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 "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often rhymes(역사는 반복하지 않지만, 운율은 종종 맞는다)”라는 게 있다. 재치 있는 말인데 기원을 알 수 없으면 일단 마크 트웨인이 했다고 믿는 미국인들의 습관을 고려하면 반드시 그가 한 말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근래 들어 이 말을 꽤 자주 접하게 되는 건 21세기의 인류가 20세기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하지만 그 덕분에 20세기 역사를 읽으면서 가졌던 궁금증이 풀리기도 한다. 가령 내게는 히틀러가 군복을 입고 참석해서 나치의 프로파간다가 되었던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이 수수께끼 같았다.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된 건 1933년이고, 그 직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차별이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국가 기관과 대학교에 취직할 수 없게 되었고, 유대계가 소유한 상점에 대한 보이코트가 일어났고, 유대계 작가들의 책을 공개적으로 불살랐고,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한 것이 모두 히틀러가 총리가 된 첫해에 일어난 일이다. 악명높은 게슈타포(Gestapo, 국가비밀경찰)도 그해에 만들어졌다.

그 이후부터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고, 올림픽이 개최되던 1936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비무장지대로 지정된 라인란트를 침범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세계가 독일에 모여 "평화의 축전" 올림픽을 치른 거다. 올림픽을 개최한 지 3년 후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물론 모든 일이 시간이 흐른 후에 돌아보면 분명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Hindsight is 20/20") 그래도 그렇지, 나치가 내놓고 인종차별을 하고 올림픽을 정치화하는데 저 시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이게 나의 궁금증이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같은 국민인 위구르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하고 고문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고, 인도와의 끔찍한 국경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성화 봉송 주자로 만들어 올림픽을 정치화하고, 시진핑이 우크라이나 침공 준비를 하고 있는 푸틴을 초청해서 우의를 과시하는 걸 뻔히 보면서도 올림픽은 아무렇지도 않게 열리고 사람들은 경기 중계를 즐기는 것을 보면서 '1936년의 세계인들도 이랬겠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화 봉송 릴레이는 베를린 올림픽 이후로 관례가 된, 나치 독일의 작품이다. 

그리고 세계가 우려하는 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일이 벌어지면 후세 사람들은 2022년 베이징 올림픽 영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거다. '저 시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조용한 독일

그럼 우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세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은 이 순간을 위해 4년을 피땀 흘려 노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들 자기가 할 일을 하며 불안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1936년에 신문에서 위의 사진들을 본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을 거다.

물론 사태가 악화되고 세계가 끔찍한 전쟁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다들 노력하고 있지만, 각국의 계산은 다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리더로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기 위해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영국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가장 많은 군사원조를 하고 있다. 프랑스의 마크롱은 푸틴과 담판을 벌이겠다며 모스크바로 갔다. 이번 기회에 프랑스의 (혹은 자신의) 외교력을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도 있지만, 독일이 EU의 리더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문제에서 사실상 발을 빼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할 경우 EU의 어떤 나라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접경 지대에 배치된 러시아의 부대(위)와 민방위 훈련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시민들 

그렇다면 독일은 왜 이 문제에서 발을 빼고 있을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발을 빼는 정도가 아니라 러시아의 편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일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보내는 무기가 실린 수송기가 독일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불허했고, 자신들이 다른 유럽국가에 넘긴 무기들이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내세는 이유는 유럽에서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역사다. 독일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력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국가(우크라이나)가 다른 국가(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침략당하는 상황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무력 분쟁을 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독일에는 분쟁의 회피보다 더 중요한 에너지 수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의 주도로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을 완전히 중단하기로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에 따라 남은 세 개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을 올해 중으로 중단하고, 석탄을 사용한 화력발전도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중단할 계획이다. 하지만 독일의 재생 에너지는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필요한 에너지의 상당량을 러시아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푸틴의 친구"

원전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러시아 의존을 메르켈의 성급한 탈원전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비판은 일리가 있지만, 이 문제에서 더 주목해야 할 정치인이 있다. 메르켈의 전임자인 게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연방의 총리를 지낸 슈뢰더는 푸틴이 러시아의 리더로 떠오르는 과정을 지켜본 정치인이다. 슈뢰더는 자신의 전임자인 헬무트 콜 총리가 (푸틴의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과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것을 비판했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푸틴과 강한 우애 관계를 유지했다.

