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의 텍사스주는 흑인들의 투표를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부터 여성들의 임신 중지를 사실상 금지하는 법, 그리고 학교나 기업이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금지하는 명령 등 각종 보수적이고 후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국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진국 텍사스'에서 자세하게 다뤘다). 그리고 논란의 한 가운데 공화당 소속의 그레그 애벗(Greg Abbott) 주지사가 있다. 각종 보수적 입법과 명령은 사실상 그레그 애벗이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최근 애벗이 등장한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한 텍사스 유권자가 다가오는 애벗 주지사에게 열렬한 지지자처럼 다가가서 악수하는 도중에 그를 비난하는 말을 쏟아내는 장면이다. "오마이갓"을 외치며 다가가 "주지사님이세요? 주지사님이죠?"하고 다가가서 "그렇다"고 하는 주지사와 악수를 하다가 곧바로 "여성들이 임신 중지를 못하게 하는 법에 왜 서명해요? 당신은 그래서 쓰레기야 (Why would you sign a law telling women whether they can have an abortion or not? That makes you a doucheb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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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정치인이라고 해도 예의 없게 욕설을 퍼붓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일 수 있지만, 가진 것 많은 중년 남성이 많은 젊은 여성들의 권리를 빼앗은 걸 승리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걸 생각하면 속이 후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 장면은 곧바로 온라인에서 바이럴 영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영상이 각종 사이트와 매체에 공유되면서 내용과 상관없는 댓글이 쏟아졌다. "애벗 주지사가 왜 휠체어를 타고 있지?" "저 사람이 원래 휠체어를 탔나?"라는 질문들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말하면 애벗 주지사가 휠체어를 이용한 것은 오래되었다. 1984년에 길에서 조깅을 하다가 커다란 나뭇가지가 떨어져 크게 다쳐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텍사스주 대법관으로 공직에 들어선 때가 1990년대 말이었으니 그의 공직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사진 텍사스의 유권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최근 애벗 주지사의 행보를 전국 뉴스를 통해 알게 된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생소한 사실이었다. 대개 아래와 같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간간이 지팡이를 든 모습을 보여준 김대중 대통령이 외에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정치인을 본 기억이 거의 없지만, 미국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여기에 리스트가 있다).

임신 중지를 사실상 금지하는 '심장 박동법'에 서명한 후 의원, 지지자들과 웃는 애벗 주지사 (앞줄 가운데)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서는 신체적 장애가 정치인으로서 성공하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대중의 인식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 의지와 자기 계발을 유난히 강조하는 미국인들은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자신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한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에 그 극복이 완전히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루즈벨트의 휠체어

미국에서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가령 성인이 되어 소아마비(폴리오)를 앓아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1882~1945)의 경우, 대중 앞에 나설 때는 보이지 않게 부축을 받아서라도 서있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컸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그 결과 지금처럼 사진과 영상이 넘쳐나지 않던 당시에는 그가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쓴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전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사회가 다름을 인식하는 방식이 변화하면서 장애인을 묘사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대 말에 일어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1882~1945)의 조각상과 관련한 논란이 그것이다.

루즈벨트는 성인이 된 후에 병을 앓아 휠체어를 사용하게 된 사람이다. 의술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그가 39세가 되던 1921년에 소아마비(polio)에 걸렸다고 알려졌지만, 지금은 그가 걸린 병을 길랭-바레(Guillain-Barre) 증후군으로 추정한다. 루즈벨트는 운동과 물리치료를 통해 장애를 극복하려 애를 썼고, 그 과정에서 비슷한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센터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부축이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뉴욕 주지사에 출마해서 당선되고, 곧이어 대통령직에도 도전해서 당선된 것은 모두 그가 보행장애를 갖게 된 후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걸 대중 앞에서 드러내는 건 극히 꺼렸다. 휠체어는 사람들이 없을 때만 사용했고, 대중 앞에 나설 일이 있을 때는 양옆에서 보이지 않게 부축해서 걸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그가 장애를 창피하게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20세기 초의 사고방식을 고려하면 그가 자신의 장애를 최대한 숨기려고 했던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두 발로 걷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들이 많았던 세상이었다.

닐 에스턴이 제작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모습. 1997년 기념관의 완공과 함께 공개된 이 조각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앉아있는 휠체어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1997년 기념관의 완공과 함께 공개된 이 조각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앉아있는 휠체어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그랬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관이 1990년대 말에 만들어지면서 그의 조각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는 논란이 생겼다. 기념관의 설계자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휠체어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조각하는 것에 반대했고, 그를 앉은 모습으로 묘사하되 큰 망토로 앉아있는 것이 휠체어인지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생전 자신이 휠체어를 탄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렸던 대통령의 의도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48년 런던에 세워진 루즈벨트의 동상은 별 논란 없이 서 있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일부 사학자들과 장애인 인권운동가들이 이에 반대했다. 그가 장애를 가진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 사실은 루즈벨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뿐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을 의식해서 동상을 설계한 조각가는 루즈벨트의 동상 뒤쪽에 바퀴가 살짝 드러나게 설계를 했지만 애써 뒤로 가서 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과 루즈벨트의 의도 사이에서 찾은 절충안인 셈이다.

