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의 작명법
• 댓글 남기기이 글은 일론 머스크와 그의 전 여친 그라임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 X Æ A-12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니 잠깐 설명을 하면 X는 미지의 변수, Æ는 사랑(愛, ai) 혹은 인공지능(AI)을 요정어(elven, 그라임스의 취향으로 보인다)로 표기한 것이고, A-12는 1960년대에 록히드사가 CIA를 위해 제작한 정찰기로, 훗날 개발된 전설적인 정찰기 SR-71 블랙버드의 원형이 되었다. 그라임스는 자신의 트윗에서 이 비행기가 머스크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비행기로, 블랙버드와 달리 무기나 방어체계는 없지만, 속도가 더 빠르다고 설명했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이 신나서 들려주는 연애 이야기만큼이나 듣기 지루한 내용이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가 여자친구의 도움 없이 지은 이름들은 재미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훨씬 더 과감하다. 테슬라 자동차의 모델명 네 개가 'sexy'를 의미하는 S, 3, X, Y라거나, 생산을 준비 중인 픽업트럭의 이름이 Cybertruck이라는 게 아니다. 테슬라가 생산하는 자동차 모델 중에서 가장 빠른 Model S Plaid 얘기다.
Plaid를 "플레이드"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대개 "플래드"라고 발음한다. 이 이름이 왜 재미있는 이름이냐 하면 우리가 흔히 "공대생들의 셔츠"라고 하는 "체크무늬 남방"의 체크무늬가 바로 플래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플래드'라는 말이 쿨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다. 판교에서 지긋지긋하게 보던 체크무늬 남방처럼 미국에서도 패션 감각 떨어지는 IT업체 엔지니어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옷이 플래드 셔츠다. 자동차 모델에 SEXY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론 머스크는 왜 가장 빠르고 섹시한 자동차에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본인이 엔지니어라서?
그렇지 않다. 머스크가 가장 빠른 모델에 Plaid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단 하나, 코미디 영화 'Spaceballs(스페이스 볼)' 때문이다. 1987년에 나온 이 영화는 '스타워즈'를 패러디한 영화로, '고스트버스터즈'(1984), '에어플레인!'(1980) 같은 영화들처럼 전형적인 1980년대식 코미디물이다. 플래드라는 단어가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로 등장했는지는 아래 영상에서 한 번 보자. 정확하게는 2:06 지점에서 플래드가 등장하지만 짧은 영상이니 전부 보기를 권한다.
즉, 광속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가면 (코미디이니 이해하자) 별빛이 길게 보이는 상태를 넘어 체크무늬로 보인다는, '스타워즈'를 패러디한 농담이다.
그런데 위의 영상을 처음부터 봤다면 테슬라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깨닫게 되었을 거다. 모델 S P100D가 가진 고속주행 모드인 '루디크러스(Ludicrous) 모드'로, 이 이름 역시 이 영화에서 나왔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비상식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를 고급 자동차의 기능에 붙인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머스크는 태연하게 그 이름을 붙였다.
'스페이스 볼(즈)'은 그 제목에 들어간 balls(남성의 고환을 지칭하는 속어)에서 보듯, 10대, 20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수준의 성적 농담이 가득한 영화다. 이 영화가 나온 1987년이면 일론 머스크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이니 이 영화를 가장 즐길 수 있던 나이였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리화나 등으로 붕 뜬 상태("high")에서 보기에 좋은 영화 리스트에 '매트릭스' '블레이드 러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과 함께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영화이기도 하니,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태연하게 마리화나를 피우는 머스크의 취향에 딱 맞는 영화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1980년대 영화 레퍼런스를 사용하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만약 그가 '에어플레인!' 같은 영화의 레퍼런스를 사용했다면 나이 든 아저씨로 취급당하기 딱 좋았을 거다. 하지만 테슬라에 루디크러스 모드가 장착되기 몇 해 전부터 영화 '스페이스 볼'이 다시 20, 30대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밈으로 소비되기도 하고, 영화의 주인공 역("다크 헬멧")을 맡은 배우 릭 모라니스의 이야기가 소셜미디어에 돌면서 '스페이스 볼'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캐나다 배우인 모라니스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무려 23년 동안 연기를 중단했다).
