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몇 년 전에 발굴되어 화제가 되었던 1960년대 시사만평에 관한 것이다.

요즘은 그 인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20세기만 해도 한 칸짜리 시사만평은 신문마다 그날의 뉴스를 요약해주는 중요한 코너였고, 종이신문 구독자들은 신문을 받으면 으레 시사만평을 제일 먼저 읽었다. 시사만평은 단순히 뉴스를 요약하는 게 아니라 뉴스의 해석이고, 그 매체가 특정 뉴스를 바라보는 시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하자면 비주얼로 보여주는 사설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 신문에서는 시사만평을 'editorial cartoon,' 즉 사설 만화라 부르고, '만평(漫評)'이라는 표현도 '만화로 하는 (뉴스) 비평'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1967년 미국 신문에 등장한 아래의 만평은 이를 게재한 신문사가 당시 미국을 휩쓸고 있던 뉴스를 해석한 방식이다.

마틴 루터 킹이 기자에게 "나는 내일도 비폭력 행진을 이끌 계획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Comic Book Resources)

아마도 원본은 사라진 듯하고, 누군가 스크랩해서 보관 중이던 것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그림에 등장하는 길거리는 큰 폭동이 휩쓸고 간 듯 차량과 건물은 파괴되어 불에 타고 있고, 사람들이 던진 것으로 보인 깨진 병과 벽돌이 흩어져있고 바닥에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예전에는 죽은 사람을 그릴 때 눈에 X자를 그려 넣곤 했다. 요즘은 보기 힘든 이유는 시사 만화에 죽은 사람을 그려 넣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생각해서이겠지만, 코믹하게 X자를 그려 넣는 것은 더욱 부적절하다고 여길 게 분명하다. 위와 같은 묘사가 대수롭지 않게 등장했다는 것 사실은 당시의 문화, 혹은 매체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림 속 왼쪽 인물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기자다. (그 당시 그림에서 기자를 표시하는 다소 진부한 방법이 모자를 쓰고 펜과 노트, 혹은 카메라를 든 남성이다. 대개 모자에는 PRESS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꽂혀있다.) 킹 목사는 자기 말을 받아 적고 있는 기자에게 "나는 내일도 비폭력 행진을 이끌 계획입니다 (I plan to lead another non-violent march tomorrow)"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만화 속 킹 목사는 주변 상황(=폭력 시위의 결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자는 그의 말을 받아 적고 있지만 그의 눈은 불에 타는 건물을 보고 있다. 기자는, 아니 이 매체는 "당신은 이걸 비폭력 시위라고 부르는 건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만화가 실린 신문은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발행되는 버밍햄뉴스(The Bermingham News). 이 만화를 스크랩한 것으로 짐작되는 독자가 그림 주변 여백에 자기 생각을 손으로 적은 것을 보면 매체가 이 만화를 통해 말하려던 메시지는 완벽하게 전달된 것 같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기만적이고, 위선적일 수 있는 건가? 비폭력을 구역질 나게 주장하지만 아무도 안 속는다. (How can you, a minister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be such a deceitful hypocrite? You’re not fooling anyone but yourself in your _____ nauseating talk about non-violence.)"

요즘 언론사 웹사이트에 독자들이 남겨둔 댓글과 거의 차이가 없게 느껴진다면 사실이다. 기술의 변화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대중의 사고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일반인이 이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껏해야 신문을 스크랩하고 거기에 끄적거리는 게 전부였다면, 지금은 매체의 댓글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노출과 확산, 공유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적은 독자는 이 쪽지를 킹 목사에게 보냈고, 킹 목사 측에서 기록으로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평의 수수께끼

사람들에게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답을 들을 수 있다.

"킹 목사는 미국에서 1960년대에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했고,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본받아–동시대 인물인 말콤 엑스와 달리–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해서 미국 사회의 동의를 끌어냈고,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그를 싫어한 백인 인종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특별히 틀린 내용은 없다. 하지만 위의 기술은 그의 인생에서 많은 내용을 생략한, 말하자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요점만을 요약한 '위인전 버전'이다. 특정인의 인생과 업적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따라서 역사에 특별히 관심 없는 대중은 이런 요약 버전을 읽고 만다.

