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현대자동차는 LGBTQ+ 커뮤니티가 반길 만한 광고를 공개했다. 광고 시작부터 트랜스젠더가 보이고,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과감하게 새롭게 정의하는 문구들("Families are made" "Families are chosen")이 배경에 등장한다. 할머니에게 "세상 최고의 엄마"라는 모자를 씌워주는 장면은 단순한 젠더 다양성을 넘어 가족관계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의 과격한 수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유튜브 영상 밑 댓글에도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는 게 보인다.

이거 현대자동차 맞나? 현대가 이렇게 쿨하고 개방적인 기업이었나?

우리가 아는 현대자동차 맞다. 다만 이 광고가 한국이 아닌 현대자동차 미국법인에서 만들어 미국 시청자들에게만 보여진다. 이 광고를 소개한 페이스북 그룹 '퀴어 포럼'에는 이 광고가 "한국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건 오히려 슬프고 속상한 소식"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해외에서만 다양성에 적극적인 건 삼성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의 미국 법인만 보면 DE&I(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다양성, 평등, 포용을 요새 이런 약자로 부른다)에 앞장서는 회사처럼 보인다. 한국에서는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보수적인 종교계와 그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권과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대기업들은 그들을 응원하기는 커녕 싸움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는데, 정작 해외에서는 이렇게 훌륭한 기업으로 포장되고 있는 거다. 모든 "해외"에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들은 미국 시장에서 이 부분에 유독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인다.

스바루 마케팅 팀의 발견

그런데 미국시장도 처음부터 LGBTQ+ 마케팅에 친화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우연하게 이 가능성을 발견한 기업이 있었고, 그 기업이 마케팅에 성공하자 많은 기업들이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그 기업은 한국 만큼이나 보수적인 사회로 유명한 일본의 자동차 회사 스바루Subaru였다.

때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요타, 혼다와 달리 미국시장에 늦게 진출한 스바루는 매출규모가 훨씬 작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스바루는 AWD(all-wheel drive)를 기본으로 장착한 모델들을 (전륜구동의 일본차보다) 높은 가격에 파는, 다소 작은 시장을 겨냥한 회사다. 미국 시장에서 재미를 보지 못해 한 때 철수하기도 했던 전력을 갖고 있다.

스바루의 마케팅 팀이 스바루를 사는 소비자들을 분석해보니 교육계, 의료계 종사자, IT 종사자들이 많았고, 아웃도어 활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네 그룹 외에 한 가지 그룹이 더 눈에 띄었다. 매사추세츠주 노스햄튼, 오레건주 포틀랜드 같은 곳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눈에 띄었고, 많은 경우 여성이었다. 레즈비언들이었다. 많은 전문직 레즈비언들이 아웃도어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픽업트럭처럼 크지 않지만 비포장도로를 쉽게 달릴 수 있는, 그러나 지프처럼 지나치게 남성적인 이미지가 붙지도 않은 스바루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스바루는 마케팅 팀의 분석에 따라 각각의 소비자 그룹에 맞춰 광고를 제작했는데, 레즈비언을 비롯한 성소수자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는 조심스러웠다. 1990년대 만해도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이제 막 주류 문화에 편입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레즈비언 그룹을 내세우면 다른 그룹에 속한 소비자들이 "레즈비언의 차"라고 인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광고가 탄생했다:

"It's Not a Choice. It's the Way We're Built(선택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겁니다)"라는 말은 "나는 젠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태어났다"라는 유명한 표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은 이 광고를 보는 즉시 자신들을 향한 광고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들 외에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게 그저 스바루의 AWD를 광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쳤다.

또한 "캠핑과 강아지와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좋아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차라는 게 아쉽네요" 같은 표현도 레즈비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표현했기 그 커뮤니티에서는 금방 알아보고 배꼽을 잡았지만 이성애자들에게는 레이더에 쉽게 잡히지 않았다. 당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는 스바루의 광고 속 암호를 해독(decoding)하는 것이 재미였다고 할 만큼 성공한 마케팅이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이 미국 문화에서 빠르게 전면에 등장하고, 고소득-고소비 집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스바루의 게이, 레즈비언 마케팅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바루는 메시지를 좀 더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 커뮤니티를 겨냥한 마케팅을 했다.

"자신의 취향에 완전히 만족하는 (차)"라는 아래의 광고는 취향(orientation)이 성적취향(sexual orientation)으로 읽힐 것을 의식하고 만들었고, "Get out. And stay out"은 광고 이미지만으로 봐서는 집에 들어오지 말고 야외로 나가라는 말이지만, 커밍아웃을 하고 숨지 말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쯤되면 이성애자들도 슬슬 눈치를 챌 정도가 된다.

스바루는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한다고 여겨지지 않기 위해 HIV/AIDS 치료제 연구와 LGBT 단체에 수 백 만 달러를 기부했고, 커밍아웃한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를 모델로 사용하면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고 과시했다.

하지만 이 모든 마케팅 노력은 일본의 본사가 아닌 미국 지사에서 해낸 일이다. 자동차 회사가 성소수자 마케팅에서 앞서나가게 된 이유도 과거 미국 시장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 자동차 브랜드는 개인의 정체성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블루컬러 노동자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포드나 시보레를 타지, 캐딜락이나 독일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자신의 이미지와 벗어난 브랜드는 꺼렸다. 그런데 이제 막 정체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아직 자신들의 것이라고 할 만한 자동차 브랜드가 없었다가 비주류 브랜드 스바루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바루는 과연 성소수자와 다양성에 친화적인 기업일까? 스바루의 마케팅을 담당한 팀 베넷Tim Bennett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려면 기업 내의 성소수자 직원들 부터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를 일본 임원들에게 설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일본 임원에게 이를 설명하자 "좋아요. 그거 몇 년 전에 캐나다에서도 했습니다. 다른 안건 있나요?"라며 곧바로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광고 캠페인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지사의 성소수자 직원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다. 보수적인 미국인들로 부터 공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대응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물론 스바루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제품을 팔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업이 변했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정체성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고, 무엇보다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류로 인식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때로 기업의 이익은 소수자의 이익과 일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소수자가 큰 소비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젠더 다양성에 대한 기업 후원이 이제 막 싹트려 하는 한국에서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현대자동차의 미국 광고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