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넷플릭스에서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못 본다. 바빠서 짬을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열심히 보던 시절에 내가 바쁘지 않아서 그렇게 많이 보고, 시리즈를 마라톤 할 수 있었을까. 그보다는 영화에 대한 나의 관심이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보다가 깜빡 조는 일이 잦아졌고, 아까운 영화를 졸면서 보기 싫어서 나중에 볼 생각으로 멈추다 보니 2시간 좀 넘는 영화를 나도 보르게 40분씩 나눠보고 있었다.

요즘 넷플릭스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있다. 여전히 좋은 작품들은 많은데 워낙 좋은 콘텐츠가 넘쳐나기 때문에 넷플릭스의 콘텐츠가 뻔해 보이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넷플릭스의 영화들이 시시해진 건지는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경험한 콘텐츠의 총량이 참을성을 줄어들게 만든다. 가령 '해리포터' 시리즈는 성인 중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10대 초반의 아이들이 주요 독자층이다. 내가 '해리포터'의 책이나 영화를 보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 작품에 등장하는 플롯과 인물, 대화에 감동할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디선가는 한 번쯤 본 것들이다. 그래서 성인들이 청소년용 작품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익숙한 플롯이나 뻔한 대사가 가득한 영화를 보는 뇌는 자극을 받지 못하고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는 게 나의 변명이자, 가설이다.

그런 나의 가설을 증명해준 것이 HBO가 내놓은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Mare of Easttown'이다. 이 시리즈가 재미있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에서 듣고 딱 1편만 보기로 했는데, 나는 그날 해야 할 일을 모두 미루고 7시간 넘는 마라톤을 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시리즈 마라톤을 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제는 시리즈 마라톤을 할 체력도, 정성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리즈를 끝내고 깨달은 건, 단지 내가 가진 '좋은 영화'에 대한 기준이 높아졌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완전체 배우 케이트 윈슬릿

연기를 예술이라고 부르고, 연기자를 예술가로 대우하는 게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화, 드라마의 대본을 한 번 보면 생각이 바뀐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 명작 영화도 대본은 아주 짧고 단순해 보인다. 책과 비교하면 페이지가 텅 비어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 텅 빈 페이지를 채워 넣는 건 감독을 비롯해 각 파트를 담당한 사람들의 상상력이다. 대본에 적힌 대사와 지문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배우의 연기다.

가령 이 대화를 보자. 남편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있던 어머니와 그의 딸(메어) 사이의 대화다. 딸은 자신이 어릴 때 엄마가 자신에게 무섭게 대했다고 기억한다.

엄마: "나는 화가 났었다...(한숨)...네 아버지는 알고 보니 내가 결혼할 때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그리고, 나는 내가 니 아빠의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그 분노의 상당 부분을 네게 쏟아부었어. 메어야, 미안하다. I was angry… (SIGHS) …that your father wasn’t the person I thought I’d married, and, uh, I was angry that I couldn’t fix him, and, uh, took a lot of that out on you. I’m sorry, Mare."
메어: "음... 용서할게요, 엄마. Well… I forgive you, Mom."
엄마: "좋아. 나도 오래전에 나를 용서했으니까. Good. Because I forgave myself a long time ago."
메어: "엄마. Mom."

대사만 보면 딸은 이제야 엄마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엄마는 자신을 이미 용서했다고 말하는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다소 뻔뻔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마지막 두 줄은 두 사람이 함께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왜일까?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두 사람의 연기를 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그게 배우의 역할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브래드 잉글스비와 감독인 크레이그 조벨은 인터뷰에서 케이트 윈슬릿이 영화 촬영 중에 대본을 즉흥적으로 수정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는 데 동의했단다. 그뿐 아니라, 후작업으로 자신의 얼굴의 주름을 없애거나 더 날씬하게 보정한 것들을 전부 되돌려놓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케이트 윈슬릿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이런 설명이 필요없다. 영화를 보는 순간 이 영화는 윈슬릿의 영화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작가도, 감독도, 촬영도, 조연들도 다 뛰어나지만 전부 윈슬릿의 손길이 닿은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안다.

펜실베이니아

이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타운인 '이스트타운Easttown'은 허구다. 그 이름을 가진 타운은 펜실베이니아에 존재하지만, 이 영화 속 이스트타운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가상의 타운이다. 나는 이 드라마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보기 시작했지만, 제목과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만 보고도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동네임을 알 수 있었을 만큼 펜실베이니아의 냄새가 가득하다.

제작진은 배우들의 말투부터 옷차림까지 완벽하게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발음이야 헐리우드에서 일하는 지역별 억양에 통달한 발음 코치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지만, 옷차림은 정말 신기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주별로 눈에 띄게 다른 차림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을 사는 매장도 다들 거기서 거기인데도, 영화 속 인물들이 입는 옷을 보는 순간 '아, 정말 익숙한 모습이다'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이 즐겨찾는 다소 촌스런 이름의 주유소 체인 '와와Wawa'에서 물건을 사는 (와와 주유소들은 유난히 크다. 커피, 도넛 등등을 파는 매장이 같이 있어서 기름을 넣는 동안 커피를 사는 게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다) 사람들의 모습을 찍어서 그들과 같은 옷을 찾아 배우에게 입혔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이름 중에는 제이블Zabel이라는 흔치 않은 성(姓)도 등장하는데, 나는 그 성을 가진 사람을 펜실베이니아에 살면서 처음 만나봤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볼 수 있는 옷차림이 반드시 지역 특색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 주 사람들의 말투가 텍사스나 뉴욕처럼 두드러지게 다른 것도 아니고, 제이블이라는 성이 그 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게 이 영화의 줄거리와 연기를 즐기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드라마 곳곳에서 숨은 그림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정성껏 만들어졌는지를 말해준다. 이게 HBO의 퀄리티다.

이스터에그

시리즈 마지막 편에서 케이트 윈슬릿의 남자 친구가 차를 타고 이스트타운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가이 피어스가 연기하는 남자는 유명한 책을 단 한 권 밖에 쓰지 못한 작가에 딱 어울리는 낡은 고급차를 탄다 (성공했을 때 좋은 차를 샀지만, 그 뒤로는 돈을 못벌고 있다는 얘기). 그런데 그게 무슨 차일까? 1997년식 재규어 XK8이다.

가이 피어스라는 배우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왜 이스터에그인지 안다. 피어스는 2000년에 '메멘토Memento'라는 영화로 혜성처럼 등장한 배우다. 영화는 팬과 평론가들 모두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은 걸작이었고, 피어스의 연기는 "엄청난 배우가 나타났다"고 입을 모을 만큼 뛰어났다. 물론 그전에도 'LA 컨피덴셜'(1997)로 좋은 인상을 남겼지만, 주연 남우의 가치를 드러낸 건 '메멘토'였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사실상 끝이다. 그 뒤로도 영화와 드라마에 꾸준히 등장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메멘토'에서 만큼의 "breakout performance"는 없었다. 말하자면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의 작가와 똑같은 운명의 배우인 셈이다. 그런 가이 피어스가 '메멘토'에서 타고 나온 차가 재규어 XK8이다. 이 차가 얼마나 많이 등장했으면 이 영화에서 두 명의 주인공은 가이 피어스와 XK8이라는 농담도 있었다.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는 무조건 봐야 하는 시리즈이고, HBO가 왜 존재하는지 증명해주는 영화다. 별점을 준다면,

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