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패배 ⑥ 작아지는 러시아
• 댓글 남기기전쟁을 시작하면서 푸틴이 내세운 목표 중에 우크라이나를 무장 해제하고, (러시아가 주장하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혹은 "나치즘(Nazism)"을 억제한다는 게 있었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이데올로기와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하지만 여기에서 길게 다루기는 힘들다. 다만, 이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즉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문화와 언어, 전통, 국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범 러시아(greater Russian world)에 위협이 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민족주의와 서구화
러시아에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종속된, 부차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친러시아 정부가 키이우에 들어서는 미래일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가 목표가 아니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나는 러시아가 승리한다는 시나리오에서도 키이우에 친러시아 정부를 심어놓지는 않을 거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만약 러시아가 친러시아 정부를 만들어 놓는다고 해도 그 정부는 금방 전복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2014년의 유로마이단 혁명도 친러시아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졌다–옮긴이) 이번 러시아의 침략은 과거 역사 속 그 어떤 사건보다도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우크라이나의 민족 정체성을 확실하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보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생각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지인들이 죽는 것을 목격했고, 많은 사람이 전투에 나가 싸웠고,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고, 러시아의 포격으로 많은 사람이 전기도 난방도 없이 살아야 했다. 많은 우크라이나인의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를 통해 판단하건대, 이런 일을 겪은 이들이 러시아를 용서할 리는 없다. 우크라이나 사람 중에 모국어가 러시아어였던 사람들이 고생스럽게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수준의 정치적 선언이다.
심지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압박해 "중립국" 선언에 서명하게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견은 바뀌지 않는다. 국제조약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승리하는 시나리오가 실현되더라도 앞으로 수 년, 수십 년 동안 복수심에 불타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미래 우크라이나의 정부는 국민에게 빼앗긴 땅의 되찾자고 할 것이고, 러시아가 빼앗은 지역에서는 저항운동 세력이 분쟁을 계속 일으켜 러시아의 점령이 지속되기 힘들게 만들 것이며, 우크라이나에서는 모스크바가 아닌 서방 세계를 따르는 정치적인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꺾기는커녕, 지구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애국심을 확실하게 자리 잡게 했다.
그렇게 바뀌는 여론과 태도는 현실에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럽과 통합되는 과정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루지 않고 벌써 시작했다.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크라이나의 전력 공급은 벌써 유럽과 연결되었고, 옆 나라 폴란드와 철도를 비롯한 물리적 연결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증가하고 있다. 교역, 통관과 관련된 합의가 이뤄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과 점점 더 가까워지는 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의 이동과 인적 교류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EU 국가들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은 자기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고, 이 끔찍한 분쟁을 피해 잠시 다른 나라에 머무르는 중이며, 다른 나라들은 이들을 환영한다. 교류와 연결은 국가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국민들 사이에, 개인들 사이에 교류와 연결이 일어난다. 이런 과정은 러시아 병력이 바흐무트 지역에 있는 어느 건물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러시아의 경제
이런 대가를 치르고 러시아가 얻는 게 뭘까? 전반적인 전략적 환경의 악화를 감수한 결과 러시아가 무슨 이득을 얻을까? 러시아가 합병하려는 지역의 경제적인 가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한 비용과 희생을 감수할 만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지역에 언젠가 사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이 풍부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를 사용하기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우선 전쟁으로 발생한 심각한 파괴와 인구 감소가 있다. 러시아가 빼앗은 지역의 인프라와 건물이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이 러시아의 일부로 살고 싶지 않아서 이곳을 떠났다.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연금으로 살고 있는 노년층이 일을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경제를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 밖에도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 지역을 재건하는 비용은 누가 지불할까? 러시아는 이제 국제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나라(pariah state)가 되었는데 어떻게 해외 투자를 유치할까? 가스를 비롯한 에너지 자원을 뽑아낸다 한들 어느 나라에 팔 수 있을까? 일단 유럽 연합은 아닐 거다. 게다가 이곳에 남아서 러시아에 저항하는 세력이 문제를 일으키고 하이브리드 전쟁을 이어갈 텐데 그 와중에 에너지를 안전하게 채취할 방법이 있을까? 우크라이나인 세 명 중 한 명이 드론을 사용해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법을 알고 있는 곳에 정말로 정유공장을 건설하고 싶을까?
러시아가 마주할 현실은 이거다. 러시아가 영토를 아무리 많이 빼앗아도 러시아 경제가 입은 타격을 만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러시아가 끌어들일 수 있는 서방 세계의 투자, 러시아가 가져올 수 있는 서구의 기술과 인적자본은 이제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기존에 러시아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이미 전쟁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기회가 생긴다고 빨리 달려가지는 않을 거다.
