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스까 ②
• 댓글 9개 보기러시아에서도 '디프레씨야(депрессия)'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는 우울증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디프레션(depression)'을 그대로 옮긴 외래어다. 이 표현은 배우자가 전쟁에서 사망했거나, 출산 중에 아기가 사망한 경우처럼 극도로 심한 감정적 고통을 가리키는 용도로만 사용한다. 게다가 소련에서는 정신질환을 아주 나쁜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바로 정치적으로 공격할 때다. 소련은 정치적, 문화적 반체제 인사들을 정신질환을 앓거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진단하고 정신병동에 감금했다.
이는 아주 암울한 소비에트 식 논리였다. 소련의 모범 시민이라면 정신적으로 아플 수 없다는 것이고,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 모범적인 소련의 시민이 아니라면 그것 자체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 서구에서와 같은 이유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싶다면? 불가능했다. 소련 정부는 상담 치료를 오래도록 금지했다.
그리고 실제로 정신과 진료를—단순한 검진이라도—받은 사람들은 정부 문서에 기록이 남아서 직업을 구하기 힘들었고,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소련에서 정신과 진료는 대부분 암암리에 이뤄졌고, 이런 상황은 1990년대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처럼 소련이 사라진 직후에 러시아를 떠난 사람들에게 정신질환은 여전히 금기어로 남아있다. 따라서 부모님은 우울증과 비슷한 감정을 이야기할 때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또스까가 바로 그런 단어다. 또스까는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인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 러시아인의 정신을 정의하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또스까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다. 그에 따르면 "또스까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모두 설명하는 영어 단어는 없다. 가장 깊고 고통스러운 수준에서는 영혼의 큰 고통을 의미한다. 이런 고통에는 특별한 원인이 없는 경우가 많다. 덜 힘든 수준에서는 영혼의 먹먹한 아픔이다. 특별히 갈망하는 대상이 없음에도 느끼는 갈망, 고통스러운 갈망이며, 막연한 불안, 정신적 고통이다."
우울증과 또스까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이 둘은 같지 않다. 우울증은 욕구의 결핍이지만, 또스까는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욕구다. 또스까는 특정 상태에 대한 진단이 아니라, 집단적인 상실감이다.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이고, 긴 겨울의 어둠이다. 우리 엄마는 미국에 도착한 후 보낸 첫 10년을 이야기할 때 또스까라는 표현을 항상 사용했다. "그때는 또스까로 가득했지."
엄마는 미국에 도착한 후 몇 달 동안이 정말 끔찍했다고 한다.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우리 가족이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 후 엄마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단다. 뉴욕 브루클린의 애비뉴 P에 있는 아파트에 월세를 내고 살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은 마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는 게 엄마의 말이다. 엄마의 삶에서 색깔이 모두 빠져나갔다고 느껴질 만큼 뉴욕의 모든 풍경은 끔찍한 회색빛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한 살 짜리 아기를 데리고 있는 28살의 난민 여성이었고, 미국에 도착한 후로 과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에 찾아온 가난, 무법천지로 변한 사회, 조직폭력배에 대한 기억—엄마는 심지어 길에서 시신을 본 적도 있다고 했다—은 모두 잊었고, 살던 도시의 아름다움과 살던 운하, 그리고 두고 온 어머니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는 아기인 나를 유아차에 태우고 사우스 브루클린을 몇 시간씩 걸으며 워크맨으로 러시아 노래를 들었다. 형무소 생활과 레닌그라드, 힘겨운 사랑을 노래하는 알렉산더 로젠바움(Alexander Rozenbaum)이라는 러시아 포크송 가수의 노래들을 볼륨을 잔뜩 높여서 들었다고 한다. 로젠바움의 노래 중에서도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곡 "날레텔라 그루스트(슬픔이 내게 찾아왔다)"를 무한반복해서 들었다. 나는 엄마가 추위에 시린 손가락으로 워크맨의 되감기 버튼과 플레이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남의 집에 가서 방과 화장실을 청소하느라 굵어지기 전 엄마의 손가락.
