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8월 11일부터 16일까지 일어난 와츠 폭동(Watts Riots)은 이제는 미국에서 하나의 전형이 된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 → 흑인 커뮤니티 분노, 폭동'로 이어진 사건이다. 흑인 음주 운전자를 경찰이 제압하는 과정에서 폭행이 일어났고, 이를 목격한 흑인들이 항의하면서 시작된 시위로 34명이 사망하고 도시 곳곳이 불에 타고 큰 재산 피해가 생겼다. 와츠 폭동은 결국 병력(주 방위군)까지 진압에 동원된 최악의 폭동이었다. 이 당시 도시가 입은 피해는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이 습격받은 것으로 유명한 1992년 폭동(이 역시 흑인 운전사가 백인 경찰들에게 구타당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와츠 폭동 진압에 동원된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 (이미지 출처: History.com)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와츠 폭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일이 흑인들의 인권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중요한 법이 마련된 직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그토록 바라던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는데 왜 도시를 불태우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느냐는 궁금증이다. 물론 미국 내 흑인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남부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권운동이 성과를 거뒀다고 해서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에 사는 흑인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커뮤니티는 자신들만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와츠 폭동이 다른 흑인 커뮤니티들과는 무관한, 동떨어진 사건이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듬해인 1967년 7월 12일에는 동북부 뉴저지주 뉴어크(Newark)에서 5일 동안 폭동이 일어나 26명이 숨지고 도시가 불에 탔고, 며칠 뒤에는 중서부 미시건주의 대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나흘 동안 폭동이 일어나 40여 명이 숨지고 큰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런 시위는 다른 지역으로도 전파되어 일리노이,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메릴랜드주에서도 인종 갈등으로 인한 폭동이 발생했다. 전국적인 현상이 된 것이다.

이 글 서두에 소개한 1967년의 신문 만평은 바로 이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신문의 만평은 킹 목사는 전국에서 폭동의 연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We Shall Overcome (우리 극복하리라)"라는 곡이나 연주하고 있는 네로 황제로 묘사한다. (이미지 출처: Comic Book Resources)

미국의 흑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시점에 전국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을 두고 '고마운 줄 모른다'라고 생각한 것은 백인들이었을 뿐, 흑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1960년대는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점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희망찬 시대였다. 중산층이면 누구나 집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마련한 집의 차고에는 새로 뽑은 차가 있고, 집 안에는 TV와 냉장고, 세탁기가 들어오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부의 편중도 심하지 않아서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라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풍요에서 흑인들만은 예외였다. 겉으로는 공민권법으로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는 듯 보였지만 백인 위주의 미국 경제는 흑인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차별의 대표적인 사례가 레드라이닝(redlining)이라는 관행이었다.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사회학자였던 존 맥나이트(John McKnight)는 당시 지역별 빈부 격차를 연구하다가 은행마다 걸려있는 도시 지도에 빨간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흑인들이 밀집된 지역을 표시한 이 빨간선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대출이 제한되었고, 대출을 해주더라도 높은 이자와 수수료를 내야 했다. 미국의 중산층은 꾸준한 부동산 가격 상승이 만들어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좋은 동네에 주택을 소유하는 것이 부의 추적에 중요했는데, 흑인들은 취업 등의 불이익 외에도 이런 경제적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와츠 폭동을 비롯한 흑인들의 인종 폭동은 대개 백인 경찰관의 가혹 행위처럼 경제적 기회 박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로 시작되지만, 자동차를 파괴하거나 상점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폭력행위가 며칠 동안 지속되는 배경에는 이렇게 흑인 커뮤니티 내에 쌓인 박탈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킹 목사는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는 이런 폭동이 확산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킹 목사는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고 말하는 건 과장이 아니다. 그는 1952년에 아내(Coretta Scott King)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마 당신은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알 것"이라면서 자본주의는 숭고한 동기로 시작했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효용성을 상실했다"라고 썼다. 지금은 킹 목사를 대표하게 된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도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이라는 집회에서 했던 것이다.

