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주 후면 9/11 테러가 20주년을 맞는다. 뉴욕과 워싱턴 DC, 펜실베이니아에서 동시에 일어난 테러 사건으로 2,977명이 목숨을 잃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정치, 외교에서 21세기는 이때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미국 사회를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특히 '쌍둥이 빌딩(Twin Tower)'으로 불리는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센터 빌딩의 붕괴는 TV로 생중계되어서 시각적인 충격이 컸다.

방송용 카메라는 이 장면을 멀리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빌딩이 불에 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쳤지만, 테러가 일어난 후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빌딩이 아직 불에 타고 있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빌딩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워낙 고층 빌딩이다보니 사람들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 소리가 엄청난 폭음을 냈다고 한다. 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연이어 들리는 폭음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곧 그 소리의 원인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언론에서 그렇게 떨어진 사람들이 빌딩에서 튕겨 나왔거나, 이미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이 떨어진 것으로 추측했었다.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기자 리처드 드루는 'Falling Man'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떨어지는 사람의 신원을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람의 자세는 죽을 것을 알고 자발적으로 뛰어내린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클로즈업 영상을 통해 실제로 사람들이 불타는 층의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망원경이나 카메라로 그 장면을 본 사람들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살기 위해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죽는 방법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탈출이 불가능한 건물에서 불에 타서 고통을 당하며 죽느니 뛰어내려서 단번에 죽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 사진을 입수한 후에도 충격을 받을 유족들 때문에 보도를 망설였고, 보도한 후에도 선정적인 보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로부터 6년 후인 2007년에 나와서 큰 히트를 했던 TV 시리즈 '매드맨(Mad Men)'은 인트로 영상에서 이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한 그래픽을 사용해서 관심과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카불 공항 활주로의 난민

미군이 철수 중인 아프가니스탄 카불 국제 공항은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닌 상황이라고 한다. 우선 미국인들의 철수도 8월 31일이라는 기한이 빠듯하게 진행 중인데, 아프간 난민 수만 명도 함께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바이든은 군 수송기는 물론 미국의 항공사들의 비행기를 동원해서 이들을 실어나르고 있고 (그 바람에 이들이 도착하는 워싱턴 덜레스 공항은 엄청난 혼잡과 지체가 일어나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항공기를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탈레반의 방해로 공항으로의 접근이 어렵다는 것, 그리고 공항에 간다고 해서 아무나 비행기에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항 주변은 인파가 몰려서 엄청난 교통혼잡이 발생했고, 아프간 사람들의 탈출을 싫어하는 탈레반과 극렬 이슬람 테러 세력이 길에 모인 이들을 공격한다는 첩보가 알려진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 두 건의 폭탄 테러가 발생해서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탈레반 치하에서 겪을 일이 두려운 사람들은 더더욱 다급해진다. 지난 글 'Yankee Goes Home'에서는 이미 문을 닫고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는 미군의 수송기에 위험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 높이 이륙한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떨어지는 장면을 소개했다.

이 끔찍한 영상을 보면서 처음에는 '왜 저렇게 위험한 행동을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9/11 테러의 희생자들이 선택했던 행동이 떠올랐고, 지금 많은 아프간인의 심정이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한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연을 알고 싶었다. 그냥 아프간 국민들의 여론이 아니라, 저 비행기에 매달려서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져 사망한 사람들 개개인이 어떤 사연을 갖고 있고 어떤 심정이었는지 궁금했다. "한 명이 죽는 건 비극이지만, 백만 명이 죽으면 통계"라는 스탈린의 말처럼 많은 사람의 희생은 우리의 감각을 무뎌지게 하고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나는 비행기에서 떨어진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Afghanistan's Falling Man

그런데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그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사진과 함께 사연을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을 공유하고 싶어 이 기사 전문을 번역해서 소개한다.


"미군 비행기에서 떨어진 17세의 축구 스타"라는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 제목

수백 명의 아프간 사람들이 140톤짜리 미 공군 수송기에 기어오르기 위해 하미드 카자이 국제공항의 활주로에 몰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활주로에서 몰아내기 위해 두 대의 아파치 헬리콥터가 낮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녹색 튜닉(tunic)을 입은 17세의 자키 안와리가 가득 모인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 비행기의 랜딩 기어 위로 기어올랐다. 안와리는 시속 19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비행기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 일이 있기 몇 시간 전인 그날 아침, 고등학교 졸업반이자 아프가니스탄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공격형 미드필더인 안와리는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한 후에 맞이한 첫날이었다. 안와리는 형에게 자신이 지금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지 않으면 다시는 축구를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가지 마. 집으로 돌아가. 너는 똑똑하잖아. 가지 마." 형 자키르가 말했다.

