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이나 정신과적 증상들은 그게 나타나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령 한국의 화병이 그렇다. 영어로 분노 신드롬(anger syndrome)으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그냥 hwa-byung으로 표기한다. 워낙 한국인의 기질과 관련이 있어서 문화를 자세히 알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아래의 글은 어릴 때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밸러리 키프니스(Valerie Kipnis)가 러시아인들에게 나타나는 또스까(тоска)를 설명한 것을 옮긴 것이다.

우울증과 비슷하지만 다른 또스까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문화 차이는 물론 우리가 우울증을 이해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라서 소개한다.


내가 4학년이던 10살 때, 학교의 상담 교사가 엄마를 학교로 불렀다. "긴급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지리 시험에서 점수가 낙제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복도에서 문에 귀를 대고 오가는 내용을 엿들었다.

"집에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아뇨."

"가족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요?" "아뇨."

"예전에 아이가 겪었던 안 좋은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일은 없었고요?" "아뇨."

"가족 중에 정신 병력이 있지는 않은가요?" "전혀요."

"집안에서 학대가 있지는 않았나요?" "뭐라고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럼 아이 몸에 왜 멍이 있죠?" "세상에... 그거 체조하면서 생긴 거예요. 왜 미국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아이가 체조를 하니 멍이 생기는 게 당연하죠."

"죄송합니다만, 나라에서 저희가 이런 걸 체크하도록 하고 있어요. 하지만 별문제가 없다고 하셔도 제 생각에는 아이가 카운슬링이나 상담 치료를 받아 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런 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열 살짜리 아이가 그런 글을 쓰는 게 정상적인 건 아니거든요. 아이의 담임 선생님도 걱정하고 있고, 저도 그렇고, 다들 걱정을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동네(South Brooklyn)에 있는 괜찮은 카운슬러 명단을 드릴게요. 도움을 받고 싶으시면 연락해 보세요. 저는 그렇게 하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네, 그러죠. 감사합니다, 상담 선생님.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담 선생님." 엄마가 서툰 영어로 말했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선생님이 준 종이를 움켜쥔 채, 악어가죽 무늬가 있고 끝이 뾰족한 붉은색 하이힐을 신고 빠르게 걸었다. 그러니까 엄마를 부른 이유는 내 지리 시험 때문이 아니었다. 환경 수업에서 나무에 관한 글쓰기 과제를 내줬는데, 그 글 마지막에 내가 쓴 내용 때문이었다. "내 속은 텅 비었고,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다. 내가 영원한 가을에 갇혀있는 나무와 뭐가 다를까?"

(이미지 출처: Wikipedia)

우리 아파트에 도착해서 철문을 통과할 즈음, 엄마는 러시아어로 내게 물었다. "레라, 엄마 좀 봐. 너 슬프니?" "아니, 나 괜찮아." 엄마는 현관문을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멍청한 상담 교사는 네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해." 엄마는 "우울(depressed)"이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공중에 따옴표를 그렸다.

"미국인들이나 쓰는 멍청한 단어야. 아이가 어떻게 우울증에 걸려? 부족한 게 없이 살고 있는데. 잠깐 슬플 수는 있지만, 우울증은 아니지. 보제모이(Боже мой=Oh my god), 미국 놈들(американцы)은 왜 이렇게 과잉반응을 하지?" 엄마는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도 아이들이 우울증을 앓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 아빠는 침실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울은 무슨... 부족한 게 없는데 뭐 때문에 우울하겠어?" 엄마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내 말이!"라고 맞장구쳤다.

우리 가족은 내가 한 살 때 미국으로 왔다. 내 인생의 첫 10년을 정의한 건 이민이었다. 저녁 식사로 참치 통조림을 먹었고, 학교에서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 수업(ESL)을 들었고, 우리집은 식구 수에 비해 비좁았다. 나는 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 시작했고, 내 영어에서 강한 러시아 억양이 사라진 건 6학년이 되어서였다. 나는 내 러시아 이름 발레리야(Valeriya)에서 "야(ya)"를 떼어내고 밸러리(Valerie)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꿔 사용했다. 친구들은 짧게 밸(Val)이라고 불렀다.

내 친할머니, 외할머니는 나를 미국 애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 말은 전기회사에 전화하거나, 집주인에게 자주 고장나는 라디에이터 수리를 부탁할 때, 콘도 사용과 관련해서 흥정을 할 때는 내가 나서야 했다는 얘기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분이 쉽게 침울해졌고, 나이에 비해 진지하고, 슬픈 기분에 빠지곤 했다. 나는 그런 나의 기분을 남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가끔 드러날 때가 있었다. 가령 15살이던 어느날 일어난 일이 그렇다.

