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세계 ② 미국과 우크라이나
• 댓글 2개 보기모든 나라들이 그 나라만의 특수성을 갖고 있듯 미국에도 다른 나라와는 크게 다른 것들이 있다. 이런 독특함에서 비롯된 지나친 자부심으로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미국인과 미국 정부에는 안보에 대한 유난스러운 결벽증이 있다. 외국의 본토 공격은 그 가능성조차 허용하지 않는 태도가 그거다.
알다시피 미국의 본토는 우호관계의 두 나라(캐나다,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마약 밀수 정도를 고민할 뿐, 적대세력의 침공에 대비한 대규모 병력을 국경에 배치하지 않는다. 사실 미국의 본토가 건국 이후로 대대적인 침공을 받은 건 영국이 쳐들어온 1812년 전쟁 정도가 유일하다. 언뜻 생각하면 이런 좋은 조건은 느긋한 안보 태도로 이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한국처럼 적국(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들은 침공에 대비해 막강한 화력을 국경에 배치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북한의 포 사격, 미사일 등의 위협에 사실상 노출되어 있다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미국인들은 이런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이 서울을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고 미사일 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텐데 어떻게 느긋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느냐는 거다. (반면 한국인들은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에서 어떻게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미국처럼 본토가 적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보다 한국 같은 나라들이 훨씬 더 많다. 가령 팔레스타인의 미사일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경우 아이언돔(Iron Dome)이라는 방어체계를 만들었지만 완벽하게 방어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종종 건물이 파괴되고, 폭탄테러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큰 문제없이 살아간다. 폭탄테러가 일어난 거리가 하루 만에 깨끗이 청소되고 바로 다음날 시민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미국 기자가 놀라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다소 극단적인 예일 수 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나라들은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0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결벽증 환자에 가까워서 미사일을 본토 근처에 배치만 해도 본토에 미사일을 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흥분한다. 이게 '쿠바 미사일 위기'의 본질이다. 북한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에 민감한 것도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다.
강대국의 방법
미국의 이런 안보 태도는 대통령에 대한 경호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미워하는 사람도 많고 살해 위협도 그 누구보다 많이 받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공격의 위협 또한 클 수밖에 없고,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치킨 게임'을 벌여 보란 듯 성공한 케네디의 접근법은 이후 미국의 외교에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물론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미국과 같은 위치에 있지도 않고, 미국처럼 생각하지도 않는다. 현재 러시아의 침공 위협을 받는 우크라이나는 "지난 8년 동안 같은 상황에 있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러시아는 2014년에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리미아 반도를 빼앗은 후 우크라이나 내의 친 러시아 반정부군을 지원해왔고, 우크라이나는 그들을 상대로 꾸준히 전쟁 상황이었다.
지난 1월 말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임박했다(imminent)"며 외교관들과 그들의 가족을 철수시키겠다는 말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당장 내일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이야기하면 시장과 금융권에 패닉을 가져온다. 이게 우리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는지 아는가?"라고 하면서 "우리는 이 문제(러시아의 위협)와 함께 살면서 나라를 발전시키는 법을 배웠다. 위협은 상존하는 것"이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언론에서는 "코미디언 출신의 대통령"이 철없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러시아가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미국과 영국의 정상이 러시아의 푸틴을 상대로 큰 소리로 위협을 하는 뉴스를 따라가다 보면 정작 우크라이나의 의견, 우크라이나 정부가 원하는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물론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켜줄 우방은 미국과 영국 같은 서방의 강대국인 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두 진영이 대결하기 위한 장소, 즉 전쟁터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서 '1950년의 한반도가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다른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말이 미국 정부에서 나오기 약 일주일 전,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면서 그 대가는 "러시아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게 소규모 습격(minor incursion)일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싸워야 할 것"이라는 말을 한 거다. 이는 마치 대대적인 침공과 부분적 침공을 구분하고, 후자일 경우 러시아가 치러야 할 대가는 전자에 비해 작을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이 말을 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침공이면 침공이지 "작은 침공이란 건 없다"라며 반발했고, 미국 정부는 바이든의 실언을 급히 주워 담으며 미국과 동맹국들은 러시아의 침공에 "빠르고 강하고 연합된 대응"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고, 바이든 역시 바로 다음날 국경을 넘는 건 모두 "침공(invasion)"이라고 정정했다. 과거에 정치적인 실수를 많이 해서 "loose cannon"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던 바이든이라 단순한 말실수로 보이지만, 외교, 특히 강대국의 외교에서는 단순해 보이는 결정이나 말 한마디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이었다.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이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어선, 즉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을 때 한반도가 제외된 건 한반도가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중요하지 않다는 워싱턴 정치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은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해명을 요구했지만 별 다른 답을 듣지 못했다. 그 선언이 있은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고, 사람들은 애치슨 선언이 소련과 북한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의 강한 저지가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주었다고 비판했다.
