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 중에는 유난히 미디어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를 인수한 알리바바의 마윈이지만, 뉴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을 인수했(다가 결국에는 토해냈)던 페이스북의 공동 창업자 크리스 휴즈도 있고, 크레이그리스트(Craigslist)의 크레이그 뉴마크처럼  (아마도 자신의 사업이 언론사의 돈줄을 끊었다는 죄책감에) 저널리즘 지원에 큰돈을 기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미디어, 특히 저널리즘 비즈니스를 자신의 두 번째 커리어로 만들다시피 할 만큼 가장 집요하게 추구하는 사람이 바로 이베이를 공동창업한 피에르 오미디아다. 2010년에 '호놀룰루 시빌 비트'라는 온라인 탐사보도 매체를 만들었고,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위키리크스 사건이 터진 후 그 사건의 주역이었던 언론인 글렌 그린월드 등과 함께 퍼스트룩 미디어First Look Media를 설립했다. 이번 주말에 소개할 웹사이트는 오미디아의 퍼스트룩 미디어가 운영하는 다큐멘터리 웹사이트인 필드오브비전Field of Vision이다.

논픽션 스토리텔링

다큐멘터리를 정의하기는 어렵지 않다. 흔히 "교육이나 역사적 기록 등의 목적으로 제작된 논픽션 동영상"을 다큐멘터리라 부른다. 하지만 그렇게 정의된 다큐멘터리는 워낙 큰 우산이라서 너무나 많고 다양한 영상을 아우른다. 당장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실제 살인사건을 다루는 트루 크라임 장르부터 자연, 과학 다큐멘터리가 금방 눈에 띈다.

문제는 이런 다큐멘터리의 경우는 사실상 흥행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극영화와 비슷한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선정주의(센세이셔널리즘)가 개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인기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없을 게 분명한 주제를 넷플릭스가 많은 돈을 들여 제작을 지원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교육이나 역사적 기록"을 목적으로 한다면 상업적 성공의 가능성과 무관하게 제작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비를 회수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제작되기 위해서는 정부나 공공영역이 지원하거나 돈이 많은 사람의 기부에 의존해야 한다. 물론 많은 사람에게서 소액의 기부를 받는 방법도 있지만, 이 경우 이미 잘 알려진 주제여야 한다는 점에서 숨겨진 스토리를 발굴하는 다큐멘터리의 목적을 충분히 커버해주지 못한다. 게다가 정부, 공공영역에서 지원할 경우 정부를 고발하는 저널리즘 성격이 강한 프로젝트들이 누락되거나, 정부에게 유리한 프로젝트에 지원이 될 경우 이익의 상충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무엇보다 세금을 사용하기 때문에 여론에 휘둘리기 쉬운, 불안한 지원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에 사명감이 있는 오미디아 같은 갑부가 제작비를 지원하고 배급까지 신경을 써주는 필드오브비전은 다큐멘터리 감독과 제작진에게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경쟁을 거쳐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실력있는 제작진, 의미 있는 주제들이 걸러진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필드오브비전의 작동방식

지난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본 사람들이라면 후보에 오른 한국의 작품이 '기생충' 외에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세월호 사건을 다룬 '부재의 기억'이다. 그런데 '부재의 기억'을 소개하는 페이지를 보면 국적이 '한국, 미국'으로 적혀있다. 제작사가 한국의 '블루버드픽처스'와 미국의 '필드오브비전' 두 군데였기 때문이다. 즉, 필드오브비전은 '부재의 기억'을 제작을 이끈 제작사이고, '부재의 기억'은 필드오브비전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작품이다.

필드오브비전이 제작을 지원하는 부문은 장편(features)단편(shorts), 둘로 나뉜다. 장편은 일반 영화와 동일한 방식으로 배급, 유통되지만, 단편은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배급된다. 가장 간단하게 보는 방법은 필드오브비전의 웹사이트에서 보는 거다. 모든 단편을 무료로 올려두었을 뿐 아니라, 회원가입 같은 절차도 없다. 하지만 이 웹사이트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건 사명감을 갖고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진들에게는 문제가 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 작품이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이 제작의 목적인데, 아무리 제작비를 지원받았다고 해도 소수의 사람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제작사인 필드오브비전이 사용하는 방법이 유명 미디어와의 파트너십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감독이 그 주제를 다루기에 적절한 매체를 (필드오브비전에서 매체의 리스트를 받는다고 한다) 골라서 그 매체의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식이다. 요즘 큰 언론매체들은 거의 대부분 웹사이트에 동영상을 모아두고 있고, 특집 기사를 내보낼 때는 그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해 웹사이트와 유튜브 등을 통해 확산시키는 일이 흔하다. 문제는 그런 영상을 신문사가 제작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고, 좋은 영상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는 것. 이때 필드오브비전이 실력있는 사람들을 선정해서 제작비를 지원하고, 심지어 팩트체크까지 꼼꼼하게 마친 작품을 가져가서 게재하라고 한다면? 매체 좋고 제작사 좋은 일일 뿐 아니라, 감독에게는 투자비도 받고 배급도 해결해주는, 그야말로 윈윈이다.

