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우리는 뭘 하든지 가장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업이다. 비록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미국 대도시에서, 대개는 가장 눈에 띄는(=비싼) 위치에 설치된 애플의 대형 옥외광고판들이 그렇다. 샌프란시스코를 관통해서 실리콘밸리로 이어지는 I-280 고속도로 주변에는 테크기업들의 대형 광고판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애플의 광고는 항상 '튄다.'

하지만 여기에서 '튄다'는 건 시각적으로 요란한 광고라는 뜻이 아니다. 복잡한 도시, 현란한 빌딩과 조명이 많은 도시에서 요란한 비주얼은 오히려 배경에 묻히기 쉽다. 그런데 온통 요란한 광고들 사이에서 짧은 광고 문구 한 줄이 들어간 심플한 흑백 이미지가 있다면 '튄다.' 애플이 잘 하는 게 그거다. 가장 최신의 기능이 아니라, 가장 잘 작동하는 기능을 넣는 것 말이다.

어제는 뉴저지에서 뉴욕시로 들어가는 링컨 터널의 입구에 설치된 애플의 옥외광고를 보게 되었다. 링컨 터널 서쪽(뉴저지) 입구에는 똑같은 사이즈의 대형 광고판이 세 개 설치되어 있다. 워낙 정체가 일상화된 지점이기 때문에 그 앞에 늘어선 차들은 꼼짝없이 광고를 봐야 하는, 단가가 높은 광고판이다. 그곳에 애플이 광고판을 세웠다. 메시지는 '아이폰=개인정보 보호'다.

"Privacy. That's iPhone."

그런데 "좋은 목수는 장롱의 보이지 않는 뒤판에도 싸구려 합판을 쓰지 않는다"라는 아버지의 교훈을 따라서 사용자가 보지 않는 제품의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썼던 스티브 잡스의 정신은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광고판에도 잘 스며들어 있다.

이 광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프라이버시, 즉 개인정보보호라는 애플의 메시지다. 거울 앞에서 셀카를 찍을 때 자신의 헤어스타일과 옷만으로 강조하고 얼굴을 숨기고 싶은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폰으로 얼굴 가리기'를 광고 모델들에게 적용해서 프라이버시를 강조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애플 아이폰의 아이덴티티가 정면에 드러나기 때문에 이 구도는 두 개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 있다. 이 옥외 디스플레이 광고와 함께 나온 광고 영상은 아주 설득력 있다.

애플이 광고 모델의 얼굴을 가리고 제품의 로고를 정면에 내세운 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몇 해 전 "Behind the Mac" 캠페인에서는 맥 너머에 있는 창작자에 (카메라와 메시지의)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번에는 모델의 정체(혹은 얼굴이라는 개인정보)는 완전히 가렸다.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 다양성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델의 '정체성'이 숨겨진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모델의 정체성은 더 강조되었고, 사실 여기에 이 광고의 또 다른 메시지인 '다양성'이 숨어있다. 얼굴은 가려졌지만, 피부색과 옷, 헤어스타일 등으로 인종과 성별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렇게 드러나는 정체성은 아주 구체적이고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애플의 홍보를 책임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광고를 제작하는 실무진에서 링컨 터널 위에 있는 대형 광고판 세 개에 들어갈 문구와 컨셉을 정해왔다.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걸 만든 실무진에서 모델을 결정하지 못했다면서 어떤 나이/인종/성별을 가진 사람을 모델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CEO인 팀 쿡은 2014년에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애플은 다양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니 홍보 책임자인 당신은 모델 세 명을 통해 최소한 이 광고를 보게 될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어떻게 고르면 좋을까?

그 고민을 한 후에 맨 위의 사진을 보면 처음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첫째, 인종은 왼쪽부터 백인, 흑인, 아시아인으로 세 인종을 선택했다. 물론 네 명이었으면 라틴계도 들어갔겠지만, 짙은 색("Black & Brown") 피부를 가진 인종으로 그렇게 선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별은 여성 두 명에 남성 한 명이다. 물론 남성 둘에 여성 한 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여성이 마지못해 형식상 끼워준 토크니즘(tokenism)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세 명을 사용할 때는 여성을 두 명으로 넣는 것이 안전하고 (한국의 조직들이 따르지 않는) 세계적인 추세다.