장애인 단체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처럼 존경받는 인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세상의 장애인들에게 큰 영감과 희망을 줄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애써 포기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단체는 기념관 내에 또 하나의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 루즈벨트가 타고 있는 휠체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니, 루즈벨트보다 그가 탄 당시의 휠체어가 더 주인공처럼 보이는 조각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평생 장애를 가졌던 인물이 아니었고,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규정해버리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2021. 1. 26)


사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업적을 그의 장애와 결부시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의 많은 보수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입법을 장애와 연결해서 생각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물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진보 쪽에 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있다. 그 반대라면 이런 모습이 나올 수 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이나 주지사의 업무는 휠체어의 사용 여부와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빌런의 탄생

하지만 미국인들이 장애를 정치 지도자의 결격 사유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정치인의 외양에 중립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루즈벨트는 자신의 휠체어 사용 사실을 최대한 숨겨야 했고, 버락 오바마는 절반이 백인이었지만 사람들 눈에는 100% 흑인이었고, 그 사실이 그의 당선에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은 대통령이 키가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전쟁에 직접 나가서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닌 현대의 리더가 굳이 큰 덩치를 지닌, 그것도 남성이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키 큰 백인 남성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미국 유권자들이다.

여기에서 단순한 장애 여부보다 좀 더 깊은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외모가 그의 리더십을 비롯한 사고력과 정신력을 반영한다는 사람들의 잠재의식, 혹은 선입견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받아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신감과 카리스마를 키우기 쉽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해석과 '잘생긴 사람들은 항상 좋은 대우를 받고 많은 기회를 제공받기 때문에 남들 만큼 노력하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같은 동전의 양쪽 면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외모가 성격을 비롯한 내적 자아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논란이 이번에 새로 나온 007 시리즈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의 빌런(악당)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에서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해서 주목받은 배우 라미 말렉(Rami Malek)이 연기한 사핀이라는 이름의 이 악당은 얼굴 전체에 흉터를 가지고 있다. 영화 속 사연은 알 수 없지만 한 스틸사진에서는 마치 '오페라의 유령'에서 본 듯한 부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라미 말렉이 연기한 악역 캐릭터 사핀(Safin)

이 캐릭터가 공개된 후 "악당을 안면에 손상을 입었거나 큰 흉터를 가진 인물로 묘사하는 진부하고 차별적인 관습을 또 반복했다"고 비판 여론이 일어났다. 007 시리즈가 클래식한 영화 분위기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유지하는 것은 알겠지만 얼굴에 상처, 기형을 가진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뒤틀리고 악한 마음을 가졌다'는 오래된 편견에 기대는 게으른 캐릭터 만들기라는 것이다.

007 시리즈에는 얼굴에 흉터나 있거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인물들이 빌런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헐리우드 영화들을 비롯한 전 세계 콘텐츠에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전혀 낯설지 않은 편견이다. 1976년에 나온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영화 '태권브이' 속 악당인 카프 박사는 작은 키에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과학자들 앞에서 발표하던 중 올라서있던 의자에서 떨어지며 웃음거리가 되면서 앙심을 품었다는 배경 스토리를 갖고 있다. 직접적인 원인은 사람들의 조롱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아이들에게는 '특이한 외모=이상한 성격=악당'이라는 등식을 잠재의식 속에 심어주는 장면이다.

역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디즈니의 '라이언 킹' 속의 빌런은 얼굴에 흉터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름도 스카(Scar, 흉터)다. 얼굴의 흉터는 마음의 사악함을 반영한다는 이런 생각이 만화를 통해 다시 한번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고에 고착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에서 사고로 얼굴에 흉터가 생긴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편견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태권브이'(1976) 속 카프 박사는 외모로 놀림을 받고 앙심을 품어 악당이 된 것으로 묘사된다.
'라이언 킹'(1994) 속 빌런 스카(Scar)

그런데 만화영화뿐일까? 누구나 한 번쯤 (직접, 혹은 옆에서) 들어봤을 "너는 덩치는 큰데 왜 그렇게 쪼잔하냐"는 말은 "키가 작은 사람들은 쩨쩨하다"는 말을 뒤집은 것뿐이다.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키는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편견을 갖고 살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 이후로 동아시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어 온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다. 모르는 사람의 "인물됨"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신체의 풍모와 말과 글씨와 판단력을 봐야 한다는 이 말은 사람의 외모에서 내면세계를 볼 수 있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이런 사고방식이 2021년에 나온 007 영화에도 똑같이 드러난다는 사실은 인류가 아직도 얼마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장애는 성격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레그 애벗 주지사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그의 장애와 그의 정책, 혹은 자격요견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다만, 그가 1984년의 사고 이후로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이제까지 78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았으면서도 정치인이 된 후에는 비슷한 손해배상을 할 수 없도록 막아버렸다는 비판은 받는다). 무엇보다 그가 주지사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에서 신체적 장애가 반드시 사회적 장애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여전히 '007 노 타임 투 다이'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인식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가령 뇌성마비를 앓은 사람이 말을 천천히 하고 발음이 불분명한 것을 두고 그의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친절 아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이 그렇다.

아래 영상에 등장하는 로지 존즈는 작가이자 배우, 코미디언인데, 우연히 뇌성마비를 앓았다. 그런데 그가 말을 천천히 한다고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편견 섞인 학습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존즈는 자신이 쓴 동화책 속 인물인 에디가 웃기고, 똑똑하고, 고집 세고, 의지가 강하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흠이 있는 아이인데, 그냥 뇌성마비를 겪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장애인이 영상 콘텐츠에 등장하는 방법은 여러 단계가 있다. 영화 '말아톤'처럼 등장인물이 가진 장애 자체가 작품의 핵심인 단계가 있는가 하면, 장애가 주제는 아니지만, 장애를 가진 것이 캐릭터의 주요 특징이 되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같은 작품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다양성과 포함(inclusion)이 일어나는 것은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스토리가 그의 장애와 전혀 무관하게 전개되는 단계다. 그 캐릭터는 좋은 성격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성격일 수도 있지만 그건 비장애인 캐릭터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깔이 그의 성격을 말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이 짐작하거나 연관 지을 수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장애는 인성도, 성격적 특성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