그날 무용 연습에서 돌아왔는데 부엌에 있는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 위에 내 일기장이 펼쳐져 있었고, 엄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는 "레라, 이리 와서 엄마 옆에 좀 앉으렴"하고 말했고,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엄마 옆 의자에 앉았다. "레라, 레라쉬카, 왜 이런 걸 쓰니?" 펼쳐진 일기장에는 청록색 펜으로 쓴 내 손글씨가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 나는 끝낼까 싶지만, 그렇게 하면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상처를 받을 거야." 내가 쓴 거지만, 그렇게 식탁 위에 펼쳐진 일기장에서 보니 낯설게 느껴졌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껴서 그렇게 쓴 거야. 나는 그냥 내가 느낀 대로 써, 엄마. 그래서 사람들이 일기를 쓰는 거고, 그래서 일기장은 개인적인 거야. 왜 엄마가 내 일기장을 뒤져? 왜?"

"왜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니?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거니? 레라, 엄마한테 좀 얘기해 줘, 응? 네가 맨날 보는 TV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니? 니 아빠가 저 망할 놈의 케이블 TV 설치할 때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케이블 TV를 봐서 그렇다고, 엄마? 엄마는 정말로 내가 '한나 몬타나(Hannah Montana)'를 봐서 우울증을 앓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또 그 우울증(depressed) 얘기를 하네." 엄마가 "depressed"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는 강한 러시아 억양이 들어가 있다. "너는 우울한 게 아냐, 레라. 너는 우울할 수가 없어. 그냥 잠시 지나가는 기분일 뿐이야. 니가 지금 십 대라서 호르몬 때문에 그래.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 그냥 슬픈 거겠지. 하지만 내일이면 기분이 괜찮아져."  

엄마의 그 말에 나는 아주 십 대다운 반응을 했다. "엄마는 이해 못해! 난 엄마 미워!"하고 소리를 지르고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나는 엄마가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드러내고 싶었고, 정말로 모든 걸 끝내서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 방 안에 있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나를 탓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는 너를 위해서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너는 우울증을 앓는 게 아니라, 그냥 이기적인 거야.' 엄마는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도 나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식이었다. 나는 슬픈(sad) 것이지, 우울한(depressed) 게 아니었고, 긴장(nervous)할 수는 있지만 불안한(anxious) 게 아니었다. 특이할(particular) 수는 있어도 강박(obsession)은 아니라는 거다. 따라서 상담 치료나 약물 치료는 어림도 없었다. 엄마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민자 집안의 딸이 해야 할 일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면서 부모님 집에서 나왔다. 그러다가 25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처럼 꽉 막힌 작은 공간에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가 몇 달 후에는 지하철도 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강박적인 생각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새 아파트에 적응하지 못하면 한밤중에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윌리엄스 다리를 걸어서 건너 예전 아파트에 갔다. 나는 그 아파트 열쇠를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다.

그렇게 텅 빈 옛 아파트에 들어가 바닥에 몇 시간씩 누워있기를 한 달 동안 계속하다가 비로소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상담치료사 테리(가명)는 머리를 핑크색으로 물들인 여성이었고, 다른 상담치료사의 이름이 적힌 사무실에서 나를 만났다. 좀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용이 저렴해서 만나기로 했다. 테리는 내가 우울증과 불안증을 갖고 있으며, 강박장애(obsessive compulsive disorder, OCD)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C(강박적 행동, compulsion)보다는 O(강박적 사고, obsession)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테리의 진단을 들으면서 내게는 자랑스러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드디어 나를 설명하는 단어를 갖게 된 것이다. 나의 증상이 비로소 사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부모님께 내가 상담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하고, 어느날 다 같이 차에 탔을 때 그 말을 꺼냈다. 나는 부모님이 걱정을 하거나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마치 내 말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엄마는 짧게 러시아어로 중얼거렸다.

"미국인이나 하는 소리지."

(이미지 출처: TimeOut)

그날 이후로 내 머릿속에서 다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테리가 내게 우울증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안심을 하거나 이해하는 대신 테리에게 따지고 싶어졌다. '정말로요? 제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요? 웃기지 말아요. 오늘 잠깐 슬픈 것일 뿐이에요. 사람이 슬플 수도 있는 거 아녜요? 자꾸 그런 증상으로 진단하지 마세요!' 나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테리가 제안하는 극복 방법을 듣고 있었다. 요가를 하고 일기를 쓰고, 몸에 좋은 음식과 비타민 D를 먹으라는 거였다.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는 "특정 질병에 다양한 치료법이 처방된다면, 그 병에는 치료법이 없는 게 분명할 것"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테리가 나의 끝없는 슬픔을 자가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할 때마다 나는 내 부모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또스까를 떠올렸다.

러시아어 또스까(тоск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내 부모 세대의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우울증이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울증을 표현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또스까다. 나는 테리와의 상담 치료를 포기한 후 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거북하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구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그 기원은 소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신질환에 사회적인 낙인을 찍던 시절이다. 정신질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것이고,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사라질 문제라고 생각했다. 모범적인 소비에트 시민이라면 정신적으로 아플 수 없었다. 아빠는 내게 우리가 만드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울증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또스까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