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울트라(American Ultra)'라는 영화를 봤다. 제법 유명한 배우들을 모았지만 판에 박힌 연기를 요구한 데다가 너무 억지스러운 설정 때문에 '이건 마리화나를 피운 상태에서 봐야 하는 영화 아닐까' 싶었다. (농담이 아니라 헐리우드 영화들 중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언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기에 그 리스트가 있다).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는데 굳이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여기에 등장하는 소품 때문이다.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이 경찰에 끌려가서 증거 사진들을 보며 자신의 범죄 현장을 떠올리는 대목에서 등장한 아래의 장면이다. 주인공이 농심 너구리 컵라면을 먹다가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이 컵라면을 그냥 "noodles" 혹은 "soup"이라고 부른다.

주인공은 너구리 컵라면을 그냥 'Noodles'라고 회상한다.

이 영화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설정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남부라고 분류하기도, 중서부, 혹은 동부라고 분류하기도 하는 애매한 주다. 이 주를 설명하는 가장 흔한 (그리고 비하적인) 표현은 "애팔래치아의 가난한 힐빌리들이 사는 지역"이다. 웨스트버지니아는 미국 50개 주에서 인구 중 백인 비율이 3위로 높고, 빈곤율은 5위, 미국을 휩쓸고 있는 아편계 마약 중독자/사망률로는 1위다. 무슨 말이냐면, 문화적 다양성, 특히 동양 문화에 관심이 큰 뉴욕이나 캘리포니아 같은 "세련된(urbane)" 주와는 아주 거리가 먼 지역이라는 얘기다. 그런 지역에 너구리 라면이?

월마트와 같은 미국 매장에서도 간혹 신라면을 볼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살던 곳이 캘리포니아나, 뉴욕, 뉴저지처럼 이민자들이 많은 해안가 대도시였기 때문에 웨스트버지니아의, 그것도 작은 마을의 작은 가게에서 저가의 일본 컵라면이 아닌, 너구리 컵라면을 먹는 장면이 등장한 것은 의외였다. 게다가 이 영화가 만들어진 건 2015년이다. 아마 PPL(product placement)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 인터넷을 좀 검색해봤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 결론은 이랬다: 헐리우드(한인들이 많기로 소문난 L.A.에 있다)에서 일하는 소품 담당자가 대본에는 그냥 컵라면(cup noodle) 정도로 나온 것을 자신에게 익숙한, 그리고 색이 강렬해서 카메라를 잘 받는 너구리 컵라면으로 결정한 게 아닐까?

미국 주유소의 한국 라면들

그런데 그 영화를 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미 북동부 매사추세츠주의 어느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가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 도로변에 있는 한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들른 김에 군것질할 만한 게 있는지 매장을 둘러보다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이 사진은 내가 찍은 거다:

미국 매장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컵라면은 왼쪽 위에 보이는 닛신(Nissin)과 마루찬(Maruchan)의 컵라면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고 갈수록 고급화되는 한국의 라면들과 달리, 미국에서 팔리는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들은 아직도 몸에 해롭다는 스티로폼 컵을 사용하는 컵라면 초기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 용돈 떨어진 대학생들이 생존을 위해서 먹는다고 농담을 할 만큼 끼니 때우기 용으로 소비된다.

물론 한국에서도 라면은 빨리 끼니를 때우는 용도로 사용되어왔지만, 현재 미국에서 팔리는 한국 라면들은 그보다는 조금 더 개성이 강한 먹거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젊은 층 사이에 불고 있는 핫소스와 매운 음식 열풍은 밋밋한 일본 라면과 달리 매운맛을 강조하는 한국 라면에 관심을 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위의 사진 상단 중앙에 있는 일본의 마루찬 라면은 "Hot & Spicy Beef" 맛이지만, 이 맛이 등장한 것 오래되지 않았다. 미국 시장에서 팔리는 일본 라면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소고기 맛, 닭고기 맛, 새우 맛, 세 가지뿐이었지만 10대, 20대가 일본 라면에 매운 스리라차 소스를 뿌려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새롭게 매운맛 제품을 내놓은 거다.

미국인들 사이에 부는 핫소스 열풍을 보도한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

그에 비하면 한국 라면들은 매운맛이 기본이다. 라면 포장에 "Mild(순한맛)"라고 적혀있지 않는 한 매운 라면이고, 심지어 순한맛 라면들도 일본 라면에 비하면 맵다. 따라서 비로소 매운맛에 열광하기 시작한 미국의 젊은 층이 일본 라면의 매운맛 버전이 아닌 '원조 매운맛' 한국 라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자연스런 일이다. 따라서 한국인들과 전혀 무관한 미국의 작은 동네에서 신라면, 사발면, 너구리 같은 라면이 팔리게 된 건 미국인들이 한국의 맛을 영접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매운맛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해서 들어본 적도 없는 브랜드의 라면을 찾아 먹지는 않는다. 문화는 그렇게 진공상태에서 이동하지 않는다. 특히 음식의 경우 문화적 편견이 항상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계기가 필요하다. 미국인들 사이에 "날생선(raw fish)"이라고 불렸던 일본의 초밥, 생선회가 미국에서 보편화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품, 문화가 미국에서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그렇다면 한국 라면이 미국에서 '맵고 신기한 음식'을 넘어 보편화되는 데는 어떤 요인들이 영향을 주었을까?

