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자의 견해 ②
• 댓글 남기기미국이라는 나라
스티븐 코트킨은 젤렌스키를 백악관에 초청한 자리에서 벌어진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미국이 망하는 징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눈앞에서 보고 있어서 충격으로 느끼지만, 미국 역사에 비슷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의 재임 기간(1829–1837)이나 남북전쟁(1861~1865)을 예로 든다. 남부가 노예제도를 유지하려고 연방에서 분리를 시도한 남북전쟁은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앤드류 잭슨 대통령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트럼프 1기 때 그의 핵심 참모였던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은 그를 앤드류 잭슨에 비유했고, 트럼프도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미국인들이 역사에서 잭슨 대통령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1830년의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 흔히 '이주법'으로 번역하지만, 원래 표현을 보면 '제거법'이 맞다)이다. 그 법의 결과로 남동부에 살고 있던 다섯 개 원주민 부족이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물론 배넌이 트럼프를 잭슨에 비유한 이유는 인디언 이주법 때문이 아니다. 잭슨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남발해 (이전 대통령들이 거부권을 사용한 횟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왕처럼 군림한다고 해서 "앤드류 1세 국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연방 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내놓고 무시하며 "대법원장이 자기가 내린 판결을 강제해 보라"며 비웃기도 했다.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티븐 배넌은 그런 잭슨이 트럼프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디언 이주법에서도 드러나지만, 잭슨은 지독한 인종주의자였고, 노예를 소유하고 노예제도를 적극 옹호한 인물이기도 하고,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엽관제(spoils system)를 사용해 후원자들에게 관직을 파는 바람에 연방 정부 내에 부패와 비효율성이 크게 증가했다. 게다가 쉽게 분노하는 다혈질에 권위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했고, 연방정부의 관세 정책을 거부한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병력을 보내려 했다. 한마디로, 트럼프의 성격적, 정책적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졌던 사람이 앤드류 잭슨이다.
그렇게 문제 많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잭슨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보통 사람들(common men)"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었고, 무엇보다 잭슨이 당시 워싱턴의 엘리트 정치인들을 공격한 비엘리트 출신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는 부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고, 아이비리그 대학교를 나왔지만 미국의 엘리트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기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코트킨은 미국이 원래 그렇게 조용한 나라가 아닌데, 분열과 갈등이 비즈니스 모델인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본래 모습이 더 잘 보이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코트킨이 하려는 말은 이거다. "사람들은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미국이 어떤 기준으로 봐도 인류 역사에 존재한 가장 강력한 국가입니다." 하드 파워(hard power), 경제력, 혁신의 힘, 에너지 자원, 소프트 파워(soft power), 동맹 권력(alliance power) 등등을 모두 고려해도 인류 역사에 이 정도의 힘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
미국은 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하지만 1880년대 이래로 세계 GDP의 25%를 차지해 왔다. 22%까지 떨어진 적도 있지만, 현재는 26%이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50%까지 치솟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건 정부가 만들어 낸 결과도, 대통령이 만들어 낸 결과도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대통령들이 미국의 성장 동력을 억누르거나 저해해도 그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트럼프 정권이 미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흔들 만한 일을 벌이는 것이다. 앞으로 미국과 세계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코트킨은 현실을 직시하자고 말한다. 유럽의 힘이 감소했고, 일본의 힘이 감소한 것이지, 미국의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그렇게 힘이 감소하고 있지만, 미국의 적성국은 다르다. 러시아의 힘은 감소했다고 할 수 있어도, 중국의 힘은 커지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우방국은 미국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미국의 개입을 요구한다. 우크라이나를 NATO에 가입시키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안보 조약을 맺자 같은 요구가 결국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새로운 약속은커녕, 이미 해놓은 약속도 지키기 힘든 상황에 있다. 한때 미국은 세계 두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을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 독트린(부시 행정부의 '윈윈전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 때 이를 1.5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정도로 힘을 줄였고, 트럼프가 들어서면서 1개의 전쟁만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바꿨다. 미국은 최소 세 개의 지역(유럽, 중동, 동아시아)에서 동맹을 도와야 하는 상황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한 전쟁밖에 수행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상황을 가속화하고—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힘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이나 일본 같은 미국의 우방국이 안보에 자기 몸집에 맞는 역할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물론 트럼프가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그가 아주 나쁜 방법(푸틴의 편에 서는 일)을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세계가 가고 있는 방향에서 미국이 기존에 했던 안보 약속을 지킬 만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미국이 처한 재정적 상황은 차치하고도 그렇다.