이민 온 첫 해, 엄마는 사실상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했다. 아빠는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에는 버로우 파크에 있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기 때문이다. 엄마 유일한 상대는 우는 아기인 나였다. 엄마는 자기가 이 나라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느껴졌다고 한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도 불필요한 존재 같았다고 한다.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한 성인 여성이 하루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밖에 나가면 길을 물어볼 수도, 배고프다고 음식을 살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느니 그냥 죽고 싶었다. 엄마는 "또스까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나는 오래도록 '또스까'라는 게 엄마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태어나서 러시아에서 일 년 밖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또스까를 느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 거다. 러시아인들만 느끼는 거대한 또스까에 비하면 미국인들이 느끼는 우울함은 보잘것없는 감정으로 보였다. 나는 또스까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미국인이었고, 그렇다고 우울증을 앓을 만한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두 언어를 사용하지만, 어떤 단어도 내게 적용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나는 본가에 찾아가 부엌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가 홀로데츠(수육이나 물고기를 젤라틴로 굳히는 러시아 요리—옮긴이)를 만드는 동안 나는 내가 어릴 때 항상 하던 것처럼 우리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엄마는 전에도 항상 해줬던 같은 얘기를 내게 들려줬다. 나는 애비뉴 P에 살았던 때 얘기를 물었다. 엄마가 아기인 나를 데리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던 시절 이야기.
그러자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젤라틴이 가득 묻어 있었기 때문에 손목으로 눈썹을 닦으면서 "레라,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 어두운 그림자가 나를 덮고 있는 것 같았지. 분명히 또스까였는데, 그것 외에도 아마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거야." 엄마가 우울증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 밖에 냈다. 그렇게 꺼리던 그 단어를 마치 평생 말하고 살았던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말한 거다.
그 말을 할 때 엄마는 내게 등을 돌리고 일하고 있었지만, 나는 전자레인지의 유리에 반사된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충격에 몸이 굳었다. '지금 엄마가 자기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 거 맞아?' 그리고 몇 주 후,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에 엄마의 기분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요즘 어떠냐고 묻자, 엄마는 "우울해. 레라, 엄마가 우울한 것 같애." 세상에. 이렇게 쉽게 얘기를 하는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화가 났다. '이제 엄마는 그 단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거야? 나한테는 사용할 수 없게 해놓고 자기는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뭐야? 그 단어를 평생 거부하다가 이제 와서 자기 인생을 설명하는 데 사용할 자격이 있어?' 나는 엄마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걸 참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우울할 수 있는 권리를 나 스스로에게 거부했던 내가 이제는 엄마가 우울할 권리를 거부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그 단어를 쓸 수 있게 된 거야?"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최근 들어서야 우울증이 어떤 건지 알게 된 걸 어떡해? 예전에는 내가 겪고 있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엄마가 어느 한순간 우울증의 의미를 알게 된 건 아니었다. 엄마는 미국에서 러시아어로 하는 TV 방송을 보면서 러시아계 사람들이 그 단어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을 듣게 되었고, 일상에서 더 자주 접하게 되면서 소비에트 시절의 "디프레씨야"와 영어의 디프레션(우울증)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울증에서 사회적 낙인(stigma)이 떨어진 거다.
엄마는 이민자는 우울증을 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자신이 느끼는 건 또스까였을 뿐이고, 만약 우울증을 인정한다면 이민자로서 실패를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단다. 엄마는 자식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주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서도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내가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좀 특이한 거고, 내 기분은 지나가는 것이고, 미국에서 풍족한 삶을 사는데 어떻게 우울증을 앓을 수 있느냐고 했던 엄마의 말을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나에게만 아니라, 엄마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엄마가 미국에 와서 또스까를 느꼈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또스까와 우울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는 자기가 또스까와 우울증, 둘 다 사용해도 된다는 걸 몰랐던 거다. 물론 나도 전에는 몰랐다.
나는 또스까야말로 이민자의 자녀가 느끼는 감정을 그 어떤 표현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민자의 자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가 목격한 것을 볼 수 없고, 부모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부모도 다른 문화에서 자란 자식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또스까는 이민자의 자녀가 부모의 고향에 대해 느끼는 그리움이다. 나는 비로소 또스까라는 단어를 내 자신에게 사용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요즘은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집 안을 청소하면서 통화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걸 느끼면 "엄마, 괜찮아?"라고 묻는다. 그러면 엄마는 "괜찮아. 그냥 우울해"라고 대답하고, 나는 "괜찮아. 우울한 건 창피한 게 아냐, 엄마. 나도 그럴 때가 있어"라고 말해준다. 때로는 별일 없냐는 엄마의 질문에 나는 목이 메어 대답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면 엄마는 잠시 기다렸다가 내가 계속 듣고 있는지 확인한다. 내가 "요즘 또스까를 느끼고 있어"라고 대답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당연하지. 엄마 딸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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