러시아는 에너지 산업의 인프라와 중요한 고객도 잃었다. 유럽 연합에 수출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수십억 달러가 들어간 파이프라인이 이제 사실상 쓸모없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가령 중국과 같은 다른 나라에 에너지를 수출하기 위해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만든다고 해도 중국이 유일한 구매자가 될 것이고, 러시아가 아시아 국가들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 에너지 수입 경쟁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중국과 아시아의 수입국은 협상 테이블에서 러시아산 에너지의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거다.
푸틴의 징집령을 피해 러시아에서 탈출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로 인한 인적자본의 감소도 엄청나다는 것을 생각하면 러시아 경제의 앞날은 밝지 않다. 러시아 경제가 전쟁에도 불구하고 2~3% 정도 역성장했다는 뉴스를 듣고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나라의 경제가 앞으로 당분간 매년 큰 성장을 할 거라던 전망을 생각하면 이는 심각한 손실이다.
게다가 국내총생산(GDP)만으로는 러시아 국가 예산의 감소와 안정성의 상실이 얼마나 큰지 알기 힘들다. 러시아의 예산은 흑자와 심각한 적자를 오가곤 했지만, 유가가 극적으로 상승해서 버텨주지 않는 한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군사력과 영향력
이 전쟁이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된다면 러시아는 군사력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러시아가 다른 나라와 분쟁이 생겼을 때 압력을 가할 수단으로써 군사력은 필수적인데, 우크라이나는 이런 러시아의 군사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가 자랑하던 최고의 무기, 최신 전차와 장비들이 파괴되었음이 사진과 영상으로 확인된 상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가장 심각한 손실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손실이다.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이 정도로 버틸 수 있는 것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비축해두었던 장갑차와 대포, 탄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축분은 러시아가 소련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러시아가 꺼내서 사용한 군장비 중 많은 것들이 소련 시절에 제작된 것들이라는 얘기다. 21세기 러시아 경제는 소련처럼 수천 대의 장갑차를 찍어낼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 러시아가 사용하는 장비, 러시아가 보여주는 유지력(staying power)은 그렇게 창고에서 꺼내온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런 이점은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창고에서 다 꺼내 쓰면 그걸로 끝이다.
러시아군이 무기를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러시아의 군수산업이 새로운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속도에 달려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예산에 달려있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와 유럽 경제의 규모 차이를 생각하면, 두 지역 사이의 안보 균형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러시아의 소프트 파워와 국제 여론을 바꾸는 영향력의 감소도 심각하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이런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왔다. 다른 나라 국민의 마음을 사고, 선거나 정당 정치인들에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는 러시아가 지정학적 적대 국가들의 단결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아래 통계를 보면 2020년까지만 해도 이런 방법은 잘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국민의 상당수가 러시아 연합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가령 그리스인의 48%, 독일인의 30%, 스페인 사람들의 31%가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런 호감도는 사라져버렸다. 러시아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균형을 잡는 존재라는 이미지를 전달하려 하지만 이제는 그저 무력 침략 세력으로 보이게 되었고, 그런 변화와 함께 지지율도 떨어졌다. 폴란드인들의 2%만이 러시아에 호감을 갖고 있고, 그리스에서 러시아 호감도는 48%에서 14%로 떨어졌고, 독일에서는 약 절반이 날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라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무한정으로 공급하는 데 100% 찬성한다는 건 물론 아니지만 러시아에 호감을 느끼고 러시아를 지지하는 견해가 거의 완전히 사라진 건 사실이다.
특히 유럽의 우파 정당 지지자들의 견해 변화를 보면 더 충격적이다. 이들이 극우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아래 퓨리서치의 조사를 보면 2020년까지만 해도 이들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지지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랬던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가 스스로를 국제적인 진보 어젠다에 대한 문화적 대척점(혹은 대안)으로 포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파 정당 지지자들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못 본 체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전진이탈리아당(Forza Italia, 중도우파 정당–옮긴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호감도는 67%에서 18%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정당이 러시아에 대한 견해를 완전히 바꿨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권자들의 생각은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가 유럽에서 영향력을 쌓고 이들의 단결을 무너뜨리는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요약하면, 러시아는 자국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군사력을 훼손하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미국의 영향력을 키워주었고,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NATO의 확장과 재무장을 유발했고, 자신들이 구해주겠다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초토화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러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는 러시아가 자포리자, 헤르손, 도네츠크, 루한스크 네 지역을 모두 지킨다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이 지역 중 한 곳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는 당돌한 바람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NATO에 절대 가입하지 않고, EU에도 들어가지 않는 꿈의 시나리오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지막 편 '전략적 패배 ⑦'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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