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대법원이 임신 중지의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고 했던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표결이 끝났고 판결문이 작성되는 중인데 그 초안이 유출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결정 자체도 엄청난 일이지만, 공식적인 발표를 약 한 달 앞두고 문서가 새어 나온 것도 대법원 사상 초유의 사태입니다.

이 문서가 작성된 것은 지난 2월인데 누가, 왜 완성되지도 않은 초안을 유출했을까요? 제일 처음 생각할 수 있는 건 이런 결정에 분노한 대법원 내 진보적인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대법원의 재판연구원을 지냈던 예일대 법대 에이미 컵친스키(Amy Kapszynski) 교수가 "보수 쪽 인물이 유출했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의견을 트위터에 내놨습니다.

오늘 오터레터에서는 컵친스키 교수의 그 트윗 스레드를 전부 번역해서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단순한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라 (컵친스키의 주장이 맞다면) 현재 보수진영의 행동방식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상황을 설명드리기 위해 유료 구독자분들께 보내드린 어제의 RT 전문을 소개합니다. (미국의 법과 정치를 잘 아시는 유정훈 변호사께 여쭤본 결과, 어제 보내드린 내용에서 '결정문'을 '판결문'으로 바꿨습니다. 미국 정치에 관심이 많고 페이스북을 사용하신다면 이분을 팔로우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어제 읽으신 분들은 사진 아래의 내용으로 바로 넘어가셔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시간으로 월요일(5월 2일) 저녁, 속보 하나가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에서 급속하게 확산되었어요.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문서가 유출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다른 문서도 아니고, 미국 여성들의 임신 중지를 '권리'로 인정하는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기로 한 대법원 판결문 초안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근래 들어 대법원에서 가장 중요한 판결인데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작성 중인 초안(아래 사진을 보시면 "1st Draft"라고 적혀있죠)이 새어 나온 겁니다.
이건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누가 유출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밝혀진다면 "career-ending" 즉, 다시는 법조계에서 일할 수 없게 될 중대한 룰 위반이라고 합니다. 분노한 대법원은 유출한 사람을 잡아내겠다고 경찰에 의뢰한 상태입니다.
유출된 문서 전문은 여기에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 판결문이 가진 내용입니다. 트럼프 이후로 대법원은 보수와 진보 대법관의 비율이 6:3으로 완전히 보수로 기울었습니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공화당이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해온 결과이지만, 미국의 보수 진영이 그토록 악착같이 보수 판사들을 대법원에 밀어 넣은 가장 큰 이유가 1973년에 나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어 여성에게서 임신 중지권("낙태권")을 빼앗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월요일에 유출된 문서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보여준 거죠. 물론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한 게 아니지만 초안은 대법관들 사이에서 표결이 끝난 후에 작성하기 때문에 결론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이 결정이 가져올 파장이 어떤 건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법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에는 각 주별로 주법이 있고, 그 위에 50개 주 전체를 커버하는 연방법이 있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임신 중지와 관련해서는 각 주가 자체적으로 만든 법으로 판단했고, 보수적인 주에 사는 여성들은 이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죠. 그렇다고 연방법을 만들기는 너무나 길고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연방 대법원으로 가져갔습니다. 대법원은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해당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임신 중지가 헌법에 근거한 인권으로 판단하면 이를 금지하는 각 주의 법들은 효력이 없어지는 겁니다.
물론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걸 연방법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워낙 급하고 중요한 사안이라 대법원의 판결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한 거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도 이런 방법론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의회가 국민적 합의에 의해 해결할 일을 법원에게 넘긴 셈이니까요.) 따라서 지금 벌어지는 일은 다시 1973년 이전으로 돌아가서 각 주가 알아서 판단하게 해달라는 것이고, 이제 그 결정은 내려진 듯합니다. 주에 따라서는 근친상간이나 성폭행에 의한 임신도 중지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런 결과도 여성의 권리에 심각한 위협이지만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대법원의 성격이 변했다는 겁니다. 그동안 대법원은 stare decisis('스태리 디사이시스'라고 발음합니다)라고 해서 가장 최근에 내려진 판결을 뒤집지 않고 존중하는 원칙에 충실했는데, 보수로 돌아선 후에는 과거에 대법원이 내린 판결들을 뒤집고 있습니다. 이번 로 대 웨이드 판결 뒤집기가 그런 예이고, 앞으로도 인권과 관련한 진보적 판결들이 계속 뒤집힐 것으로 전망합니다.
오늘 추천하는 글은 바로 그 유출된 문서입니다. 여기에서 직접 다운로드해서 읽어보실 수 있어요. 법률문제이고,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읽을 수 있기는 하지만, 워낙 명료하게 쓴 글이라 어렵지는 않습니다.

(에미미 컵친스키 교수의 트윗 원문)

나는 대법원에서 재판연구원(clerk, 대법원의 재판연구원은 법조계 최고의 엘리트 코스다. 훗날 대법관이 되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 시절 대법원의 재판연구원을 한 경력이 있다–옮긴이)으로 일했었다. 어젯밤에 Roe v. Wade를 뒤집는 판결문 초안이 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보 대법관 밑에 있는 재판연구원 중 하나가 그랬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판결문을 작성한 알리토 대법관의 기괴한(monstrous, 엄청난) 의견에 글자 하나까지 동의하는 보수적인 인물이 유출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타이밍을 생각해보자.

이 초안이 대법원 내부에서 공유된 건 2월이다. 만약 진보적인 인물이 이 결정에 분노했다면 왜 4월(이 초안이 언론에 등장한 건 5월 2일이다–옮긴이)까지 기다리겠는가? 이 결정은 6월에 발표될 것이었다. 이걸 일찍 외부에 알려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 오히려 손해만 막대하다. 이 결정보다 유출 사건에 관심이 더 쏠리게 되기 때문이다.

