죄를 주도한 인물임을 밝히려던 이스라엘의 검찰은 처음에는 라이프 매거진에 실린 기사의 내용으로 추궁했으나 "기자가 상상과 사실을 섞어서 쓴 글"이라는 아이히만의 주장을 꺾을 만한 근거를 가져오지 못했다. 검찰은 아이히만이 자백한 내용을 기사의 형태로 손에 쥐고 있었고, 이는 전 세계가 알고 있었지만, 기사가 실제 발언에 근거한 내용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다.

이 재판의 검사였던 기디언 하우스너 검찰총장은 라이프의 기사와 아이히만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기 위해 애썼고, 그렇게 해서 그가 찾아낸 것은 기사의 바탕이 된 녹취록이었다. 이 녹취록은 빌헬름 자센이 녹음한 내용을 타자기를 사용해 옮긴 것이었다. 기록 남기기에 철저했던 자센은 자신이 (아마도 비서가) 타자해서 초고가 만들어지면 이를 아이히만에게 보여줬고, 녹취록 원고를 받은 아이히만은 차근차근 읽으면서 틀린 부분, 잘못 옮겨진 부분을 손으로 직접 수정했다.

이스라엘 검찰은 이걸 어떻게 찾아냈을까?

아이히만 재판의 검사였던 기디언 하우스너 검찰총장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자센은 이 원고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사본을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복사기가 없었던 때라 그는 여러 장의 원고를 벽에 붙여놓고 필름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형태로 사본을 만들었고, 그렇게 만든 사본 중 하나를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가족에게 보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 린츠(Linz)에 가족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서도 의사로 일하던 동생 로버트가 그 형의 친필 수정 흔적이 남겨진 녹취록을 보관하게 되었다.

여기에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이라는  또 다른 나치 사냥꾼이 등장한다. 전쟁 후에 흩어진 나치를 추적하던 비젠탈은 이스라엘의 검찰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고, 하우스너 검사의 부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비젠탈에게는 아이히만 같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중요했는데, 하필 그런 그가 린츠에 머무르면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가족들이 근처에 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비젠탈이 정확히 어떻게 이 녹취록을 손에 넣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아이히만의 동생 집에 누군가 들어와서 책상 서랍에 보관하고 있던 녹취록이 사라졌고, 며칠 후 하우스너 검사의 손에 들려 예루살렘 법정에 등장한 것만이 알려진 사실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주재하던 판사는 하우스너 검사에게 문서를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고 물었지만 하우스너는 밝힐 수 없으니 묻지 말아 달라고 일축한다.

이스라엘 정부의 고민

그럼 검사는 녹취록으로 아이히만의 죄를 입증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아이히만은 비록 녹취록에 필적이 남아 있어도 자신이 녹취록의 원고를 모두 본 게 아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판사는 아이히만의 손을 들어준다. 결국 그 녹취록에서 아이히만이 손으로 직접 수정한 흔적이 있는 페이지만 아이히만의 발언으로 인정되었고, 그가 자신이 유대인 학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백한 부분은 여전히 증거로 인정되지 못했다.

이 글의 바탕이 되는 다큐멘터리 '악마의 자백: 사라졌던 아이히만 테이프'를 제작한 야리브 모저(Yariv Moser)는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이 과연 녹음테이프를 찾아낼 능력이 없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아르헨티나에 숨어있는 아이히만을 납치하고, 녹취록을 훔쳐올 만큼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는 마음만 먹으면 녹음테이프를 찾아낼 수 있었고, 법정으로 가져와서 아이히만의 목소리를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었을 거라는 것이 모저의 생각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검찰 측이 테이프를 거의 손에 넣었다는 얘기도 다큐멘터리에 등장한다. 그 테이프를 손에 넣은 누군가가 그 테이프를 법정에서 공개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검찰에 넘겨줄 수 있다는 제의를 했는데, 하우스너 검사는 법정에서 공개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다른 주권국에서 용의자 불법 납치는 물론이고 암살도 불사하는 이스라엘이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만은 온갖 원칙을 들어 입수와 공개를 회피하는 건 분명 이상하다. 이스라엘은 왜 아이히만 녹음테이프 입수에 적극적이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전후 신생국인 현대 이스라엘의 고민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을 이해하기 위해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겪은 한국의 예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된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평가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사실은 그가 친일파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자주 하는 주장이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이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반대하고 이를 방해했다"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그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하던 사람들을 측근으로 두고 보호해 줬다는 혐의를 받는다.

