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번역에 참여한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옮긴이의 말을 옮긴 것입니다. 출판사인 웅진 지식하우스에서 오터레터 독자 여러분께 10권을 선물하기로 하셨습니다. 이 책의 추첨에 참여하시기를 원하시는 독자들께서는 댓글로 의사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흔히 ‘21세기에 일어난 20세기형 전쟁’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러시아군의 전개가 제2차 세계대전 때나 보던 방식이라거나, 실제로 그 당시에 사용하던 무기까지 꺼내 들고나왔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 본질이 다른 나라의 영토와 주권을 뺏기 위한 전쟁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이 가해자이고 어느 쪽이 피해자인지에 대해 이론이 거의 없는, 근래에는 보기 드문 전쟁이다. 지난 반세기 넘게 인류사회에 일어난 전쟁 중에서 전 세계가 단결해 한 편을 지지한 전쟁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런 20세기형 전쟁이 우리가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오래된 기술(art, 예술) 하나를 되살려냈다. 바로 대중 연설이다. 물론 연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각국의 대통령과 독재자, 지역 단체장들은 각종 행사와 TV 카메라 앞에서 연설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연설들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처럼) 텍스트로만 남아있거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처럼) 오래된 녹음, 영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근래 들어 정치적, 사상적 지도자들이 연설을 주요 전달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건 카메라를 보며 길게 전달하는 연설이 아니라 트위터에서 140자 미만으로 날리는 짧은 한마디(zinger)임은 누구보다 정치인들이 잘 안다. 대중 선동을 잘하기로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의 무기는 트윗이었지만, 두서없이 길기로 유명한 그의 연설은 열렬한 지지자들도 시작과 동시에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런 시대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연설로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가치가 다원화된 세상에서 대중의 동의를 끌어내고 정당한 분노에 동참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다. 하지만 독재자 푸틴은 전 세계가 TV와 인터넷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러시아의 탱크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침공하고 점령지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함으로써 세상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젤렌스키가 하는 연설이 성공적인 이유의 절반은 이 전쟁을 분명한 흑과 백의 싸움으로 만들어 준 푸틴에게 있다. 칸영화제 같은 행사에서 한 국가의 리더를 연설자로 초대하는 일은 그만큼 이 전쟁이 보편적인 가치의 싸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미지 출처: BBC)

뛰어난 수사법

사람들이 젤렌스키의 연설을 단순히 피해국 지도자의 호소이기 때문에 열심히 듣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예술(art)은 전달하려는 메시지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오랜 연습과 노력, 재능으로 다져진 기술적 완성도가 드러날 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젤렌스키의 연설에는 그 완성도가 드러난다. 그 결과는 전 세계적인 우크라이나 지지다.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이 살지 않는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보게 되는 게 전혀 낯설지 않다.

젤렌스키가 항상 강조하지만, 이 전쟁은 2022년 2월 24일에 시작된 게 아니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름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침략한 2014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 우크라이나에서 나온 정부 성명은 (한 언론 보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옛 소비에트 스타일의 관료주의적 메시지”였고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친러시아 정책을 펼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지는 유로마이단 혁명을 통과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적 리더의 부재는 전 세계의 무관심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밖에서만 보면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전쟁이 시작된 2월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 미국의 도움으로 탈출해서 적당히 망명정부를 꾸리고,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괴뢰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리라 예상했다. 그랬던 세계의 여론을 180도 돌려놓은 것은 탈출을 제안한 서방 국가들에 젤렌스키가 했다고 전해지는 한 마디, “내게 필요한 건 탄약이지, 탈 것이 아닙니다”였다. 이 말은 온라인에서 바이럴을 일으키며 문자 그대로 '결사 항전의 자세'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나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탄약을 지원해주십시오”라고 했어도 의미는 전달되었겠지만, 개인의 신변 안전과 (항전을 위한) 탄약을 대비하는 ‘탈것이 아니라 탄약’이라는 표현이 주는 강렬한 호소력은 없었을 거다. 젤렌스키는 종종 전혀 다른 두 가지를 병치(竝置)해서 그중 하나를 강조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가령 러시아의 침공 몇 시간 전인 2월 24일 0시 30분에 했던 연설, '러시아 국민은 전쟁을 원합니까?'에서는 푸틴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면서, “조용해야 할 곳은 크렘린이 아니라 돈바스”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UN 연설(2. 남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출신의 세계적인 성악가의 예술적 가치와 그의 목숨을 앗아간 10달러짜리 총알 하나의 가치를 병치했고, 소셜미디어 텔레그램을 통해서는 “가스 없는 삶이냐, 너희 없는 삶이냐? 너희 없이 살겠다”라고 말하면서 가스와 러시아를 병치했다. 이런 수사법은 우크라이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듣는 사람에게도 가치판단을 하도록 유도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피신을 거부하고 남은 젤렌스키의 영상 메시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투트(tut)"는 "여기"라는 뜻으로 이 책의 서문이 그 의미를 잘 설명한다.

더 두드러지는 건 반복이다. 반복법은 시와 연설문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던 고대부터 애용되어 왔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연설문에서 많이 볼 수 있었지만 (가령 앞서 언급한 킹 목사의 연설에서는 중반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다섯 번 반복되면서 주제를 강조한다)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장치다. 그런데 젤렌스키는 이를 부활시켜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청중에게 과거 사회를 하나로 묶어준 명연설을 떠올리게 해 지금 일어나는 전쟁의 본질을 확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뮌헨 안보회의 연설(5. 역사의 교훈)에서는 “어떻게 21세기 유럽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분쟁이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냉전 이래 가장 큰 안보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까?”라는 동일한 형식의 반복된 질문으로 현재 상황을 직시하게 한다. 또 자신이 직접 쓴 이 책의 서문에서 “우리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지난 한 해 자신에게 쏟아졌던 전 세계의 관심을 현재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끔찍한 현실로 돌리려 애쓴다.