안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도는 해봐야 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다음에 일어난 일을 영상을 통해 지켜봤다. 20년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미국이 철수하면서 벌어진 대혼란은 그 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9/11 테러 공격과 기분 나쁠 만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C-17 글로브마스터 III 수송기가 카불의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순간 안와리는 땅으로 떨어졌다.

조종실에서 승무원들은 비행기를 둘러싼 군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륙해야 한다는 결정을 짧은 순간 안에 내렸다. 볼을 절대 뺏기지 않아서 "방패"라는 별명을 가진 안와리는 비행기에 붙어있을 수 없었다.

"저기 사람들이 떨어진다." 활주로에서 촬영된 영상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맙소사." 활주로에 있던 사람들은 실루엣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쪽으로 달려갔다.

구호단체들에 따르면 그날 안와리 외에도 최소한 두 명의 젊은이가 죽었다. 한 사람은 안와리가 떨어진 것과 비슷한 시점에 같은 비행기에서 떨어졌고, 한 사람은 동체 안으로 접히는 랜딩기어에 끼어서 사망했다. 그 수송기를 붙들고 있던 다른 몇 명의 젊은이들도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뛰어내리지 않았더라면 안와리와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탈레반의 지배를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가속도가 붙는 군용 제트기라도 붙들 만큼 공포에 빠져 있었다.

카불에 사는 시인인 샤피카 크팔와크는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무너진 건 카불만이 아니다. 진보적인 아프가니스탄을 믿었고, 그런 나라를 위해 일했고, 세계를 신뢰했고, 더 밝은 미래를 희망했던 한 세대가 무너진 것이다."

다음은 안와리의 친구들과 가족, 안와리에게 일어난 일을 지켜본 목격자들, 군 항공 전문가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현장을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분석해서 재구성한 내용이다.

미 공군은 성명문을 통해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앞으로 같은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3천 8백만 명의 아프간 인구의 대다수는 과거 탈레반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17세의 안와리와 그의 친구들은 카불에서 그들의 부모는 상상도 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탈레반이 경멸하는 축구는 아프가니스탄이 세계의 일원으로 재진입한 상징과도 같았다. 카불이나 쿤두즈, 칸다하르 같은 도시에서 남녀학생들은 바다 건너 바르셀로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같은 축구클럽들에 열광했다.

축구 연습 중에 안와리(오른쪽)가 친구와 찍은 사진

안와리는 자신의 실력으로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 미드필더가 되었다. 그런 안와리가 뛰던 스타디움은 한때 검은 터번을 두른 탈레반이 공개처형을 시행하던 장소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고, 돌을 던지고, 총을 쏘아 처형했고 절도범의 팔을 잘라 축구 골대에 걸어두곤 했다.

그런 탈레반이 돌아오자 안와리는 다른 엘리트 선수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 했다. 하지만 탈레반 병력이 길을 막았고, 탈출하려던 축구선수들은 군중 속에서 폭행을 당했다. 탈레반이 집까지 찾아왔다는 선수들도 있었다. 지난 화요일 운동선수들의 조합인 국제 프로축구인협회는 77명의 아프간 여자선수들과 그들의 가족을 도와 항공편을 통해 호주로 탈출시켰다고 밝혔다.  

안와리는 자신의 힘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이달 초 탈레반 세력이 수도 카불로 빠르게 진격해오자 안와리는 앞으로 할 일을 가족과 상의했다. 안와리의 친구에 따르면 점심으로 소고기와 밥을 먹으면서 가족 중 하나가 "우리 모두 떠나야 한다"라고 하자, 안와리는 가족에게 "탈레반이 오면 나는 이 나라를 떠나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안와리는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이 탈레반을 몰아낸 지 2년 후에 카불에서 태어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새 헌법이 만들어지고 선거가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그가 태어난 카불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리버럴한 도시였고, 그의 삶은 아프간 사회에서 서서히 글로벌화 하는 계층의 변화를 따르고 있었다.

은퇴한 기업인의 아들로 태어난 안와리는 대통령궁 근처에 캠퍼스가 있는 엘리트 프랑스인 학교에 다녔다. 학교 축구팀의 주장을 지냈고, 2015년에는 지역 클럽에서 뛰면서 디에고 마라도나, 펠레, 그리고 그의 우상이던 메시처럼 뛰어난 선수들의 등 번호인 10번을 달았다. 안와리는 키가 크지 않은 메시를 자신의 모델로 삼아 그의 드리블과 정확한 패스 감각을 배우기 위해 유튜브 비디오를 보면서 연습했다.