러시아의 유일한 전략
그렇다면 러시아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스티븐 코트킨은 러시아의 장기 전략은 단 하나, '서구가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버틴다'라고 잘라 말한다. 러시아의 상황은 아주 나쁘지만, 서구 국가들의 힘이 쇠하고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면 러시아는 미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다.
서구 국가들이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두려워하는 시나리오도 그거다. 트럼프가 푸틴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코트킨은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정치 제도를 러시아의 정치 제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난 대선의 결과는 유권자들이 민주당 정권을 심판한 것이고, 앞으로도 무능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하는 정권, 제도나 경제를 망가뜨리는 정권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전쟁을 싫어하지만, 전쟁에서 패하는 것을 전쟁보다 더 싫어합니다. 따라서 지금 트럼프는 위험한 불장난을 하는 겁니다. 장기적인 추세(longer term trajectories)와 비교하면 정치는 훨씬 짧아요."

러시아를 연구하는 스티븐 코트킨은 단순히 모스크바에서 나오는 공식 발표만 읽는 게 아니라, 시그널(Signal, 텔레그램처럼 강력한 암호화를 제공하는 메신저 앱)에서 오가는 러시아인들의 일상적 대화도 읽는다. 거기에서 코트킨은 러시아 국민들이 전쟁에 질려있고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2022년 가을,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퇴각한 러시아군은 그 이후로 2년 동안 사실상 새로운 영토를 뺏지 못한 채 70만 명을 잃었습니다.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19% 정도를 빼앗은 상황에서 전선에 변화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전쟁은 아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얼마나 지속 가능하겠습니까? 러시아는 자국 병사들을 이 '고기 저미는 기계(meat grinder, 전선의 변화 없이 병사만 죽어 나가는 전쟁을 가리키는 표현)'에 계속 밀어 넣다가, 이제는 북한 군인들도 투입하고 있어요. 우크라이나의 인구가 러시아보다 적으니까 계속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겁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항복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놀랍게도 잘 버티고 있죠.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버틴다면 다른 나라들이 나서서 우크라이나에 항복을 강요했으면 하는데, 어떤 나라가 나서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푸틴은 현재 상태를 이어가면서 '제발 좀 무너져라, 제발 좀 항복해라' 하고 바라는 겁니다. 푸틴은 무한정 그렇게 할 생각이지만 러시아 사회가 그렇게 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이 말을 들은 렘닉이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어떻게 끝날까요?"하고 묻자, 코트킨은 다소 뜬금없는 대답을 했다.
"누가 이 전쟁이 끝날 거라고 하나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가지려는 싸움은 1783년, 예카테리나 2세 황제가 크름반도를 합병하면서 시작된 겁니다. 우크라이나가 전투에서 승리해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고, 러시아가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애초에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이길 거라는 생각에서 정전 협정을 맺게 정치적인 압력을 사용하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게 유리한 정전 협정을 끌어내어 국가 재건에 투자하고, 한국전쟁 후에 한국이 걸었던 방향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어야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계획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 방법 외에는 해결책이 없어요. 렘닉 편집장님과 제가 그 얘기를 3년 전부터 했잖아요?"
코트킨이 보기에 분단된 한반도처럼 분단된 우크라이나는 그나마 나은 결과물이다. 하지만 푸틴은 러시아가 빼앗은 영토는 러시아의 영향 아래 있는 나라가 세워지되, 러시아의 일부는 아닌 (가령, 북한과 비슷한 나라가 들어서는) 조건을 원하지 않는다. 푸틴이 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에게서 주권—자결권—을 빼앗고, 우크라이나가 재무장을 하는 데 제약을 두는 것이다.
"우리(서방 세계)가 원하는 건 우크라이나가 자결권을 갖고 (EU든, NATO든) 조건만 맞으면 받아주겠다는 기구에 들어갈 자유를 보장받는 겁니다. 푸틴이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어야 하는 조건이 그거죠.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협상이 그런 조건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그 작업을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코트킨이 바이든의 실책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현실주의자의 견해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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