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짧은 버전이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 게재되었습니다.


2017년 디즈니가 1992년도 애니메이션 히트작 ‘알라딘’의 실사판 영화를 제작한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의 관심은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가에 쏠렸다. 이유는 이렇다. 영화라는 장르가 태어나서 거대한 산업으로 자란 20세기 내내 헐리우드에서는 유색인종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뻐드렁니를 붙인 채 얼굴을 찡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일본인 유니오시 역을 한 백인 배우 미키 루니가 대표적이지만, 일일이 사례를 나열하기 힘들 만큼 흔한 일이어서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일본인 유니오시 역을 연기한 미키 루니 

가장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배우가 백인이라서 그랬다는 것은 핑계다. 워낙 다인종 사회이고 유색인종 배우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관객이 백인 배우를 선호한다는 핑계로 지속되어온 관행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 이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졌고, 영화 스튜디오는 유색인종이 주연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꺼려도 최소한 영화에 등장하는 유색인 캐릭터는 유색인 배우를 써야 한다는 인식이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알라딘의 실사판 영화에 관심이 모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알라딘은 잘 알려진 대로 중동지역의 이야기를 모은 ‘천일야화’ 중 ‘알라딘과 요술램프’에 등장하는 유명한 캐릭터다. 1952년도에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알라딘과 램프(Aladdin and His Lamp)’에서는 조니 샌즈라는 백인 배우가 별 분장도 없이 알라딘 역을 맡았지만, 1992년도 작품은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에 피부색을 살짝 짙게 하고 아랍계 느낌이 나는 정도로 차별화를 하고 넘어갔다.

1952년 할리우드에서 만든 ‘알라딘과 램프’에서는 알라딘이 무슬림으로 나오지만, 배우들은 모두 백인이다.
1952년 헐리우드에서 만든 ‘알라딘과 램프’에서는 알라딘이 무슬림으로 나오지만, 배우들은 모두 백인이다.

하지만 실사판에서는 캐스팅하는 배우의 인종이 분명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21세기의 여론은 더 이상 화이트워싱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디즈니는 아랍계의 배우를 구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구한 배우는 이집트계 캐나다 배우 메나 마수드(알라딘)와 인도계 영국 배우 나오미 스콧(자스민 공주)이었다. 하지만 자스민 역의 스콧은 인도계와 백인의 혼혈 배우였기 때문에 “디즈니가 유색인종 중에서 가장 피부가 흰 여배우를 골랐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2019년에 개봉된 디즈니의 '알라딘'은 화이트워싱 논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알라딘은 중국 소년

그런데 이렇게 알라딘의 인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논란이 있다. 천일야화 속 알라딘이 과연 아랍계냐는 것이다. 정답부터 말하면 ‘아니다’이다. 천일야화를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본 사람들은 아랍계, 혹은 중동의 어느 지역의 이야기로 생각하지만, 책에서는 알라딘은 중국인이다. ‘알라딘과 요술램프’의 도입부에서 알라딘은 “중국의 어느 도시”에서 엄마와 함께 사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게으른 소년”이라고 소개한다.

19세기 영국 삽화가 월터 크레인이 그린 알라딘 이야기 책의 삽화 속 알라딘은 중국, 혹은 동아시아 풍의 복장을 하고 있다.
19세기 영국 삽화가 월터 크레인이 그린 알라딘 이야기 책의 삽화 속 알라딘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아랍 청년’ 알라딘의 이미지는 누가 만들어낸 걸까.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범인’은 헐리우드가 앞서 이야기한 1952년의 영화에서 알라딘은 터번을 두른 아랍계 청년의 모습이다. 하지만 반드시 미국 영화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같은 해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알라딘 영화에서 알라딘은 인도, 혹은 페르시아의 인물로 등장할 뿐 중국계와는 거리가 멀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알라딘의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문헌을 볼 필요가 있다. ‘천일야화’를 중동 밖의 세상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17세기 프랑스의 동양학자 앙투안 갈랑(Antoine Galland)이다. 1677년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동지역에서 일하면서 아랍과 터키,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지역의 언어와 문학을 연구한 갈랑은 1704년에 그 지역에서 돌아다니던 ‘천일야화(Les mille et une nuits)’를 프랑스어로 처음 번역해서 유럽에 소개했다. 그런데 그가 ‘천일야화’라고 소개한 이야기들 중에는 중동지역에서는 천일야화에 들어가지 않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그가 자의적으로 집어넣은 대표적인 이야기가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이다.