1963년의 킹 목사.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CNN)

하지만 위의 만평 같은 역사 자료가 등장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버전으로는 해석이 잘되지 않는다. 킹 목사는 비폭력주의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미국 언론은 그를 폭력시위를 주도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지부조화가 생길 때 사람들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나름의 해석을 시도한다. 가령 나는 위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어쩌면 저 그림이 그려진 때는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가 아직 미국인 대다수의 동의를 받지 않았을 때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건 1964년이고, 위의 만평이 그려진 건 1967년이다. 즉, 만평이 그려질 시점에 이르면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알고 있었고, 많이들 동의했던 시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시도를 하게 된다. 남 얘기 할 것 없이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이 노벨상까지 받은 킹 목사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아닐까?'

찾아보니 이번에도 내 추측은 빗나갔다. 이 만평을 그린 만화가 찰스 브룩스(Charles Brooks)는 백인 우월주의자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1940년대에는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폭력단체인 KKK에 반대하는 만화를 많이 그려서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되자 미 연방수사국(FBI)이 보호해주었을 정도였다. 만평으로 드러나는 그의 정치적인 견해는 중도 성향이었고, 백인우월주의에 반대한 것으로 보아 특별히 킹 목사를 증오한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만화가 찰스 브룩스의 만평은 유명했고, 미국 만평가 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Birmingham Public Library)

그렇다면 브룩스는 왜 1967년에 킹 목사를 폭력시위를 주도하는 인물로 묘사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킹 목사의 변화,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킹 목사를 보는 대중의 시각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7년 만평을 이해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킹 목사가 미국에서 흑인 인권 운동의 리더 중 하나로 각인된 첫 계기는 1955년에 앨라배마주 몽고메리(Montgomery)에서 일어난 버스 보이콧 운동이었다. 이 도시에 살던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백인에게 버스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다가 체포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운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파크스의 거부와 뒤이은 체포, 시위는 그 지역 인권 운동가들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954년, 25세의 나이로 그 지역의 한 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마틴 루터 킹이 이를 주도한 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으로 킹 목사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하면서 인권운동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하게 된 것도 그런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었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노벨 평화상까지 받는다.

미국 흑인의 인권 문제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제가 되면서 미국 정부도 압력을 피할 수 없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민주당의 린든 B. 존슨은 유색인종의 인권을 보장하는 역사적인 입법에 성공한다. 미국에서 학생들이 역사 시간에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공민권법(Civil Rights Act, 1964)과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1965)이 그거다. 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인권운동가들로서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한 지 10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여기까지, 즉 1965년까지의 이야기가 킹 목사에 관해 흔히 알고 있는, 혹은 가장 널리 알려진 버전이다. 킹 목사의 평화적인 운동은 성공했고,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03년 만에 비로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해피 엔딩이다.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우리 모두 킹 목사의 가르침을 따라 인종 화합에 노력해야 한다"라고 가르치려면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1965년 투표권법 서명식. 존슨 대통령과 킹 목사가 악수하고 있고, 킹의 왼쪽에 선 로자 파크스도 보인다. (이미지 출처: The Nation)

하지만 세상은 동화책이 아니다. 흑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투표권법이 미국 연방 상원을 통과한 지 정확하게 1주일 만에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와츠 폭동(Watts Riots)이 일어났다. 미국 역사에서 대규모 인종 폭동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폭동이고, 지금도 인종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에서 소환하는 악명높은 사건이다. 이 일을 시작으로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킹 목사의 인권 운동을 지지하던 백인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이고, 킹 목사의 업적을 찬양하는 백인들이 애써 언급하지 않고 생략하는 시기가 이때부터 그가 암살당할 때까지의 3년이다. 이 글을 시작하게 된 만평이 나온 것이 이 시기다. 당시 백인들의 여론 변화를 이해하려면 와츠 폭동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눈에 와츠 폭동은 참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다.


'낯선 모습의 킹 목사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