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에는 아이히만이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레조 카스트너를 속였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는 카스트너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민족의 배신자는 아니었다고 새롭게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1961년 아이히만 재판 당시 벤 구리온 정부는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 안에 어떤 내용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라이프 매거진에 등장한 내용을 보면 아이히만은 카스트너를 언급한 게 분명하고, 녹취록의 일부 등을 고려하면 카스트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는 벤 구리온에게는 어디에서 터질지 알 수 없는 지뢰밭이었다. 무슨 지뢰였을까?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카스트너는 1948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친위대 장교를 옹호하는 증언을 했고, 그가 뉘른베르크로 가는 여행비는 유대인 사무국에서 지급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럼 카스트너는 그 법정에서 어떤 나치를, 왜 옹호했을까? 그가 옹호한 나치 중 한 명인 쿠르트 베커(Kurt Becher)가 누구인지 알면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베커는 헝가리의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자산을 관리하던 나치 친위대였다. 그리고 그가 관리하던 자산 중에는 만프레드 바이스 철강공장(Weiss Manfréd Acél- és Fémművek)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계 만프레드 남작이 1차 세계 대전 중에 설립한 이 공장은 헝가리에서 가장 거대한 공업단지로, 직원 4만 명을 고용했고, 자전거에부터 자동차 엔진까지 다양한 철강 제품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군수산업의 요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1948년에 탄생한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킬 무기가 필요했고, 이를 조달하기 위한 비용으로 베커가 헝가리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재산을 가져왔다고 한다. 베커는 이렇게 압류한 재산으로 이스라엘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 협조했고, 이와 관련한 작업은 벤 구리온 총리가 밝히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벤 구리온에게는 다행하게도 이를 잘 알고 있는 카스트너는 1957년에 암살당했는데, 1961년에 아이히만 재판이 시작되면서 아이히만이 털어놓았다는 녹음테이프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 녹음테이프 안에서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왔을 가능성이 컸다.

쿠르트 베커와 만프레드 바이스 철강공장 (이미지 출처: Mémoires de Guerre, Wikipedia)

물론 700여 페이지의 녹취록은 이미 존재했지만 아이히만은 끝끝내 그 녹취록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판사는 피고의 주장을 인정했다. 녹음테이프와 대조하면 그 녹취록은 모두 사실임이 드러날 것이었고, 아이히만의 주장은 모두 무너질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그 녹취록이 절대로 공개되지 않을 것임을 자신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벤 구리온 정부가 숨기고 싶은 정치적 이유가 존재했다.

서독과 맺은 이면 계약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를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 정부만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1948년 나치의 패망 이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이 되었고, 아이히만의 재판이 진행된 1961년은 악명높은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지고 있던 때였다. 서독과 동독의 견제와 경쟁은 소련과 미국의 냉전 한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서독의 정부 내에는 나치 출신들이 가득하다는 얘기가 많았고, 이는 동독에는 아주 유리한 프로파간다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서독의 첩보기관 BND는 이를 예의 주시했고, 미국과 소련에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나중에 독일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후 동독과 서독 모두에 나치당원들이 일하고 있었지만, 서독 내무부 직원의 66%, 동독 내무부 직원의 14%가 나치당원 출신이었다고 한다. (아래 기사) 이 보고서는 2015년에 나왔다.

서독의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 숨겨야 했다.

전후 독일 관청은 공공연한 ‘나치 전력자 세상’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최병국 기자 = 독일 내무부가 2차 대전 후 내무부를 구성한 관료들의 전력을 조사해 충격적인 보고서를 4일(현지시간) 발표했다…

나치 출신으로 전후 서독을 이끌던 대표적인 인물이 한스 글로브케(Hans Globke)였다. 그는 아데나워 총리의 오른팔로 총리 다음으로 가장 강한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나치가 독일 내 유대인을 차별하는 데 사용한 뉘렌베르크 인종법을 기초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인물을 중용했을까? 해방 후 남한 정부에서 활동하던 친일파 인사들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경험 많은 관료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인재풀이라는 게 결국 나치의 인재풀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대통합의 정치를 하고 싶었고, 과거와 상관없이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는 데 참여하자는 메시지를 독일 국민에게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아이히만을 압박해서 자백받아내게 되면 그는 뭐라고 했겠는가? 아이히만은 "나는 (현재 서독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한스 글로브케가 만든 법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데나워 총리는 아이히만의 자백이 담긴 녹음테이프에서 한스 글로브케를 비롯해 자신과 함께 일하고 있는 나치 당원들의 이름이 공개될 것을 두려워했다.

