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제를 가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당선된 사람은 이전 대통령이라는 테제(these, 定)의 반테제(antithese, 反)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2012년 대선에서 호남과 수도권을 제외하고 모두 패했던 문재인의 2017년 당선은 박근혜 정부의 실패에 기인하고, 정치 경력이 지극히 짧았던 버락 오바마는 미국인들이 8년 동안의 조지 W. 부시와 네오콘에 지치지 않았다면 그렇게 혜성처럼 등장해서 당선되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신임 대통령이 전임의 반테제라고 해도 일단 당선된 후에는 다르다. 그때부터는 전임 대통령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어젠다를 추구하는 진정한 하나의 테제가 된다.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다. 조 바이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현상'을 극복하는 반테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임기가 2년이 되어가도록 여전히 트럼프의 반테제로 작동한다. 아니, 그의 임기 4년은 모두 트럼프 현상의 확산을 막고 이를 극복하는 데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지난 1일에 그가 필라델피아에서 했던 연설이다. 미국의 독립기념관에 해당하는 독립역사공원(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에서 바이든의 연설에는 "국가의 영혼을 위해 계속되는 전투(The Continued Battle for the Soul of the Nation)"라는 거창하다 못해 비장한 제목이 붙었다.

하지만 바이든의 연설을 들어보면–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위협을 생각하면–연설문의 제목은 과장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지금 민주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어도 그 근본에는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고, 이는 공정한 투표로 보장된다는 사실이 있다. 만약 어떤 후보가 객관적으로 인정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승리를 주장할 경우, 그리고 그의 거짓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 민주주의의 기초는 흔들리게 된다.

트럼프는 선거에 패한 지 2년이 되어가도록 자신이 2020년 대선에서 승리했고, 그 승리를 바이든에게 도둑 맞았다고 주장한다. 선거 감시 기구와 법원은 물론, 심지어 자식과 충복에 가까운 측근도 트럼프의 주장을 믿지 않지만 공화당 지지자의 70%가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 이겼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게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그뿐 아니라 트럼프는 자신의 거짓 주장을 믿고 선거 결과를 승인하는 절차를 막기 위해 연방 의회 건물에 침입한 폭도(insurrectionists)를 지금도 찬양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재판을 받고 형이 언도된 이들에게 "내가 대통령이 되면 모두 사면시켜 주겠다"라고 공언하고 있다. 선거 제도뿐 아니라 기초적인 사법 제도까지 부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말을 믿는 미국인들이 많다는 데 있다. 미국은 한국이나 일본은 물론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도 상상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미국이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와 싸웠던 2차 세계대전 전에도, 후에도 미국에서는 나치주의자들이 당당하게 집회를 가졌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세력을 키울 준비가 되어있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1934년 '신독일의 친구들' 집회 모습 (이미지 출처: Mashable)
1965년 미국 나치당의 조지 링컨 록웰의 기자 회견 (이미지 출처: The Guardian)

따라서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국민 간의 합의로 인한 결과라기보다는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우위를 유지한 결과로 보는 것이 맞다. 이런 싸움은 대개 국민들이 특별히 눈치 채지 못하는 물밑에서 일어나지만 때로는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9월 1일 조 바이든이 특별히 대국민 연설을 한 것은 이 싸움이 더 이상 정치권이나 연방 수사기관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민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싸움에 동참해야 한다는 호소였다.

제2의 남북전쟁

미국의 국가, 특히 연방정부와 그 제도를 부정하려는 시도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물론 남북전쟁이다. 이 전쟁을 미국에서는 내전(civil war)을 대문자로 표기해 (American) Civil War라 부른다. 외적이 주도한 것이 아닌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분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현대사를 들여다보면, 그리고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지역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남북전쟁 때 패했던 지역, 혹은 그 정서와 사고방식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모이는 곳에 꼭 등장하는 남부연합군(Confederate Army)의 깃발이 이런 정서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아래의 깃발은 남부연합군이 사용한 것이 아니지만,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연방정부'로 상징되는 북부 정서, 좀 더 정확하게는 대도시와 해안지역 엘리트("Coastal Elite")에 대한 반대 의사 표명이다. 그게 노예 제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인종차별적 깃발에 끌리는 이유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남부군의 깃발로 생각하고 흔드는 이 깃발은 사실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이 사용한 게 아니다. (이미지 출처: NPR)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다가올 싸움"에 대비해 총과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때로는 민주당 주지사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미국에 두 번째 내전(남북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라고 걱정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약 1/3이  10년 내에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 중 연방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았던 것은 남북전쟁이 일어난 1800년대 중반 이후로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내전이 일어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가령 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우선 내전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19세기 중반처럼 주, 도시 등의 지자체/공공기관이 아니라 단순한 개인이나 사조직들이다. 이는 정식 군대를 동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정부가 두려워 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탱크가 어떤 무기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어느 코미디언의 말처럼 시위대가 아무리 많이 모여 자동소총으로 무장한다고 한들 세계 최강 미국의 정부군을 상대하는 건 어림도 없다.

또 다른 걸림돌은 지역이다. 아무리 미국 남부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모여있다고 해도 남부에서 각 주 전체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지지한다고 해도 연방에 반대해서 독립을 외칠 것도 아니다. 어제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이 1일 연설에서 공격한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의 구호) 공화당 지지자들"의 정확한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산출한 기사를 발행했는데, 미국 인구의 약 10%가 이런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이 기사의 결론이었다. 이 정도의 숫자가 전국에 흩어져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이 아무리 단결한다고 한들 남북전쟁 때처럼 여러 주가 단결해서 연방정부에 반대, 독립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미국 사회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봐도 될까? 그렇지 않다. 근래 들어 많은 전문가들이 1995년 4월 19일에 있었던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씨티(Oklahoma City, 줄여서 OKC) 폭탄 테러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테러방지 혁신, 기술, 교육센터를 이끄는 지나 라이곤(Gina Ligon)은 최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미 연방수사국(FBI)에 무기를 소지한 채 침입하려다 사살된 인물이 온라인에 남긴 말을 분석하면서 오클라호마씨티 테러 사건의 범인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 같은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티모시 맥베이는 누구이고, 1995년 4월 19일에 오클라호마씨티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OKC의 유령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