레조 카스트너 (이미지 출처: The Patriot Ledger)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하고 초대 총리를 지낸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Gurion)은 시오니스트(Zionist)였지만 그의 정부에도 나치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는 인물이 있었다. 레조 카스트너(Rezső Kasztner, Rudolf Israel Kastner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는 전쟁 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커뮤니티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이스라엘 건국 후에는 산업통산부 장관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카스트너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지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나치 부역자였다고 믿었고, 1957년에 결국 암살당하게 된다.

카스트너의 나치 부역 혐의는 다름 아닌 헝가리에 살던 유대인을 집단수용소에 보내어 죽게 하는 데 협조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나치라고 해도 유대인들을 한 번에 수천 명 씩 모아서 수용소로 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총으로 위협해서 열차에 태우기는 했지만, 자기와 가족이 결국 가스실에서 죽을 것을 안다면 필사적으로 탈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히너는 이를 철저히 숨겼다. 나치도 처음에는 '최종적 해결책'을 사용하지 않고 강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가스실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는 집단 학살의 소문이 퍼졌을 것이고, 의도를 의심하는 유대인들을 열차에 태우기 위해서는 커뮤니티 지도자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레조 카스트너가 바로 그 단계에서 아이히너와 협조한 인물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심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이번에 공개된 녹음테이프에는 아이히만이 헝가리에서 유대인들을 열차에 태우는 작업을 도와준 유대인 협력자들의 이름을 말할 때 카스트너의 이름이 등장한다.

카스트너가 나치 부역자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이 녹음의 존재를 몰랐다. 하지만 헝가리 유대인들은 소위 '카스트너 열차(Kasztner train)'의 존재를 알았다. 1944년 6월 30일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나치의 수용소 대신 안전한 스위스로 향한 이 열차에는 1,600여 명의 유대인이 타고 있었다. 카스트너는 나치 수용소로 가게 된 그들을 자신이 구출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그들에게서 돈을 받고 탈출 열차를 제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카스트너는 그들을 스위스로 보내기 위해서는 나치에게 뇌물을 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이뿐 아니라 카스트너는 나치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1945~46)에서는 나치 친위대 장교 몇몇을 다른 학살자들과는 달랐다는 증언으로 옹호하는 발언을 해서 많은 유대인을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시오니즘의 일원이었던 카스트너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에는 마파이(Mapai) 당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마파이당은 훗날 통합을 통해 현재의 이스라엘 노동당이 되는 정당으로, 벤 구리온이 초대 당수였다. 이스라엘에서는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벤 구리온 총리였지만 그의 정부 안에 포함된 카스트너 같은 인물은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였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만난 다비드 벤 구리온 총리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에는 카스트너의 딸이 등장해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아버지가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여해서 일부 나치 장교들을 옹호하는 증언을 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임시정부 역할을 하던 유대인 사무국(Jewish Agency)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아버지가 뉘른베르크로 가기 위한 여행비용을 유대인 사무국이 지급한 기록을 제시했다. (카스트너가 과연 민족의 반역자이냐, 아니면 쉰들러처럼 많은 유대인을 구한 존재이냐는 오랜 논쟁이었다. 2009년에 나온 다큐멘터리후자의 견해를 옹호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사실을 부인한다. 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나치를 옹호하겠느냐는 것이다. 나치의 부역자라는 국민적인 분노를 받고 있던 카스트너는 이스라엘 정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57년 3월 15일 밤, 자기 집 앞에서 세 명의 괴한에게서 총격을 받아 쓰러지고 열흘 뒤 사망한다. 카스트너의 암살범들은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아이히만의 재판이 끝난 지 1년 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석방되었다.

카스트너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 이스라엘 정부가 카스트너를 암살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카스트너가 왜 뉘른베르크까지 가서 나치 전범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문서가 훗날 공개되었다. 이 문서는 벤 구리온 정부와 독일을 연결하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마지막 편 '악마의 자백 ⑥'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