그는 흑인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는 꿈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백인들의 취사선택

미국의 중산층 백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흑인들의 상황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중요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상황에서 흑인들의 추가적인 요구는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사회의 변화는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니 성급하게 요구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백인들의 생각에 대해 킹 목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유명한 '버밍햄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 (Letter From a Birmingham Jail)'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종 분리의 날카로운 고통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기다리라'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나운 무리가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침없이 폭행해서 죽이고, 당신의 형제와 자매를 물에 던져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면, 증오가 가득한 경찰이 흑인을 욕하고, 발로 차고,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면 (...) 기다리는 것이 왜 힘든지 이해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인생이 주어진다. 앞으로 올 세상에서는 평등해질 것이니 참으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그의 편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백인 중산층을 겨냥한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중도 성향의 백인들(white moderate)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저는 흑인들이 자유를 향해 가는 길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백인 시민 평의회나 KKK가 아니라 중도 성향의 백인들이라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보다는 '질서'를, 정의가 존재하는 긍정적인 평화보다는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부정적인 평화를 선호하고, '당신이 추구하는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당신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언제 자유를 가질 수 있는지 일정을 자기가 정해줄 수 있다고 믿는데, 그들이 가진 시간의 개념은 신화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흑인들에게 "더 유리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끊임없이 합니다. 선의는 있지만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악의를 갖고 있으면서 완전히 착각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좌절감을 줍니다. 미온적인 수용은 노골적인 거부보다 더 당황스럽습니다."

위의 편지는 1963년에 쓴 것이지만, 폭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1967년에도 킹 목사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폭력은 절대 용인하지 않았지만 "폭동은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언어 (a riot is the language of the unheard)"라는 말로 폭동을 일으키는 흑인들을 이해하는 발언을 했다. 앞에서 소개한 만평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KKK의 살해 위협까지 받으며 인종주의에 반대해 싸웠던 만화가 찰스 브룩스는 이렇게 흑인들의 폭동을 이해하려는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는 위선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는 브룩스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1963년만 해도 킹 목사에 대한 여론은 "긍정적" 41%, "부정적" 37%로 긍정적인 견해가 우세했고,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1964년과 이듬해에는 더 올라가서 국민 45%의 지지를 받았지만, 1966년부터는 킹 목사에 대한 지지도는 30%대로 떨어지고,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여론은 60%가 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섰던 여론은 1968년 4월, 킹 목사가 백인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다시 바뀌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위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킹 목사에 대한 미국 중산층 백인들의 이미지는 다시 좋아졌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킹 목사는 그가 인종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던 킹 목사이지, 경제적으로 박탈당한 흑인들의 분노를 이해하는 킹 목사가 아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킹 목사는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래(킹 목사의 표현을 빌자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는 막연한 신화 속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지,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평등의 기제와 흑인들이 받는 경제적 차별을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다.

What Martin Luther King Jr Really Thought About Riots
Joe Biden is trying to use Martin Luther King’s legacy to make the case for a law-and-order crackdown on protests. But King drew a distinction between violence against people and violence against property — and he viewed riots as the product of an unjust social order.
2020년 미국 대선 때 조 바이든 후보가 폭동을 두고 "킹 목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을 비판한 기사 

이렇게 백인들이 킹 목사의 가르침을 취사선택하는 것을 두고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이트워싱이라는 표현은 요즘 들어서는 헐리우드에서 백인 배우가 백인이 아닌 캐릭터를 연기하던 관행을 비판할 때 사용되지만, 원래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감추고 덮어씌우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다. 킹 목사를 화이트워싱 하는 것은 그야말로 백인들에게 거슬리지 않고, 백인 중산층을 위협하지 않는 흑인 지도자로 만드는 행위다.

1967년의 킹 목사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화이트워싱을 거친 킹 목사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낯선 킹 목사가 그의 참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