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조금 다른 버전이 '부정선거 음모론 비판 뒤 공화당 지도부에서 짤린 딕 체니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뉴스톱에 교차 게재되었습니다.


오늘 미국 공화당의 주류가 교체되었다.

레이건에서 조지 H.W. 부시, 조지 W. 부시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주류가 트럼프 지지자들과 그들을 두려워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새로운 세력에게 주류의 자리를 내어줬다. 리즈 체니 하원의원을 공화당 지도부에서 몰아내는 투표가 그 '이임식'이었다.

체니 의원은 조지 W. 부시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의 딸이고, 공화당 주류(였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서 트럼프에 저항해온 몇 명 남지 않은 의원 중 한 사람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트럼프에 대한 공격, 즉 "지난 선거가 부정이었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멈추라"는 말을 멈추지 않는 체니 의원이 서열 3위에 해당하는 공화당 의원총회 의장직을 박탈하기 위한 표결을 했고 축출에 성공했다. 이로써 공화당은 트럼프의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은 살아남기 힘든 당이 되었다. (이는 마치 1979년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바트당을 장악하는 모습을 연상시키지만, 이는 이미 2015년 부터 슬로모션처럼 진행되어 온 일이다).

리즈 체니의 연설

이들의 체니 의원 제거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해 들어 이미 한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무기명 투표라는 이점 때문에 리즈 체니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 의원들이 체니 축출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체니 의원은 트럼프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공화당 의원들은 그가 당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이유로 지도부에서 몰아내기로 한 것이다. 공화당 의원들은 체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고, 일부는 그 주장에 동의하겠지만 계속해서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공화당의 지지기반을 소외시키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리즈 체니는 왜 계속해서 트럼프를 공격했을까? 트럼프가 지금까지도 작년 11월 선거 얘기를 하면서 자신이 선거에서 이겼다고 말하고 있고, 그 결과 지금도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의 60%가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겼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리즈 체니가 표결을 하루 앞둔 어제 공화당 의원들 앞에서 한 연설의 핵심은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략) 선거는 끝났습니다. 이것은 법의 결정입니다. 이것은 우리 헌법이 정한 절차입니다.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사람들은 헌법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원들)의 임무는 분명합니다. (의원의) 맹세를 한 우리 모두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The election is over. That is the rule of law. That is our constitutional process. Those who refuse to accept the rulings of our courts are at war with the Constitution. Our duty is clear. Every one of us who has sworn the oath must act to prevent the unraveling of our democracy.
(중략) 이것은 정책의 문제가 아니고, 정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미국인으로서 우리의 임무에 관한 문제입니다. 침묵을 지키고 거짓말을 무시하는 행위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줍니다. 저는 이 일에 동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우리 당이 법의 지배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전직 대통령의 공격에 동참하는 것을 아무 말없이 뒷짐지고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This is not about policy. This is not about partisanship. This is about our duty as Americans. Remaining silent and ignoring the lie emboldens the liar. I will not participate in that. I will not sit back and watch in silence, while others lead our party down a path that abandons the rule of law and joins the former president's crusade to undermine our democracy.
(중략) 저희가 한 맹세의 핵심은 이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보다) 국가를 더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국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치를 넘어 국가를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을 다해 헌법을 수호하고, 많은 사람들의 피로 얻어진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지키는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This is at the heart of what our oath requires, that we love our country more. That we love her so much that we will stand above politics to defend her. That we will do everything in our power to protect our Constitution and our freedom that has been paid for by the blood of so many. We must love America so much that we will never yield in her defense. That is our duty."

국가와 헌법을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체니의 주장은 당이나 개인의 이익을 넘어 국가를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해야 할 연설의 정석같은 내용이다. 물론 대다수의 공화당원들은 체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거나, 자신이 체니 의원을 몰아내려는 이유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렇다고 체니 의원이 당적을 뺏긴다거나 의원직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지도부에서 밀려난 것 뿐이지만, 2년 마다 돌아오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지역구인 와이오밍주(워낙 인구가 적은 주라서 연방 하원의원은 한 명 뿐이다)가 트럼프 지지자들이 많은 주이기 때문이다. 이미 주의회에서는 지난 2월에 체니 의원을 압도적인 표결로 징계(censure)했다.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정치를 포기했거나 밀려났고, 남아있는 정치인들은 (테드 크루즈나 미치 매코널, 린지 그레이엄처럼) 트럼프에 적극 동조하거나 입을 다물고 몸을 사리는 상황에서 체니의 지도부 퇴장은 네오콘 중심의 전통적인 공화당을 지키려는 올드 가드(old guard)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누가 트럼프를 키웠을까?

하지만 리즈 체니 의원이 이런 공화당의 운명에 떳떳할까? 그는 정말로 국가와 헌법을 당파적 이익보다 앞세워 온 훌륭한 정치인일까?

트럼프는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오바마는 케냐인이기 때문에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다"는 소위 버서(birther) 운동을 기반으로 지지자를 모았다. (오바마가 트럼프를 디스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2011년 백악관출입기자단 만찬 때의 농담은 오바마 당선 이후 극우백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인종주의적인 가짜뉴스에 편승한 트럼프에 대한 조롱이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바마의 케냐 국적설은 '평평한 지구론' 수준의 형편없는 음모론임을 알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은 오바마 공격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이런 주장을 방조하거나 반대를 거부하는 침묵을 통해 거들었다.

그랬던 공화당원 중 하나가 바로 리즈 체니다. 2009년, CNN의 래리 킹 인터뷰에 등장한 체니는 버서운동을 하는 세력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겠느냐는 킹의 질문에 끝까지 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려서 비판을 받았다. 바로 그 버서운동이 자라서 트럼프의 주요 지지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제 공화당 의원들 앞에서 체니가 했던 "침묵을 지키고 거짓말을 무시하는 행위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줍니다"라는 연설은 12년 전의 자신에게 했어야 할 말이다.

그 뿐 아니라 뉴욕타임즈는 2019년 기사에서 리즈 체니가 (같은 공화당의) 랜드 폴 상원의원과 누가 더 트럼프적인지("Who's Trumpier")를 두고 말싸움을 벌였다는 기사를 실었고, 애틀랜틱은 오늘의 공화당 원내 투표를 앞두고 체니 의원은 "자신이 키운 공화당 내 독재세력과 싸우고 있다"고 적절하게 비꼬았다.

이제 공화당은 급진 우경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은 전통적인 민주국가의 정당의 외양을 지킬지 모르지만 방향을 꺾을 핸들과 제동을 걸 브레이크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차선을 넘을 폭주를 막을 방법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잘못을 지적할 자격이 있는 공화당 의원은 (적어도 살아있는 의원들 중에는) 없다. 그들 스스로 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