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남자들
• 댓글 남기기헐리우드 유명 배우가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대 위에 올라가 코미디언의 뺨을 때린 일이 일어난 지 정확하게 일 년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폭행의 장본인인 윌 스미스(Will Smith)는 징계 처분과 함께 큰 비난을 받고 문제 인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화를 촬영하며 활동 중이다. 이런 물의를 일으킨 경우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당분간 조용히 지내는 (한국에서 흔히 쓰는 표현으로, "자숙하는") 기간을 갖다가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여론이 나쁜 상황에서 활동을 재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물의를 일으키는 유명인이 워낙 많기 때문에 표준화된 매뉴얼이 있다고 느껴질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대중 앞에 슬그머니 나선다.
역설적이지만 피해자가 유명인일 경우 이미지 관리가 더 까다롭다. 많은 사람의 동정과 위로, 응원을 받는 것과 자신의 상업적 흥행성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윌 스미스에게서 뺨을 맞은 크리스 록(Chris Rock)의 경우 남성이고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였다. '피해자=여성'이라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피해자가 남성일 경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더구나 크리스 록은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더욱 난감해진다.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동정을 보내는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말을 해도 '폭행 사건의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떼어내지 못하면 농담에 마음 놓고 웃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크리스 록은 흑인 남성이다. 사건의 발단이 된 농담과 그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해자인 윌 스미스 역시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마초적인 문화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한 남성의 이미지를 극복해야 하는 건 록의 몫이다. 게다가 록으로서는 자신의 직업인 코미디를 통해서 이 작업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폭행 사건 후에도 코미디 클럽 등에서 간간이 공연을 했지만, 미디어에 대대적으로 공개되는 큰 공연은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관객들은 그 사건에 대한 록의 '공식적 반응/반격'으로서의 코미디를 기다려왔다.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크리스 록: 선택적 분노 (Chris Rock: Selective Outrage)'가 그 기다림에 대한 답이었다. 아마도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 즉 올해의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전에 공개해서 언론의 시선을 끌어내려는 넷플릭스의 계산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록 본인이 이 쇼를 준비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기대에 비해 무척 실망스런 공연이었다. 재미있는 농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윌 스미스와 그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Jada Pinkett Smith)에 대한 언급은 그가 일 년 전의 사건을 잘 발효시켜 코미디로 승화했다기보다는 아직도 날것 그대로의 사건으로 언급하는 느낌이었다. 형편 없는 공연은 아니었어도 인상 깊은 내용은 찾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코미디라기 보다는 쌓였던 분노를 표출한 것에 가까웠다. (스미스의 작품 제목을 잘못 말하는 바람에 농담을 망쳐서 삭제된 부분도 있는 걸 보면 잘 준비된 공연이었는지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는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감상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 공연이 공개된 후에 나오는 비평을 보면 실망스러웠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중에서도 가장 맵고 진심 어린 비평은 작가이자 영문학 교수인 록산 게이(Roxane Gay)에게서 나왔다. (이 작가에 관해서는 작년 12월에 오터레터에서 '록산 게이 이야기'를 통해 소개한 적이 있으니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그는 뉴욕타임즈 오피니언란에 "Christ Rock Looks Very Small Right Now (지금 크리스 록은 아주 작아 보인다)"라는 에세이에서 록의 입장을 동정(다시 말하지만 코미디언들이 원하는 반응은 아니다)하면서도 이번 공연은 아이들이 서로를 놀리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라고 평가했다.
흑인인 록산 게이가 무엇보다 집중한 대목은 공연 마지막에 록이 그날 무대 위에서 물리적으로 반격하지 않은 이유를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제게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뭐라고 가르치셨는지 알아요? 백인들 앞에서 싸우지 말라는 거였어요"라고 말하며 '마이크 드롭 (mic drop)'을 하고 당당하게 무대를 나갔다. 코미디언이 청중을 뒤집는 확실한 펀치라인을 날린 후에 하는 게 마이크 드롭이고, 록은 자신의 마지막 라인이 그렇게 파워풀했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게이의 평가(이고 나도 동의한)다. 공연 내용 중에 다른 농담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왜 이 공연에 관심을 가졌는지 안다면 농담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것이 일 년 전 폭행 사건이었다. 록은 이 사건을 신선한 농담으로 재조명해서 청중을 웃기고 록 자신이 훨씬 더 큰 사람으로 보여지게 만들었어야 했다. 청중이 원하던 게 그거였다.
하지만 록은 그냥 쌓였던 불평을 하는 데 그쳤다.