국가 정상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돈독한 유대 관계가 생기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슈뢰더 총리의 경우는 단순한 우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러시아를 다섯 번이나 방문했던 그는 독일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직접 공급받을 수 있는 파이프라인인 노드스트림(Nord Stream)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2000년 전후 러시아는 말 그대로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이런 전락에 분노한 러시아인들이 푸틴을 지지한 것이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에서 에너지를 사 오는 문제가 유럽의 안보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슈뢰더 총리의 일 처리는 국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를 "이상한 거래(a strange deal)"라고 표현한 워싱턴포스트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면, "2005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친구 슈뢰더는 선거에 패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며칠 만에 서둘러 (러시아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물러난 슈뢰더는 몇 주 만에 노드스트림 사업의 주주위원회를 이끌며 사업을 지휘하는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 후 슈뢰더는 러시아의 국영 천연가스를 개발, 판매하는 가즈프롬(Gazprom)의 이사가 되었고, 러시아의 석유 기업 로즈네프트(Rosneft)의 의장이 되었다. 노드스트림 가스 파이프라인 사업에 (슈뢰더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어도) 찬성한 메르켈 총리도 전임 슈뢰더 총리의 이런 행동에 비판적이었다. 총리로 특정 사업에 이권을 부여하고 퇴직 후에 그 기업에서 일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이익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푸틴의 친구" 슈뢰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위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슈뢰더는 독일의 외무장관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는 일정을 두고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고 했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무력사용 위협(saber-rattling)을 중단하기 바란다"는 말을 해서 빈축을 사고 있다. 그가 사용한 'saber-rattling'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칼이 든 칼집을 흔드는 데서 온 표현으로, 강대국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일 때 사용하는 건데, 10만이 넘는 병력을 국경에 배치한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가 위협을 하고 있다고 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한 독일 정치인은 슈뢰더의 말을 두고 "주인님(=푸틴)의 목소리(His Master's Voice)"를 대신한 것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메르켈과 트럼프

여기에서 노드스트림2를 추진한 메르켈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메르켈은 작년 말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018년에 노드스트림2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2018년은 (슈뢰더 총리가 노드스트림 계획을 승인한) 2005년이 아니다. 러시아는 무기를 현대화하며 강군을 육성한 상황이었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반도를 침공, 점령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할 의지를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을 포기한 메르켈은 에너지원을 확보해야 했다. 영국과 노르웨이에서 오는 석유는 공급량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나름 에너지 대국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계산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다. 문제는 정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의 존재 이유가 러시아의 위협 때문인데 그런 러시아에게서 에너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노드스트림2 파이프라인을 설치 중인 선박 

메르켈의 노드스트림2 계획을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사람이 트럼프다. "우리가 큰돈을 써가면서 나토를 유지해주고 있는데 너희들은 러시아에서 에너지를 사 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었다. 트럼프는 외교에서 맞는 방향을 잘못된 방법으로 추구해서 일을 그르친다는 비판을 받곤 했는데 이 문제가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트럼프는 "나토 회원국들은 왜 돈을 내지 않느냐"는 식으로 외교 문제를 돈 문제와 결부시키곤 했다. 독일이 러시아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었는데 (트럼프 뿐 아니라, 트럼프를 싫어하고 독일과도 친분이 있는 정치인들도, 그리고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노드스트림2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있었다) 트럼프가 돈 얘기를 꺼내곤하니까 독일 내에서 "미국이 노드스트림2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기네 석유를 팔려는 의도"라는 여론이 퍼지기 시작한 거다. 국내외에서 노드스트림2 반대에 부딪혔던 메르켈은 이런 '반트럼프' 흐름을 타고 재빨리 노드스트림2 계획을 승인할 수 있었다.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국들 사이를 벌어지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외교적 목표인 푸틴에게 트럼프는 천연가스만큼이나 유용한 도구였다.


이 글을 쓴 후에 뉴스 알림이 떴다. 미국을 방문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면담 결과에 대한 설명이었다. 러시아가 침공을 강행할 경우 미국이 준비하는 강력한 경제 제재에 독일이 적극 동참하지 않는 데에 불만을 표시해온 바이든이 독일 총리를 다그치는 미팅이었다. 바이든은 면담 후 "미국과 독일은 우크라이나 문제에 연합 대응할 것"이라며 "만약 러시아의 탱크와 병력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을 경우 노드스트림2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우리가 (노드스트림2를) 종료시킬 것"이라는 바이든의 말에 기자가 정확히 어떻게 종료시킬 거냐고 묻자 바이든은 "미국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불안한 세계 ② 미국과 우크라이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