눈길을 끄는 단편들

필드오브비전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단편작들은 대개 10~30분 정도의 길이를 갖고 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두세 편씩 보기에 좋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넷플릭스가 좋아할 만한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뉴요커나 가디언, 뉴욕타임즈 웹사이트에 올라갈 만한 저널리즘 성격이 강한 다큐멘터리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특정 주제를 설명하는 좋은 기사를 읽는 기분으로 보면 좋다. (참고로 아래 소개하는 작품들은 내가 본 것 중에서 고른 것이다. 이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도 많을 거다).  

그러나 필드오브비전의 다큐멘터리도 다 동일한 전개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Libre'나 'Duterte's Hell' 같은 작품의 경우 아주 전통적인 보도형 다큐멘터리에 해당한다. 분명한 사회문제(미국 내 이민자들의 인권침해,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만들어낸 공포정치)가 개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현장을 찾아가 고발하고, 그 문제를 통계가 아닌 사람의 얼굴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런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중에서 특히 눈을 떼지 못하고 본 작품이 'Scenes From A Dry City'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벌어지는 물 부족 사태가 (아파르트헤이트는 공식적으로 끝났어도) 여전히 분리된 삶을 사는 두 계층/인종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르게 다가오는지를 충격적일 만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닐 블롬캄프의 영화 '디스트릭트 9'이 얼마나 현실적인 영화였는지 깨닫게 되는 부조리극, 아니 부조리 다큐멘터리.

필드오브비전에는 아무래도 정치적인 이슈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미국의 총기문제를 전미총기협회(NRA) 내부의 알력을 통해 전달한 'The Rifle Man'과 뉴욕주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 버펄로에서 힘을 발휘하던 트럼프의 축소판 같은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Adversary'는 짧은 시간 동안에 미국 사회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어간다. 두 작품을 보고 미국 정치에 관심이 생겼다면 'Crooked Lines'도 놓치지 마시길. (우리나라에는 게리맨더링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진) 제리맨더링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는 미국 사회의 약점과 강점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단편이 빛을 발할 때

하지만 내 생각에는 단편 다큐멘터리가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단편이라는 형식에 충실했을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부재의 기억(In The Absence)'이 훌륭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세월호의 모든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소 서두른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단순히 내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어서만은 아닐 거다. 좀 더 다듬은 장편으로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최고의 단편 다큐멘터리는 스토리, 혹은 메시지가 간결하고 그것이 영상으로 분명하게 전달되는 다큐멘터리다.

바로 'The Above'가 그런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상공에 미군이 띄운 감시용 비행선을 고발하면서 나레이션도 없이 단순히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촬영하면서 하늘 높이 끊임없이 떠있는 비행선을 촬영한 것은 정말 천재적인 선택이다. 왜냐하면 다큐멘터리는 시청자들에게는 낯선 문화를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감시라는 주제와 타문화 들여다보기,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청자들이 사는 사회를 낯선 눈으로 들여다보기 까지를 일관되고 심플한 촬영으로 모두 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가능한 좋은 주제였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Trump's Lobby'의 경우, 트럼프가 2016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의 거처인 트럼프 타워를 찾아온 정재계 인사들의 모습을 로비에서 찍은 사진을 단순하게 이어붙이기만 한 것이고, 이미 누가 당선자 트럼프를 찾아갔는지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이미지가 주는 힘, 보도사진이 주는 힘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미식축구선수들의 뇌진탕 문제를 고발하는 'Concussion Protocol' 역시 이미 잘 알려진 주제를 순전히 영상의 힘으로 파워풀하게 전달하는 뛰어난 작품.

반면 트럼프가 지으려던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고발하는 'Best Luck With The Wall'의 경우 심플하고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정작 화면에 구현되자 머릿속에 있던 것 보다 힘이 떨어지는 예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기획자/감독의 생각이 덜 익었거나,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다. 거창한 메시지를 준비한 것처럼 끌고 가다가 분명치 않고 공허한 결론을 전달하고 만 'Clowns'가 대표적이다.

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들은 메시지와 함께 내가 모르는 타문화, 혹은 내가 속한 사회에서 잘 몰랐던 하위문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선정적인 이미지들을 삭제하는 일을 하는 콘텐츠 모더레이터들을 촬영한 'Moderators'를 흥미롭게 봤다. 그들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어도 정작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선발되어서,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는지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그런데 이 사이트에서 내가 본 작품들 중에서 최고의 작품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Easter Snap'을 꼽겠다.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돼지를 잡아 털을 뽑고 팔 준비를 하는 이 작품은 정치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내용도 아니고, 전통문화를 소개하려는 것도 아니다. (경고: 게다가 죽은 동물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보기 힘들어할 사람들도 많을 거다). 하지만 미디어에 드러나지 않는 날것의 하위문화를 이렇게 생생하고 거의 시적일 만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는 뛰어난 촬영. 다큐멘터리이지만 현대미술관에서 상영할 수 있을 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