코미디언들의 영향력
그래봤자 코미디언의 공연인데 뭘 그렇게 대단한 기대를 하냐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현재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의 지위는 옛날처럼 그저 '만담과 개그'의 수준이 아니다. 재치 있는 입담 수준이었던 코미디를 사회 비평과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조지 칼린(George Carlin, 1937~2008)의 경우, 미국 사회와 문화가 가진 모순과 미국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지만, 그의 통찰력과 어휘 선택, 그리고 코믹 타이밍은 풍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꼼짝없이 웃게 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많은 코미디언이 칼린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조지 칼린은 관찰(observational) 코미디부터 사회 비평, 블랙 코미디, 언어유희 등 다양한 코미디를 구사했지만, 후대의 코미디언들은 그런 영역들 중에서 하나를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발전시켰다. 제리 사인펠드(Jerry Seinfeld)나 래리 데이비드(Larry David), 존 멀레이니(John Mulaney) 같은 이들은 관찰 코미디에 집중해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사회 비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데일리쇼(The Daily Show)를 성공시킨 존 스튜어트(Jon Stewart)나 그의 뒤를 이은 트레버 노아(Trevor Noah) 같은 코미디언은 뉴스에서 코미디의 소재를 찾았고, 조지 W. 부시 이후로 이어진 공화당의 몰락 과정에서 이들의 사회 비평 코미디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코미디센트럴이라는 작은 케이블TV에서 시작한 데일리쇼의 경우 뉴스 코미디임에도 "미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뉴스"로 선정될 만큼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트럼프 시절 이후로는 스티븐 콜베어(Stephen Colbert), 존 올리버(John Oliver), 하산 미나즈(Hasan Minhaj), 심지어 지미 키믈(Jimmy Kimmel) 같은 코미디언도 정치와 사회 풍자 위주로 쇼를 끌어가면서 이를 미국 코미디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코미디언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아주 커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위에서 언급한 코미디언들이 전부 남성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거다. 미디어 기업을 창업하면서 '온라인 글쟁이들'을 발굴해본 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성과 남성의 비율을 50 대 50으로 맞추고 싶었지만, 정말 힘들었어요. 이유를 알고 보니 온라인에서 시사적인 발언을 하는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받는 공격은 남성 필자들이 받는 것에 비하면 그 양과 질이 다르거든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글을 잘 쓰는 여성들은 공격을 덜 받는 소재를 찾게 되고 온라인에서 시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온통 남자들로 가득하게 되는 거죠." 똑같은 젠더 필터링이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에도 존재하고, 시사적인 발언을 하는 코미디언 중에는 인종을 불문하고 남자들만 남게 된다.
기득권에 들어선 남자들
영어권 인기 코미디언들은 돈을 많이 번다. 사인펠드나 제이 레노(Jay Leno) 같은 사람들은 자동차 수집이 취미라서 따로 직원을 고용해서 박물관 같은 차고들을 유지한다. 젊은 시절에는 지하의 지저분한 술집에서 취객을 상대로 공연을 하면서 객석의 반응을 귀신처럼 읽어내던 이들도 나이가 들고 성공하면서 둔해지고 사고가 굳어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2021년에 넷플릭스 스페셜로 트랜스젠더를 공격했다고 큰 비난을 받은 데이브 샤펠(Dave Chappelle)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오터레터에서 '불편한 농담'이라는 글로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샤펠의 트랜스젠더 농담은 그 한 편으로 끝나지 않았다. 샤펠이 이후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하면서 관객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트랜스젠더를 농담의 소재로 삼아도 되느냐에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웠던 그의 팬들도 몇 개월이 지나도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집착하듯 소재로 삼자 그때부터는 "데이브 샤펠이 코미디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가진 불만을 쏟아 놓으면서(rant) 입장료를 받는 것 같다"라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꼰대가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점에 비슷한 일이 중년 남성 코미디언들 사이에서 번번이 일어났다. 방송과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던 영국 코미디언 지미 카(Jimmy Carr)는 "홀로코스트에도 긍정적인 부분은 있었다. 집시(로마)들을 없앤 것"이라는 농담으로 큰 비난을 받았지만–데이브 샤펠처럼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버티면서 사람들이 그에 대한 관심을 끊기 시작했다.
호주 코미디언인 짐 제프리스(Jim Jeffries)는 원래 술과 여성을 농담의 소재로 삼는 전형적인 남성 코미디언이면서도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공연 '하이 앤드 드라이(High & Dry)'에서 기후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를 소재로 삼았다. 그는 툰베리의 어눌한 말투를 흉내 내며 툰베리가 싫어도 "중년 남자가 16살짜리를 공격하면 안된다"라고 농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툰베리는 이제 19살이고 자신은 아무 말이든 해도 괜찮다며 "I can fuck Greta Thunberg"라는 말을 해서 (대부분이 남성인) 청중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툰베리를 싫어하는 중년 남자 코미디언을 이야기하면 제레미 클락슨(Jeremy Clarkson)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툰베리를 두고 "버릇없는 애"라면서 "엉덩이 좀 맞아야 한다(needs a smacked bottom)"이라고 말해서 큰 비난을 받았지만,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돈 많은 남자 코미디언들이 왜 그렇게 툰베리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툰베리가 농담의 소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영어권 코미디는 "모두가 평등하게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이 불법도 아니고, 반드시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일회성으로 한 번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데이브 샤펠처럼, 혹은 여성 혐오가 주요 소재인 빌 버(Bill Burr)처럼 특정 인물과 집단에 집착을 하는 경우다. 더구나 그 농담에 재미보다는 개인적 불평의 함량이 더 클 경우, 사람들은 조용히 발길을 끊는다. 코미디계를 떠났던 10여 년 만에 샤펠이 복귀했을 때 환호했던 청중의 숫자는 크게 줄었고,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은 루이스 C.K. (Louis C. K.)는 한 때 "조지 칼린의 후계자"라고 추앙받던 전설적인 존재에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작은 코미디언이 되었다.
대부분 1960, 70년대생인 이들은 자신을 '캔슬 문화 (cancel culture)'에 대항해 발언의 자유를 수호하는 올드가드(old guard)로 자부하는 듯하지만 이들의 코미디는 낡았고, 큰 무대에 서도 불평을 늘어놓는 뒷방 늙은이들처럼 쪼그라들어 보인다. 여전히 많은 관객을 모으고 있고, 큰돈을 벌지만, 문화적 중요성을 빠르게 잃고 있어서 그렇다. 이렇게 나이든 남자들이 소수자를 공격해야만 발언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동안 새로운 코미디언들이 빠르게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
요즘 페이스북과 유튜브가 내게 권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80%가 여성이다. 소셜 알고리듬이 나를 나보다 잘 알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내 취향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사람이 나만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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