안와리는 친구들과탈레반이 자신들의 부모 세대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를 공포담처럼 이야기했다. 2017년에 이르자 전쟁은 점점 더 그들의 삶 속으로 침입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탈레반 하나가 안와리가 다니던 학교 옆 교차로에서 자살폭탄을 터뜨렸고, 안와리와 친구들은 공포 속에서 몸을 피해야 했다.

그 일로 학교는 일주일 동안 휴교를 했다. 안와리의 친구 압둘라에 따르면 "자키(안와리)는 그때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한다.

2018년 안와리는 아프가니스탄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붉은색 선수복을 가방에 넣고 등교해서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안와리는 대표팀 선발 기념으로 친구들에게 햄버거를 샀어요." 친구 압둘라의 말이다.

경기 후 팀 동료와 함께 사진을 찍은 안와리(왼쪽)

안와리는 페이스북에 아프간 대표팀 선수복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자신감과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다른 포스팅에서는 비즈니스 수트를 입은 사진을 올리고 이렇게 적었다. "당신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바로 당신이다. 붓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

하지만 8월이 되면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진격하자 안와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형 자키르에게 탈레반이 승리하면 자신의 축구선수 꿈은 물론이고 다른 꿈도 모두 깨질 거라고 했다. 자키르에 따르면 "안와리는 어렸고, 탈레반을 본 적이 없어요.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탈레반이 카불의 도시 경계까지 진격한 날 밤, 안와리는 대표팀 동료인 프로탄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물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축구를 하지?"

프로탄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라고 했다.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한 다음 날인 지난 월요일 아침, 안와리는 형 자키르에게 자신은 가족의 승용차를 세차하러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57분, 안와리는 자키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비행기) 엔진의 굉음이 들렸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공항에 왔어" 하고 안와리가 말했다.

형 자키르는 동생에게 "넌 비자도 없고, 비행기 표도 없어. 집으로 와"라고 했다.

"벌써 비행기 가까이에 있어. 신을 믿을 기회야"라고 안와리가 대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군의 C-17 수송기가 장비를 싣고 하미드 카자이 국제공항의 군용구역 활주로에 착륙했다. 그보다 하루 전에 또 다른 회색의 군용기가 짐칸으로 쑤시고 들어온 아프간 사람들 823명을 탈출시킨 상황이었다.

사고 하루 전 미군 수송기는 수백 명의 아프간 사람들을 탈출시켰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더 많은 민간인이 공항으로 무단 침입해서 활주로에 모여들어 자신들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수송기가 군용 화물을 내려놓기도 전에 타국으로의 탈출을 간절하게 원하는 아프간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혼란 속에서 C-17 수송기의 조종사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비행기는 아무도 태우지 말고 즉시 카불을 벗어나야 했다.

"군용기에 대한 경비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상황을 접한 승무원들은 최대한 빨리 활주로를 벗어나기로 결정했습니다"라는 게 공군 대변인의 말이다.

승무원들은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 모두 나쁜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는 것이 퇴역한 공군 대령이자 보안 컨설팅 회사의 창업자인 세드릭 레이턴의 설명이다. "내 비행기와 승무원, 화물의 안전이 내 비행기에 매달린 사람들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지 승무원의 입장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달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겁니다."

비행기는 방향을 바꿔 활주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무장한 험비 차량들이 양쪽에서 엄호하고 있었고, 두 대의 헬리콥터가 주위를 낮게 날고 있었다. 군중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함성과 환호성을 질렀다. 수백 명의 남성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수송기의 거대한 날개와 네 개의 요란한 엔진 옆으로 모였다.

비행기가 속도를 높이는 동안 안와리는 비행기 오른쪽 날개 아래에 있는 랜딩기어로 몸을 끌어올릴 만큼의 체력이 되는 일군의 남성들 중에서도 가장 앞서 뛰었다. 그의 주변에서 사람들은 비행기의 이곳저곳을 붙들기 위해 애를 썼다. 한 사람은 앞바퀴를 지탱하는 구조물을 붙들고 있기도 했다.

한 목격자가 촬영한 영상 속에서 안와리는 비행기의 외부를 붙들고, 앞을 똑바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근육은 단단해졌고 굳은 표정으로 완전히 집중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비행기 외부에 올라탄) 사람 중에는 환호성을 지르는 군중을 향해 신이 나서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C-17 수송기가 속도를 높이자 대부분은 노력을 포기하고 활주로를 가로질러 벗어났고, 다른 사람들은 엔진 소리를 크게 내며 가속도가 붙는 비행기 옆에서 함께 뛰면서 함성을 지르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비행기를 붙들고 있던 사람 하나가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하고 소리쳤다. "바람이 세게 때릴 거야"라고 다른 사람이 경고했다. 몇몇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앉아있던 곳을 포기하고 비행기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안와리는 비행기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한두 시간 후 안와리의 형 자키르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물었다. "자키 안와리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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