AUKUS vs. NATO
바이든은 임기 첫 1년 동안 중대한 외교 문제에서 실수 두 개를 저질렀다. 하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는 공약을 지키는 과정에서 현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서 발생한 혼란과 인명 피해였고 (이와 관련해서는 'Falling Man'과 '탈레반의 고민' 참고) 다른 하나는 호주에 핵잠수함 기술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유럽)를 무시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유럽에서 힘의 균형을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내용은 이렇다. 2021년에 들어선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많은 결정을 되돌리거나 무시했지만 중국을 상대로 한 강경기조는 그대로 이어받았다. 특히 중국이 홍콩의 의회를 무력화하면서 지난 1백 년 동안 유지된 민주주의의 명맥을 끊고, 남중국해를 사실상 자신들의 영해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다음 합병 목표로 대만을 지목하는 등 상황이 빠르게 진행되자 바이든 행정부는 "아시아로 피봇(pivot to Asia)"을 선언하며 태평양 지키기에 적극 나섰다.
바이든은 최근 중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는 호주를 이 지역의 중요한 군사적 파트너로 삼고 중국을 상대로 한 방어에 필요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문제는 호주가 애초에 프랑스로부터 재래식 디젤 잠수함 기술을 사 오기로 계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줄 리 없다고 생각하고 맺은 계약이지만 미국의 태도가 변하니 냉큼 받고 프랑스와의 계약을 폐기한 것.
물론 미국은 허락만 했을 뿐이라고 발뺌을 했지만, 이런 경우 우방인 프랑스에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마크롱 대통령과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이든은 호주와의 딜을 마크롱에게는 알리지 않고 (EU를 탈퇴한) 영국 총리에게만 알리면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단순한 외교적 실수이고 호주의 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 정상은 직접 만나 화해하며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전략적 초점이 아시아로 이동했다는 사실이 바뀐 건 아니었다. 바이든은 미국을 제치고 경제 1위 대국으로 도약하는 중국과의 대결을 자유민주진영과 독재국가의 대결로 생각하고 미국의 군사, 외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삼자동맹 오커스(AUKUS, Australia, United Kingdom, United States)다.
뉴욕타임즈는 지난해 9월 이 과정을 설명하는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제목처럼 "미국이 아시아로 급하게 피봇 하면서 유럽의 균형을 깨뜨린다"는 경고였다. 프랑스, EU를 무시하고 영국, 호주와 (마침 모두 영어권 국가들이다) 군사적 동맹을 강화한다면 결국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힘이 빠지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지켜지던 힘의 균형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바이든 아무런 이유없이 EU 국가들과 거리를 둔 건 아니다. 기사에서도 이야기하지만, 유럽은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이 중국과 정면대결을 하는 데 동조하고 싶지 않은 눈치를 꾸준히 보내왔기 때문이다. EU, 특히 독일에게 중요한 시장인 중국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트럼프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바이든이 등장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적어도 외교에서는) 트럼프와 똑같이 행동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푸틴은 북대서양 조약기구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 글을 쓴 후에 미국의 국무장관 앤서니 블링컨이 오늘 호주로 떠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에 집중하고 있지만 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한 방문이라고 한다. 물론 중국에게 잘못 판단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메시지다.
('불안한 세계 ③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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