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망신 당한 경찰"이라는 말이 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조롱하거나 우스운 꼴을 당하면 쉽게 자존심이 상해서 과잉단속이나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바로 "약하다"는 비난을 들은 미국 대통령이다. 20세기 중반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선 이후로 미국에서 대통령은 무조건 (특히 국제무대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미국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게 미국 대통령이 지켜야 할 첫 계명이다.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는 대국민 성명을 통해 "악행을 저지른 무리를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면서 모든 자원을 동원할 것이며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세력을 구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9/11 테러 공격으로 파괴된 펜타곤 앞에 선 조지 W. 부시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 중에 이 말을 들었던 건 2012년 리비아 벵가지 테러 때였다. 외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 이 습격을 받아 대사가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오바마는 한 해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해서 얻은 국민의 신뢰를 많이 잃었고, 이 일은 그의 임기 중 중대한 오점으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오바마의 마지막 SOTU(State of the Union) 연설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약 정의를 실현(=보복)하려는 미국의 결의, 혹은 저의 결의를 의심한다면 오사마 빈 라덴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아니면 작년에 사살된 예멘의 알카에다 지도자나, 지금은 감옥에 있는 벵가지 대사관 테러범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미국인을 공격하면 미국은 반드시 보복합니다.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미국은 오래 기억하고, 어디든 찾아갑니다(we have long memories, and our reach has no limit).”

특히 마지막 문장은 미국의 치밀하고 집요한 "정의 실현"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이 되었다.

카불 공항의 테러

8월 31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완료 시점을 앞두고 카불 국제공항에서 대혼란이 벌어지는 사이에 두 건의 폭발이 발생해서 2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다. 특히 미군 사망자가 열 명을 넘으면서 미국 언론에서는 바이든 정권의 최대 위기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 미군의 철수는 트럼프가 이미 탈레반과 합의한 내용이고, 바이든은 트럼프의 약속을 깨지 않고 지켰을 뿐이지만, 철수 과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테러 사건으로 보수진영의 비판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무능하다는 비판에 직면한 바이든은 앞서 말한 미국 대통령들의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을 반드시 추적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We will not forgive. We will not forget. We will hunt you down and make you pay)"라는 것이 바이든의 말이었다.

"Life imitates art far more than art imitates life"-Oscar Wilde

하지만 영화 '테이큰(Taken)'에서 "너희가 누구인지 모르지만..."으로 시작하는 리암 니슨의 대사와 달리 바이든은 테러범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보복 공격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목요일에 일어난 미군의 보복 공격의 대상은 탈레반이 아니었다.

미국이 응징한 것은 IS 호라산(미국언론에서는 ISIS-K라 부른다)이라는 이슬람국가(IS)의 아프가니스탄 분파였다.

탈레반의 고민

IS 호라산은 국제적인 테러 단체인 IS와 탈레반이 만난 일종의 변종에 해당한다. 2015년에 파키스탄의 탈레반에서 떨어져 나온 그룹이 IS 세력과 만나 탈레반보다 더 폭력적인 단체를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국가 간의 경계를 무시하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아우르는 영토를 만들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는 정부를 몰아낸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은 수도 카불을 함락시킨 후에 대외 홍보에 제법 신경을 써왔다. 정부에 협조했던 사람들을 보복하지 않을 것이며, 포용적(inclusive)이고 안정적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메시지를 각종 채널을 통해 발표했다. 물론 탈레반의 이런 프로파간다를 믿는 사람들은 없다. 하지만 탈레반이 그런 PR 노력을 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국가를 재건하고 운영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치하에서 여성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인권이 어떻게 무시되는지와 상관없이 국가 유지에 대한 비전은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둘 다 국제적인 골칫거리라고 해도 북한과 소말리아는 다르다.

폭탄 테러는 공항 옆 호텔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났다. 뉴욕타임즈의 사진

그런데 탈레반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도 공항에서 대형 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한 거다. 탈레반은 미국이 8월 말까지 철수를 마칠 수 있도록 보안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는데 자신들 보다 작은 테러 단체가 보란 듯 폭탄을 터뜨려 대형 참사를 내자 "탈레반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IS 호라산의 목표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국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고, 첫 번째 성공을 거둔 셈이다.

탈레반은 근본적으로 무장단체이고, 국가를 성공적으로 경영할 능력을 검증받지 못했다. 당장 미국이 철수하면 카불 공항을 정상적으로 운영한 인력이 없어서 현재 터키에 도움을 요청 중이지만 9월 이후 카불 공항은 정상적인 작동이 어려운 상태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제는 몇 주, 길어야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지배자 없는 땅

아프가니스탄은 흔히 '제국의 무덤'이라 불린다. 영국과 소련, 미국이 모두 침공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나간 땅이기 때문이다. 땅은 넓지만 험준한 지형 때문에 탱크 같은 무기를 사용하기 힘들고, 고산지대의 낮은 공기 밀도 때문에 헬기 사용도 쉽지 않아서 결국 이 지역에 들어가는 외국 군대는 아무리 강력해도 아프간 무장세력과 별로 다르지 않은 조건으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지역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대적인 중앙정부가 존재하기 힘들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의 무덤이라기보다는 강력한 지배자가 존재하기 힘든 땅이라고 보는 게 맞다. 외세가 정복하기 힘든 바로 그 이유로 스스로도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번 카불 공항 테러 사건은 바로 그 사실을 보여줬다.

미국은 탈레반을 이기지 못한 게 아니라, 나라를 세우지 못한 거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떠난 그 위치에 탈레반이 들어선 것이고, 그들은 미국과 똑같은 난관에 빠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