팬데믹과 퍼펙트 스톰

올해 초 하이프비스트에서 한국 경제지의 기사를 인용, "코로나19 때문에 한국 라면의 수출이 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국 라면을 가장 많이 수입한 나라는 중국(1억 5천만 달러)이고, 미국이 8천 2백만 달러어치의 라면을 수입해서 2위를 했다. 하지만 하이프비스트 기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해외에서 생산된 분량은 포함하지 않은 액수다. (미국에서 팔리는 많은 한국 라면이 현지에서 제조된다). 기자는 2020년에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비상식량을 사 모으는 과정에서 한국 라면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는 사실과 함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등장하는 '짜파구리'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판매량에 도움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팬데믹 직전인 2020년 2월에 개최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론가와 관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기생충'과 팬데믹은 한국 라면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는 이미 오를 대로 오르고 있던 한국 라면의 인기를 확인시켜줬다고 보는 게 맞을지 모른다. 2019년 옐프 블로그에 등장한 글은 라면과 핫팟(hot pot: 영어권에서 훠궈火锅를 부르는 이름) 같은 음식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미국에서 일찍 자리를 잡은 일본과 태국 음식에 대한 인기는 감소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래 그림에서 보듯 그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라면이었다. 2012년 이후로 수요가 거의 3배가 되었다.

출처: 엘프Yelp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한 한류의 유행 역시 빼놓을 수 없다. BTS 이전에도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한국 대중가요의 인기 가능성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BTS 이후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K팝이 미국 내에서 보편화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며칠 전 미국의 십대들이 즐겨 찾는 의류매장인 홀리스터에 들어가서 돌아다니는 동안 블랙핑크의 노래가 올리비아 로드리고,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아시아계가 적게 사는데도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을 만큼 이제 K팝은 소수가 듣는 특이하고 흥미로운 음악이 아니라 그냥 라디오와 매장 스피커에서 만나는 주류가 된 것이다.

그런데 BTS가 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왔으니..

한국 음식의 새로운 지위: 보편성

한국 라면의 지위 변화가 그렇다. 10년 전 만 해도 아시안 그로서리, 혹은 아시아계가 많이 사는 지역에 가야 만날 수 있었던 매운 사발면이 한인이 없는 한적한 도로변 주유소의 좁은 매대에 올라와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누구나 다 아는 음식의 반열에 오르면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도 '남들이 다 먹으니 나도 먹을 수 있다'라는 생각에 시도하게 되고, 그렇게 한두 번 먹게 되면 라면의 진가를 깨닫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 라면은 까다로운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발전시킨 결과물이니까 그렇다.

특정 문화권에서 발전하고 인기를 끄는 음식은 사실상 다른 문화권 사람들도 모두 좋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음식이라는 것이 원래 배워서 알게 되는 것(acquired taste)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낯설어도 한 곳에서 성공한 음식이라면 몰랐던 사람들도 좋아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열린 마음으로 시도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느냐일 뿐이다.

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다.

한국 라면의 성공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한국의 기업들의 실력이 발휘될 수 있는 완벽한 문화적 토양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 것이 2020년이다.

한국 라면의 인기가 심상치 않게 높아지자 2020년 6월, 뉴욕타임즈가 운영하는 리뷰 전문 사이트인 와이어커터가 미국에서 팔리는 즉석 라면들을 분석, 리뷰하는 글을 게재했다. 원래 이 사이트는 전자제품, 특히 가전제품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을 리뷰하는 곳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사에 민감한 언론사답게 재빨리 라면 리뷰를 기획한 것이다. 글 상단에 '짜파구리'의 사진을 넣었을 만큼 대중적 관심을 반영한 기사였다.

독자들 사이에 큰 히트를 한 이 기사에서 리뷰한 11개의 라면 중에서 한국 라면은 1위(신라면 블랙), 3위(짜파게티와 너구리), 6위(신라면 건면), 8위(신라면 컵라면)를 차지했고, 미국에서 팔리던 전통적인 일본 라면들은 중하위에 몰렸다.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제품과 라면을 좋아하는 소비자들을 두고 경쟁하며 발전한 제품들이 맞붙는다면 결과는 당연하다.

사족: 라면의 영어 명칭

잘 알려진 대로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는 일본이다. 한국은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와서 처음에는 최대한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 애썼다면, 한국인들이 좋아하기 시작한 후에는 한국 입맛에 맞도록 발전시켰다. 그렇다 보니 한국의 라면은 일본의 라면과 사뭇 다른 존재가 되었다. 한국의 김밥이 일본의 노리마키 같은 초밥과 비슷해 보여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맛을 가진 음식인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해외에 수출하는 과정에서 이미 진출한 일본의 라면의 표기법인 ramen을 따라 하면서 표기법에 혼란이 생겼다. 오뚜기는 영문 표기를 일본식으로 ("Jin ramen")하고, 팔도의 경우도 일본식 라멘을 쓸 뿐 아니라 비빔면조차도 "Bibim men"으로 표기하고, 농심은 라면 표기를 피하고 그냥 "noodle soup"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누구도 "라멘"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 음식 요리법으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망치 같은 유튜버도 "일본 라멘의 한국 버전은 라면(ramyeon)이라고 표기한다"고 소개하기 때문이 미국인들 중에서도 한국 라면을 잘 아는 사람들은 ramyeon이라는 표기법을 사용한다. 한국의 라면이 일본식 라면과 분명히 다른 음식이 되었다면, 그리고 점점 많은 사람이 한국의 ramyeon을 일본의 ramen과 구분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표기법도 독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애국심이 아니라 브랜딩의 문제다.

한국 라면을 잘 설명한 기사

이번 글은 음식과 문화, 그리고 브랜딩이라는 주제가 섞인 글입니다.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치킨 샌드위치 전쟁스바루 자동차의 젠더 마케팅 이야기, AOC의 브랜딩 전략,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R 발음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으실 거예요. 무료 회원이라 읽을 수 있는 한도에 도달하셨다면 여기에서 쉽게 유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어요! (해외에 계신 분들을 위한 페이팔 기능도 거의 다 준비되었습니다.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