'천일야화'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앙투안 갈랑(1670-1715)

갈랑의 일기에 따르면 ‘알라딘과 요술램프’는 시리아 출신의 이야기꾼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한나 디야브(Anṭūn Yūsuf Ḥannā Diyāb)라는 이 남성은 파리를 방문했다가 동양학자(당시 유럽에서 동양은 중동부터 시작해서 아시아 전체를 의미했다) 갈랑을 만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서는 알라딘이 중국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갈랑은 자신의 일기에 한나 디야브를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정작 자신이 펴낸 이야기책에는 디야브를 출처로 밝히지 않았다. 이 위대한 시리아의 이야기꾼이 받아야 했을 크레딧을 백인 남성이 가로챘다는 것 사실은 헐리우드에서 유색인종의 역을 백인이 했던 관행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이 글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바티칸에 소장된 한나 디야브의 회고록 (전문 링크)

그리고 그 뒤로도 18, 19세기 유럽에서 발간된 ‘천일야화’의 다양한 판본 속 삽화에서 알라딘은 분명히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풍의 배경에 등장한다. 즉, 알라딘의 이야기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시절에는 원전에 충실했지만, 그 후에 다른 지역으로 퍼지면서 알라딘의 국적이 중국에서 아랍 어딘가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알라딘이 중국인이라는 건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저 도입부에 언급될 뿐이다. 사실 알라딘의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지명이라고는 중국과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밖에 없다. 알라딘을 찾아오는 마술사가 마그레브에서 왔다는 정도다.

하지만 이야기 전체에 등장하는 이름과 호칭은 모조리 아랍 문화에 속해 있다. 중국이라면 왕이나 황제가 등장해야 하는데 알라딘의 이야기에서는 ‘술탄’이 등장하고, 알라딘이 사랑에 빠지는 공주의 이름인 바두르 울바두르 역시 아랍식 이름이다. 만화, 영화에서는 자스민이라는 영어권에 익숙한 이름으로 바뀌어 등장하는데, 꽃 이름인 자스민은 페르시아에서 나와 아랍과 터키 지역으로 퍼진 이름이다. 결국 갈랑이 시리아 출신의 이야기꾼에게서 들은 알라딘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출신만 중국일 뿐, 전형적인 중동 지역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삽화가 토머스 달질의 그림(1890)에는 알라딘이 청나라 아이로 등장하고, 찾아온 마술사는 아랍계로 보인다.
아랍계 마술사가 중국에 왔다는 도입부에 부합하는 그림책 표지

“그렇다면 알라딘이 중국에 사는 무슬림인 후이(회)족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리적으로는 중국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아랍과 같은 무슬림이니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라딘의 이야기를 후이족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만한 다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미지의 세계’라는 환상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미지의 세계

미국의 역사학자인 크리스틴 M. 문은 미국의 영화와 만화에서 알라딘이 페르시아 지역에 사는 캐릭터로 소개한 이유가 그 지역이 서구권 사람들이 잘 모르는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이유로 갈랑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시리아 이야기꾼 한나 디야브에게는 그런 미지의 세계가 중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알라딘이 머나먼 나라에 살던 인물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당시 중동의 이야기꾼들이 생각해내기 가장 쉬운 미지의 세계는 중국이었던 거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의 알라딘 연극공연 팸플릿은 일본풍과 중국풍을 보여준다.

같은 이유로 알라딘의 이야기는 번역되거나, 번안해서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지면 그 지역에서 생각하는 "이국적인" 장소로 무대가 바뀌어왔다. 가령 덴마크의 작가 아담 올렌슐레거(Adam Oehlenschläger)가 옮긴 알라딘의 이야기는 중국이 아닌 페르시아가 배경이다. 유럽인들이 흔히 '오리엔트'라고 불렀던 동양은 중동지역부터 극동(동아시아)까지를 모두 포함하지만, 갈랑과 같은 사람들이 접한 "동양의 이야기들"은 이베리아반도, 시칠리섬, 팔레스타인, 비잔틴/그리스, 북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전해진 것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듣는 사람들이 이야기 속의 지명을 제대로 알았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알라딘 같은 아랍 이름을 가진 아이가 중국인이었다고 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책에 중국인 복장의 삽화 하나를 넣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이야기로 만화를 그리거나 영화를 만들 때는 얘기가 다르다. 중국인 주인공이 왜 중동 지역으로 가서 술탄의 딸과 사랑에 빠졌는지, 말은 어떻게 통했는지, 복장은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등등에 관해 관객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원작을 보면 알라딘이 중국인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고, 무엇보다 알라딘이라는 이름조차도 전형적인 아랍 이름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힘들게 알라딘을 중국인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냥 무슬림으로 바꿔놓으면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뭘까? 인도계 지니와 중국계 알라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