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세계인들이 미국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지만, 미국은 20세기 중반 이후로 지금까지 세계 최강대국일 뿐 아니라, 한 때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수출'하는 나라였다. 풀브라이트 같은 장학금을 주면서 외국의 유학생들을 데려와 미국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익히게 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미국이 의도적으로 추진한 정책이었고, 비록 예외는 많았지만,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독재주의 국가들에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다양한 압력을 행사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런 미국의 외교 정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한 나라에서는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나라가 한국이다. 과정은 험난했지만, 한국은 정말 최단기간 내에 서구의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실천한, 모범생 같은 나라다.

물론 한국의 국회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민주주의의 모범국'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건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평균 정치인들의 수준을 워싱턴의 멋진 정치인들과 비교를 하면 한숨이 나온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한국의 국회방송과 비슷한) C-SPAN을 보면서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은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기억이 있다. 무슨 일이든 오래 한 사람은 다르듯, 민주주의도 오래 한 나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게 있다.

워싱턴의 수준과 주 정부의 수준

그런데 시선을 연방 정부에서 주 정부로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모든 주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미국의 주 의회와 정부의 수준은 우리나라 국회, 정부와 대략 비슷하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여의도 정치인들의 비리나 의원들이 욕을 하고 싸우는 것과 워싱턴 연방 의회를 비교하면 차이가 좀 있겠지만, 주 의회와 주 정부로 내려가면 정치인들의 수준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다. 아니, 한국보다 훨씬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가령 시카고라는 대도시가 위치한 중서부의 대표적인 일리노이주는 주 정부가 부패한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위키피디아에 '일리노이의 부패상'이라는 엔트리가 따로 존재하고, 지난 7명의 주지사 중에서 네 명이 감옥에 갔다. 한국에서 청와대를 나온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일이 흔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한국 정치의 전반적인 수준이 미국의 주 정부 정도에 도달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생각해보면 한국은 면적이나 경제 규모에서도 미국의 큰 주 하나와 비슷한 수준이다. 남북한의 면적을 합하면 대략 미네소타주, 남한만으로는 인디애나주와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많은 유럽의 국가들도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진 주는 알래스카다. 텍사스(2위)와 캘리포니아(3위)가 그 뒤를 잇는다. 인구로 순위를 매겨도 텍사스는 2위다.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자랑한다. GDP를 기준으로 해도 캘리포니아에 이은 2위로, 만약 텍사스주가 독립된 국가였다면 세계에서 10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을 살짝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알다시피 한국은 어느덧 선진국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경제 규모가 비슷한 텍사스주가 독립된 국가라면 어떨까? 텍사스는 선진국일까?

전속력 후진 중인 텍사스

최근 텍사스주의 의회가 두 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나는 임신 중지와 관련된 법안이고, 다른 하나는 투표법이다. 그런데 이 법안들은 인권을 향상하기는 커녕 현재보다 더욱 축소, 제한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말 그대로 개악(改惡), 즉 고쳐서 나빠진 법이다.

먼저 임신 중지와 관련된 법안을 보면, 이게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 아니 현대 국가에서 통과될 수 있는 법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엽기적이다. 흔히 '낙태'라고 부르는 임신 중지는 미국에서 1973년에 나온 대법원의 판결로 여성의 권리로 인정받았다. '로 대 웨이드(Roe v. Wade)'라는 이 사건을 두고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미국의 각 주에서 여성의 임신중지를 처벌하는 법률들은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 또는 면책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미국의 수정 헌법 14조를 위반한 것으로 판결 내렸다.

이 판결로 인해 여성들은 권리를 보호받게 되었지만, 이 판결의 내용에 동의했던 사람 중에는 법원의 판결이라는 방법론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난해 미국의 대선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다. 그는 여성이 임신 중지를 비롯해 자신의 몸에 결정권을 갖는 것에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 권리가 입법을 통해 보장되지 않고 기존에 존재하는 헌법의 '해석'을 통해 보장된다면 이 권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걸려도 의회가 유권자들을 설득해서 권리를 보장해야지, 대법원이 진보적인 판결을 통해 보장한다면 보수 세력이 대법원의 구성을 바꿔서 새로운 헌법 해석을 끌어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촬영된 긴즈버그 대법관의 모습. 그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반기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 뉴욕타임즈의 기사에 등장하는 사진.

긴즈버그의 생각은 맞았다.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의 보수 기독교 세력은 로 대 웨이드 사건의 판결을 뒤집으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다. 그 결과가 미치 매코널 상원의원과 트럼프의 합작품인 보수 대법원 만들기였다. 오바마의 대법관 임명을 막기 위해 절차를 무시하는 편법을 사용한 후 트럼프의 임기 중에 무려 세 명의 보수 대법관을 밀어 넣으면서 대법원은 확실한 보수 우위로 돌아섰다. 진보진영에서는 공화당의 목표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하급 법원에서 올라온 사건만을 심의한다. 따라서 각 주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에 어긋나는 판결이 대법원으로 올라가기 전에는 논의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대법원에서 여성의 권리를 규정했기 때문에 공화당 우세 주 몇 곳에서 임신 중지를 금지하는 입법을 할 경우 대법원까지 가기도 전에 연방판사가 무효 판결을 내린다. 미국의 몇몇 주에서 시도한 임신 중지 금지법들이 이렇게 무효가 되었다.