왼쪽 사진은 나치 시절의 한스 글로브케, 오른쪽 사진은 서독 아데나워 총리와 글로브케 (이미지 출처: The Times)

아데나워나 벤 구리온 모두 민주 정부의 총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서 나치 인사들과 함께 일하고 있지만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어 그 안에서 온갖 이름과 비밀이 쏟아져 나올 경우 여론의 뭇매를 맞아 퇴진해야 하는 운명이다. 아이히만은 이미 밝혀진 죄만으로도 중형을 받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그가 단지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는지, 아니면 명령을 이행한 관료였는지가 두 총리에게 중요했을까? 이 점에서 아데나워 총리의 이해관계와 벤 구리온 총리의 이해관계는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서독에게서 국가 건설과 국방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 받아야 했고, 정부 내에 나치 출신이 가득한 서독은 이스라엘의 인정이 필요했다. 두 나라의 총리는 이스라엘로 납치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기 3개월 전인 1960년 3월에 뉴욕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벤 구리온은 독일과 외교관계를 맺기를 간절하게 바랐고, 이는 아데나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서 벤 구리온은 "저는 지난여름,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서 오늘날의 독일은 과거의 독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라고 했다. 아데나워와 독일이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력 일간지 하레츠(Haaretz)의 기자이자,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갖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 책 '핵무기를 위한 투쟁'을 쓴 애덤 라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아이히만 사건은 이스라엘에게는 작은 다윗이 이미 패한 골리앗에 맞서 정의를 요구하는 낭만적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이스라엘과 독일이 추진한 핵무기 프로젝트였다"라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갖지 않으면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빈곤한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게는 그런 돈이 없었고, 벤 구리온은 이 비용을 프랑스와 독일에서 지원받기로 했다. 아데나워는 핵무기 개발 비용을 지원해줄 수 있지만 "한스 글로브케의 이름이 법정에 등장하지 않도록 하라"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벤 구리온(왼쪽)과 아데나워의 1960년 뉴욕 정상회담 (이미지 출처: Americans for Ben-Gurion Unversity)

이런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벤 구리온 총리는 아이히만 재판의 검사이자 이스라엘의 검찰총장인 하우스너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한스 글로브케가 아이히만이 보낸 사람과 만났다는 기록이 담긴 문서를 공개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하우스너가 자신은 검사로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버티자 벤 구리온은 이 상황을 아데나워 총리에게 알렸다고 한다. 심지어 하우스너 검사가 재판 때 한 모두진술까지 벤 구리온이 먼저 읽고, 거기에 들어있는 "독일"이라는 표현을 "나치 독일"로 전부 고치게 했단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하우스너의 실제 모두진술 영상을 보면 "나치 독일"이라고 말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아이히만의 재판이 법이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총리가 재판과 관련해 부적절한 개입을 해가면서 까지 서독의 아데나워 정권을 보호한 것,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나치 전력자들을 보호한 것을 가지고 벤 구리온이 친나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실용적인 사람이었을 뿐이다. 첫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겪은 대 학살은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처음이 아니었고,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 낙관하는 유대인도 없었다. 벤 구리온은 이런 학살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랍국가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에게 핵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에는 돈이 필요했고, 돈은 있지만 더 이상 나치 국가가 아니라는 인정–그리고 그 인정은 이스라엘이 해줄 때 가장 효과적이었음은 당연한 얘기다–이 필요한 서독과 거래를 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히만의 자백을 녹음한 빌헬름 자센은 나치이기 이전에 돈이 필요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인체 실험으로 악명높았던 또 다른 나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의 행방을 찾는 모사드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 거래는 아이히만 재판 이듬해인 1962년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구해서 법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진실을 숨기는 거래를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지만 나치가 자신의 입으로 홀로코스트를 의도했고, 계획했고, 진행했다는 진술은 감춰졌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는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떻게 공개된 걸까?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센은 죽기 직전에 이 테이프를 아이히만의 유족에게 전달했고, 아마도 돈이 필요했을 그들은 스위스의 한 신문사에 이를 팔았다고 한다. 녹음테이프를 입수했던 신문사는 파산하는 과정에서 이를 다시 팔았고, 그렇게 팔려다니며 몇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아이히만과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결국 이 테이프를 독일연방기록보관소에 넘기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말고, 연구 목적 외에는 이 테이프를 미디어에 사용하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소문을 들은 이스라엘의 야리브 모저 감독이 기록보관소와 기증자를 찾아가 설득해서 다큐멘터리로 만들 수 있었다. 아이히만 재판이 60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고, 네오나치가 다시 활개 치며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이 지어낸 음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 상황에서 기증자는 올바른 판단을 한 것 같다.

이 시리즈 첫 글에서 이야기했던 개념으로 돌아가 보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금,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은 이제 포기해야 할 개념일까? 아렌트는 악은 사고를 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끔찍한 범죄에 생각없이 가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아이히만은 아렌트와 동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에도 등장하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Eichmann Before Jerusalem: The Unexamined Life of a Mass Murderer)'을 쓴 저자 베티나 스탕네트(Bettina Stangneth)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질문을 받고, 많은 독일인들이 생각 없이 범죄에 가담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국가가 범죄를 주도할 때는 그렇게 생각 없는 참여자들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만 보면 한나 아렌트는 틀렸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로서의 아렌트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렌트는 '평범한 악'은 악의 한 종류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악행을 하는 데서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평범함(banality)은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히틀러와 힘러, 아이히만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나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방법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