나이는 젊은 편에 속하는 사람 두 명과 상대적으로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 한 명(왼쪽의 백인 여성)을 사용했다. 물론 회색의 머리카락은 염색일 수도 있는데, (나이를 숨길 수 없다는) 손등을 보면 아무래도 중년으로 보인다. 맨 왼쪽의 여성도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피부만 보면 백인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아시아계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일직선의 앞머리(bang)로 인종을 살짝 드러냈다. 세심하게 뽑았을 뿐 아니라, 그걸 드러내는 방법도 세심하다.

좀 더 들어가 보자. 좌우 두 명은 오른손잡이, 가운데는 왼손잡이다. 설마 이것까지 신경 썼을까? 물론이다. 이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왼손잡이인 남성의 손에는 결혼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결혼반지가 있다. 남성의 손에 있는 결혼반지가 있는 것과 여성의 손에 결혼반지가 있는 건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지만, 광고 속 여성에게 결혼반지를 끼우는 것은 광고 제작자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성은 결혼해야 온전한 성인'이라는 오래된 인류의 성차별적 관념을 무의식중에라도 떠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명 중 최소한 한 명은 결혼한 사람을 넣으려고 했다면 남성을 결혼한 사람으로 설정하는 게 좋다.

인종차별의 상징, 미국의 흑인 남성

그런데 그렇게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남성은 흑인이다. 왜 그랬을까? 미디어에서 흑인 남성을 사용할 때는 항상 빠지기 쉬운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젊고,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은 있는데 팽개쳤고, 마약에 빠져있고, 죄를 짓고 감옥에서 형을 살았거나 살고 있고.. 물론 미국에서 흑인 남성이 평생을 살면서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30%가 넘는다고 하지만, 이런 스테레오타입 때문에 경찰들은 흑인만 표적 수사를 해서 악착같이 체포하는 나쁜 문화가 미국 경찰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경찰이 아무 차량이나 일정 시간을 따라다니면 반드시 교통위반을 잡아낼 수 있다는 말처럼, 사회에서 한 집단의 사람들을 탈탈 털어내면 얼마든지 그들을 감옥에 보낼 수 있다.

미국 사회는 지금 이런 오랜 불의를 바로 잡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BLM운동 부터 시작해서 경찰개혁, 경제적 배상까지 다방한 층위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하지만 흑인 남성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 지적하는 P&G의 공익광고를 한번 보자. 특히 0:32 지점을 눈여겨보길 바란다:

가게에 들어온 십 대 흑인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러 온 것이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젊은 흑인 남성은 도둑/강도다, 라는 편견을 지적하고 깨는 것이 이 영상의 내용이다. 그런데 0:32에 등장한 장면은 언뜻 보면 흑인 남성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인이 아니라면 그냥 '만삭의 흑인 여성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서 있다'고 인식하겠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이 아이들의 아빠는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달아난 흑인 남성"이라는 오래된 편견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광고 후반부에 이 집의 아빠가 주차장에서 미니밴을 아내와 아이들 옆으로 몰고 오는 장면이 바로 편견 부수기이다.

자, 다시 애플 광고 속 젊은 흑인 남성의 결혼반지를 보라. 이 광고를 만든 사람은 자신이 뭘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 게다가 흑인 남성은 다른 옷도 아닌 그 악명 높은 후드티를 입고 있다. '후드티를 젊은 흑인 남성=가난한 범죄자'라는 스테레오타입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P&G의 광고가 노리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후드티는 핑크색으로, 다른 두 인물이 입은 녹색, 흰색의 옷을 함께 보면 최근 애플이 사용하는 색채배합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거다).

이렇게 해서 애플의 옥외광고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면 "설마 사람들이 저 광고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다 하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보면서 내가 속한 집단인지 아닌지를 무의식적으로 구분한다. (미국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흑인들은 광고 속 인종 다양성을 통해 브랜드의 선호도를 결정한다는 연구도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일 수록 이런 감각이 발달해있고,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관찰과 안전 여부에 대한 계산이 진행된다.

위에서 다양성이 애플 광고의 숨겨진 또 다른 메시지라고 했지만 사실 이런 메시지를 시그널링하는 시절은 끝나고 이제는 당연히 해야 할 기본적인 체크 사항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