천재적인, 혹은 엽기적인

타 주에서 임신 중지 금지에 실패하는 것을 본 텍사스주 의회는 연방판사의 손을 묶을 수 있는 아주 특이한 방법을 찾아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핵심은 "(각 주의) 정부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텍사스주에서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임신 중지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고, 그 결과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기가 막힌 해법을 찾아냈다. 바로 시민들이 서로를 고발하게 만든 것이다.

텍사스의 법은 이렇다: 아무라도 임신 중지를 한 여성을 발견하면 그 여성의 수술을 집도하거나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모든 사람을 모두 고소할 수 있다. 만약 고소할 경우 텍사스주는 법적 비용을 대신 내줄 뿐 아니라, 그렇게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돈 1,100만 원에 달하는 돈을 준다. 즉, 현상금을 내건 셈이다. 그야말로 그 여성을 전혀 모르는, 길 가던 사람도 소송을 걸 수 있고, 그 대상에는 임신 중지 수술을 한 의사 뿐 아니라, 간호사, 접수원, 심지어 그 여성을 수술 장소까지 태워준 우버 기사까지 포함된다. 로 대 웨이드 판결 때문에 주 정부가 나설 수 없으니 시민들이 서로를 감시, 고발하게 하는 거다. 20세기 동유럽이나 북한의 5호 담당제에서나 들어본 방법이 21세기 미국에 도입된 셈이다.

가장 악질적인 임신중지 금지법을 통과시킨 텍사스주 의원들과 주지사의 기념사진

사람들은 정말 "천재적(genius)"이면서 동시에 악랄한 수단이라고 입을 모은다. 분명 위헌의 소지는 있지만 당장 소송을 당하는 것이 두려운 클리닉들은 곧바로 임신 중지 수술을 포기했다. 이제 텍사스주에 사는 여성들은 임신 중지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멀리 타 주로 가야 한다. 텍사스주가 넓지만 그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수술이 필요한 사람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그들에게 차를 타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다른 주로 날아가서 숙박하며 수술을 받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일 수 있다. 결국, 이 법안이 하는 건 여성의 임신 중지를 막는 게 아니라, 가난한 여성들의 임신 중지를 막는 것이다.

'프리코노믹스Freakonomics'의 저자 스티븐 레빗은 1997~2014년 사이 미국 사회에서 범죄율이 20% 떨어진 이유를 1973년의 임신 중지 합법화에서 찾는 유명한 논문을 썼다. 미국에서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중에는 압도적으로 도심 빈곤층 미혼모의 자녀가 많다는 통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아도 기를 능력이 없는 여성들만 임신을 중단할 수 없게 하는 텍사스의 법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법이 금지하는 임신 중지가 많은 여성이 임신 여부를 알기도 전이 임신 6주부터라는 사실, 그리고 근친상간이나 성폭력의 결과로 임신을 했어도 상관없이 임신을 중지하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법 자체가 여성의 결정권을 빼앗는 폭력이다. 탈레반과 텍사스주 의원들이 다른 게 뭐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흑인들의 투표를 막아온 남부의 전통

그리고 오늘 텍사스 주지사가 서명한 투표법이 있다. 투표소를 24시간 개방하거나 드라이브스루 투표소를 설치하는 등 유권자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다. 법과 제도는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쪽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믿음에 어긋나는 이런 법을 통과시킨 이유는 '투표 부정'을 막겠다는 것이다.

투표를 어렵게 만드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서명한 텍사스주의 백인들

문제는 투표 부정이 없었는데 이런 법을 추진하는 이유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지난 대선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트럼프가 패한 후 투표 부정 사례를 많이 신고했지만, 전부 허위신고이거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조사 결과 투표부정이 트럼프 지지자들 쪽에서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재검표 결과 바이든의 표가 오히려 늘어나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꾸 투표 부정을 이야기할까?

바로 가난한 사람들, 특히 흑인들의 투표를 막으려는 것이다. 투표일이 휴일이 아닌 미국에서는 투표를 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낮에 투표소에 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많고, 그들은 아무래도 민주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줄을 서서 투표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기 위해 물을 제공하는 것도 금지하려는 사람들이 공화당 지지자들이다.

텍사스주에서 여성들이 시위에 나선 모습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사실상 똑같은 이유로 시위에 나선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얼마나 기득권 남성들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수십 년 동안 보장되고 있던 여성의 권리를 극렬 종교인들의 주도로 없애버리고, 힘있는 사람들이 투표소로 가는 길을 막고 어렵게 만들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그런 나라를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텍사스주의 공화당원들이 질적으로 얼마나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