대법원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유출의 가장 구체적인 효과는 이 견해가 (변하지 않고 유출된 형태로) 굳어지는 것임을 안다. 초안 이후로 일어나는 수정(edit)은 대법관들 사이에 오고 가는 의견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다수의견(=법정 의견)의 권위를, 그리고 대법원의 권위를 손상하게 된다. 다수의견에 참여한 대법관들이 난처하게 되는 거다.

여기에서 잠깐, 판결문 초안(Draft Opinion)이란 뭘까? 대법원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구두 변론(oral argument)이 완료되면 대법관들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재판연구원(law clerk)들과 상의하면서 다양한 관점을 들으면서 자신이 어떤 표를 던질지 결정한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대법관들의 모임에서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결정한다. 대법원장부터 시작해서 연공서열에 따라 순서대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다시 같은 순서로 자신의 결정을 밝힌다. 이게 대법원의 표결이다.
표결이 완료되면 다수의견에 속한 대법관들 중 가장 연공서열이 높은 대법관이 다수의견을 판결문으로 작성할 대법관을 지명한다. 대법원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 쪽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소수의견을 작성할 수 있고, 개별 대법관이 자신만의 소수의견을 쓸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어느 대법관이 표결로는 다수의견에 동의했어도 그 결론에 도달한 논리적 근거(reasoning)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자신만의 별개의견(concurring opinion, 이 문제는 아래 글에 등장한다)를 쓸 수 있다.
즉,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작성된 최초의 다수의견의 판결문이 판결문 초안이다. 이 초안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방금 설명한 것처럼 결정에는 동의해도 사용한 근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개 법정에서 발표되지 않은 어떤 견해도 법원의 공식 견해가 아니다"라는 것이 미국 법원의 설명이다.

진보 대법관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대법원이 내린 보수적인 결정을 최대한 부드럽게(less terrible) 만들기 위해 판결문의 이곳저곳에서 문장을 바꿔왔다. (초안을 두고 계속 수정이 일어난다는 얘기–옮긴이) 그런데 왜 초안을 유출해서 이런 전략을 송두리째 포기하겠는가?

유출된 초안이 가져올 가장 크고 확실한 효과는 이 견해를 지지한 5명의 표를 사실상 아무런 수정 없이 굳혀버리는 것이다. 누가 이런 결과를 원할까? 결국 이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가능한 한 가장 과격하게 뒤집으려는 행동이다.

판결문 초안은 오래된 미국의 법이 태아(fetus)를 인간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태아가 헌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는 주장을 준비한다. 헌법에는 임신 중지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대법원이 성소수자의 권리와 피임에 관해 내린 결정의 근거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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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대목을 이야기하는 거다.

다시 타이밍 얘기로 돌아가자.

다수의견의 초안이 먼저 공유되고, 그 후에 별개의견(concurrences)와 반대의견(dissents)이 나온다. 따라서 지금은 별개의견(결론에는 동의하나 그 근거에 대한 의견이 다를 경우 쓰는 글–옮긴이)이 나올 시점이다. 내 생각에는 로버츠 대법원장이 얼마 전에 자신의 별개의견를 밝혔을 것이고, 그의 의견은 (이 초안에 비해) 온건한 입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로버츠 대법원장은 (임신 후) 어떤 시점까지는 임신 중지가 괜찮다는 의견을 밝혔을지 모른다. 가령 임신한 여성의 생명과 관련한 예외를 허용하자고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캐버노 대법관이 로버츠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로버츠의 의견에 투표를 할 정도는 아니어도 알리토 대법관이 쓴 판결문 초안을 좀 바꾸자고 했을 수 있다.

이번에는 대법원 재판연구원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대법원의 재판연구원이 되는 진보적인 법대생들은 운동가(activist)와는 거리가 멀다. 이 사람들은 아주 위험 회피적이고 룰을 잘 따르는 성향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식의 유출로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이득이 뭔가?)

요즘 상황에서 유출은 보수진영의 스타일이다. 토머스 대법관은 자신의 아내가 1월 6일 쿠데타 시도(트럼프가 지지자들을 동원해 의회를 습격하게 했던 일–옮긴이)에서 했던 역할 때문에 이와 관련한 재판에서는 자진 사퇴해야 함에도 대법원의 룰을 비웃고 있다. 그런 그가 재판연구원에게 어떤 롤모델이 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아내와 관련된 판결에서 자진 사퇴를 거부하는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보수 진영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대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기꺼이 깰 수 있음을 보여줬다. 진보적인 견해를 알고 싶다면 브라이어 대법관이 최근에 쓴 책을 읽어보라. 아예 제목에 "정치의 위험(the peril of politics)"라는 말이 들어있다.

은퇴한 대법관 스티븐 브라이어의 책

보수 진영은 이 초안이 유출될 경우 그 비난이 진보 쪽을 향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일이 대법원의 신뢰에 미치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보다 유출 자체에 대중적인 관심이 쏠릴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발각될 경우 법관으로서의 커리어에 미치는 영향도 보수 쪽 인물이 진보 쪽 인물보다 훨씬 덜 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알리토의 견해는 끔찍하다. 우리는 이 나라에 사는 젊은 세대에게 또다시 잘못을 저질렀다. 참담한 순간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곧 다시 자세히 써보기로 하겠다.

이번 사건에 관해서는 @steve_vladeck@joeyfishkin의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나는 대법관이 아니라 재판연구원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 오컴의 면도날을 생각해보면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