모든 걸 떠나서 이 영화는 지금 봐도 재미있는 영화다. 영어권에서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재미있는 작품을 "It aged well (나이가 잘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이 영화가 좋은 예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다른 테크 기업의 CEO와 달리 대중, 특히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문화를 정확하게 이해한다. 아니, 단순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문화를 공유한다고 하는 게 맞다.
터널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어서 Boring Company (boring은 '구멍 뚫기'와 '지루한'이라는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도 딱 '스페이스 볼'에 나올 법한 농담이다.
자동차 모델과 터널 회사의 이름을 이렇게 짓는 사람이 항공우주 기업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기발한 이름들이 나왔을까? 머스크는 스페이스X에서 개발하는 초대형 로켓을 BFR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그 이름이 Big Falcon Rocket의 약자라고 밝혔지만, 사람들은 머스크가 Big F**king Rocket으로 부르고 있다가 욕을 넣을 수 없어서 Falcon(매)으로 바꿨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 '스타워즈'에서 가장 유명한 우주선인 Millennium Falcon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Falcon 9 로켓이 사용하는 엔진의 이름은 멀린(Merlin)으로,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마법사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10대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던전 앤 드래곤(D&D) 게임에도 등장하고, 무엇보다 멀린은 스페이스X의 다른 엔진인 케스트렐(Kestrel), 랩터(Raptor)와 함께 맹금류의 이름이라 Falcon의 연장선에서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문학적인 이름들도 있다. 스페이스X의 로켓이 귀환하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 착륙하게 되는데, 이 배들에는 안전을 위해 사람이 타지 않는다. 그런데 머스크는 이들 배에 'Of Course I Still Love You (물론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 'Just Read the Instruction (설명서를 읽을 것)' 같은 희한한 이름을 붙였다. 그가 좋아하는 사이언스픽션 작가 이언 뱅크스의 소설 '게임의 명수(The Player of Games)'에 등장하는 지능을 갖춘 우주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고, 또 다른 배의 이름 'A Shortfall of Gravitas(진지함의 부족)' 역시 이언 뱅크스의 작품 제목이다.
더 재미있는 건 스페이스X가 우주인을 태우는 캡슐의 이름, 드래곤(Dragon)이다. 머스크는 이 이름이 '퍼프 더 매직 드래곤(Puff the Magic Dragon)'을 줄인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1960년대 인기 포크 그룹인 피터, 폴 앤 매리가 발표한 히트곡의 제목이지만, 'puff'가 연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히피문화가 성행했던 당시의 문화 속에서 이 이름은 마리화나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했다. 머스크는 한 트윗에서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가 정말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마리화나를 피우는 거냐'고 놀렸기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그가 하는 말과 작명에는 젊은 층, 특히 젊은 남성들이 좋아할 요소가 가득하다.
그 결과 일론 머스크는 방탄 인기를 얻게 되었다. 다른 대기업 CEO들이 막춤을 추면 놀림감이 되지만, 그가 추는 막춤은 큰 인기를 끈다. 사이버트럭을 발표하면서 "방탄유리"라고 자랑했다가 쇠구슬에 유리가 깨지는 망신을 당해도 팬들은 괜찮다고 웃어주고 만다.
더 중요한, 아니 더 심각한 건, 그가 이렇게 팬/팔로워/소액투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제품 출시의 약속을 번번이 어겨도, 주식시장의 전문가들이 테슬라 주식이 과대 평가되었다고 경고해도 그의 회사는 "밈 주식"이 되어 기업의 펀더멘털과 무관한 가격을 유지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한 마디에 암호화폐 시장이 출렁인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자동차에 '플래드'라는 이름을 붙여서 팔 수 있는 사람이면 다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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