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 사는 루시 그레코를 알게 된 건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동영상 하나 때문이다. 접근성(accessibility)이라는 개념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시각장애인이 최신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 페이스북에 포스팅했고, 꽤 많은 반응이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큰 걸 보고 우리 사회도 이제 장애인 접근성에 관심이 높아졌다고 판단하고 이걸 조금 더 공론화하고 싶어 루시 그레코에게 이메일로 대화를 하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서울신문에 'LG에 보내는 공개 편지'라는 칼럼을 썼다.

반응은 빨랐다. LG의 임원과 미국 지사 담당자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언론사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매스미디어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이었던 건 이 기업이 단순히 면피용으로 나와 루시 그레코에게 연락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정말로 해결하겠다는 자세가 보였다는 사실이다. LG의 엔지니어들이 그레코의 집을 몇 번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고 해결책을 찾고, 장애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수정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소식을 그레코 본인으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이에 관한 업데이트를 또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리고 엊그제 지금까지 LG와 작업한 내용을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업로드했다는 이메일을 그레코에게서 받았다. 아래가 바로 그 영상이다:

영상의 썸네일에서 보듯 LG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점자 스티커를 붙여주고 갔다. 물론, 이건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나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각장애인 중에는 점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레코는 점자를 읽을 수 있지만, 이 세탁기의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설계할 때부터 시각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제품 상태에서 문제를 개선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그래도 없을 때보다는 나아졌다는 게 그레코의 평가다.

그레코가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이 세탁기가 스마트폰 앱을 통해 조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서울신문의 칼럼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스마트폰은 워낙 접근성을 잘 구현했기 때문에 앱을 통한 구동만 가능하게 되면 이런 제품에도 접근성이 생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고 이 영상을 통해 배워야 할 점은 루시 그레코가 설명하는 디테일이다. 가령 LG가 Turbo Wash라는 기능 명에 트레이드 마크를 붙이는 바람에 앱이 "터보와시 트레이드 마크"라고 읽는 것, 메뉴에서 이전으로 돌아가면 설정을  다시 맨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 같은 것들. 이런 사소한 것들이 걸림돌이 되어 사용자의 시간을 잡아먹고 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이렇게 충분히 없앨 수 있는 걸림돌이 문제인지, 아니면 신체적 장애가 문제인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런 지적을 반영해서 다음에 나올 제품은 접근성이 "덧붙여진" 제품이 아니라 설계를 할 때 부터 접근성이 내재된 인터페이스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상을 모든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들이 봤으면 한다. 접근성에 대한 인식도 키울 수 있지만, 미국이 왜 인터페이스 설계에 뛰어난 건지 배울 수 있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일단 손으로 직접 만져서 ("hands-on") 사용해보고, 불편한 부분을 말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그걸 기록한 후에 개선하는 방법을 논의한다. 물론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들이 눈을 가리고 기능을 사용해보며 설계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탄생한 제품을 그레코가 사는 바람에 LG전자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접근성에 대한 벼락공부에 들어가게 된 거다.

나는 LG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