이런 수사적 장치의 효과적인 활용은 연설의 대상이 되는 청중과 언론이 그가 말하려는 주제를 어렵지 않게 파악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젤렌스키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연설을 할 때마다 언론사 기자가 기사의 제목이나 상단 요약으로 뽑기에 좋은,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인용되기에 좋은 문장을 꼭 넣는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우리는 그것이 ‘평화’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승리’라고 말합니다”(16. 자유로운 국민)라는 표현이나, “여러분 나라의 평화는 동맹국들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10. 평화의 리더), “키이우에 폭탄이 떨어지면 유럽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입니다”(8. 유럽과의 전쟁)와 같은 말이 그렇다. 이렇게 기자와 일반인 청중의 귀에 핵심구절이라고 분명하게 인식되는 한 줄의 존재는 그의 메시지가 왜곡 없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진정한 동력, 메시지

그렇다고 해도 젤렌스키가 사용하는 수사법은 그의 연설이 효과적으로 퍼질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일 뿐, 연설을 움직이는 동력은 아니다. 진정한 동력은 그가 가진 공감 능력, 강대국의 실수와 오판을 예의 있게, 그러나 엄중하게 지적하면서도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하는 그의 자신감, 그리고 그의 메시지가 가진 진정성에서 나온다.

이 책에 실린 연설을 읽을 때 먼저 젤렌스키가 그 연설을 어디에서, 누구를 상대로 했는지 꼭 확인하기 바란다. 그는 같은 연설을 여러 곳에서 재활용하는 대신 청중을 연구하고 그 청중이 가진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서 현재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를 찾아내 연설에 넣는다. 영국 의회를 상대로 한 연설 (9. 우크라이나는 위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의 연설을 인용하고, 미국 의회에서 한 연설(10. 평화의 리더)에서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을 언급하고, 독일 의회를 상대로 한 연설(11. 이 벽을 허무십시오!)에서는 분단되었던 독일의 경험과 나치 시절의 뼈아픈 기억을 일깨운다. 하지만 단순한 언급에 그치지 않는다. “독일인들은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미국은 유럽과 전 세계를 돕고 있고” 세계의 정의를 유지하고 있다며 그들을 격려하고 다독인다.

그는 서방세계가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하고 있지만, 러시아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비용으로는 상대적으로 저렴할 뿐 아니라 자국민을 희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의회와 국민의 공감대를 끌어내지 않고 총리와 대통령이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것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결정을 돕기 위한 아주 정교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젤렌스키 연설 중 상당수가 바로 다른 나라의 의회와 국민을 향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젤렌스키의 연설에는 상황의 절박함과 진정성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청중이 젤렌스키의 어떤 연설을 들어도 반드시 느끼게 되는 게 바로 이 절박함과 진정성이다. “매일 매일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발견한다”라며, “이 모든 일을 겪고 난 지금, 끝을 보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라고 말하는 젤렌스키, “우리는 두 손을 단 한 번, 승리를 자축하며 들어 올릴 것”이라고 다짐하는 젤렌스키의 말(16. 자유로운 국민)은 명연설의 대명사로 통하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떠올리게 한다.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기 약 3시간 전에 찍힌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링컨의 연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이지만, 사실 이 연설의 핵심은 그 뒤에 이어지는 “~는 지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이다. 링컨의 가장 절박한 호소가 담겼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대통령제 민주주의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유럽 열강의 군주들은 미국의 혁명적 실험이 자국으로 번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 내전(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내심 크게 반겼다. 자국민들에게 ‘저런 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안정된 왕정이 최고의 정치제도’라고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링컨의 절박함은 단순히 전쟁에서 패한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인류가 실험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패를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오는 절박함이었고, 게티스버그 연설의 위대함은 남북전쟁의 의미를 ‘인류의 진보’라는 더 큰 목표로 승화시킨 데 있다.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침공을 유럽의 지정학적 위기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해 세계적인 ‘가치의 위기’로 해석하고(17. 가치의 위기), 영부인 올레나 젤렌스카가 이 전쟁을 문명 간의 전쟁이 아닌 “세계관과 세계관 사이의 전쟁”이라고 이야기하는 (18.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입니다.) 것도 다르지 않다. 작게 보면 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지만, 인류의 중요한 가치를 지키려 항전하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새로운 진보를 의미할 줄 알았던 21세기에 들어선 지 22년 만에 유럽이 20세기적인 전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류가 인간의 기본권과 민주주의, 민족 자결권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는 훌륭한 연설가를 만나게 된 것은 인류에게 큰 행운이다.

무엇보다 이를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된 것은 번역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공동번역자로 더 많은 작업을 하고 더없이 좋은 호흡을 맞춰주신 박누리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책 선물 추첨은 한국 시간으로 2월 3일 금요일 자정까지 댓글을 남겨 주신 분들 중에서 하겠습니다. 당첨되신 분들께는 받으실 한국 주소와 연락처를 묻는 이메일을 토요일에 개별적으로 발송할 예정이니 평소 오터레터를 받으시는 이메일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