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인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이 차량 폭발로 사망했다. 흔히 푸틴의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준 극우 민족주의, 파시스트 철학자로 통하는 두긴은 푸틴이 올해 초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인데 (그의 "신유라시아주의"를 쉽게 설명한 영상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아닌 그의 딸 다리아 두기나가 암살당한 것은 아버지 두긴이 평소에 타던 차가 아닌 다른 차를 운전했고 그의 차를 운전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두기나가 아버지의 사상과 무관한 인물은 아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극우 민족주의를 열심히 전파하던 인물이었다. 죽기 며칠 전만 해도 TV에 나와서 러시아군이 저지른 우크라이나 부차의 양민 학살이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했던 사람인데 다만 이번 암살의 직접적인 표적은 아니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러시아인들 사이에 꽤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이 아닌 엘리트들의 별장이 모여 있는 모스크바 교외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 주는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 정보부(FSB)가 수행한 가짜 깃발(false flag) 작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푸틴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저지른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주장은 이번 암살이 우크라이나의 소행이라는 러시아 측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 양측 모두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를 펼치는 사람을 암살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에 유리한지 푸틴에 유리한지는 아직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러시아 내에서 푸틴에 반대하는 세력이 저질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세력의 소행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주도하에 러시아 정보부가 벌인 작전으로 알려진 1999년 모스크바 아파트 폭발 사건 (이미지 출처: 뉴욕타임즈)

하지만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은 지난 2월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틀이 된다. 이달 초에 발행한 글에서 설명한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세 가지 방법'을 잠깐 다시 살펴보면, 우선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점진적 과정이 있고,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던 것처럼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포기하고 철군을 결정하는 돌연한 붕괴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틴의 실각으로 모든 일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만약 이번 암살이 우크라이나가 벌인 일이라면 최소한 위의 세 가지 방법 중 하나에 유리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우크라이나의 소행이라면 단순 보복 외에는 우크라이나에 특별히 유리할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의 미디어는 푸틴이 이미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두긴 부녀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번 전쟁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생각이 바뀔 거라고 보는 사람은 없고, 그런 암살이 일어났다고 해서 푸틴의 권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이미지를 주기도 힘들다.

반대로 푸틴의 지시를 받은 FSB가 벌인 자자극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러시아 국민을 긴장시키고 분노하게 만들어서 푸틴이 원하는 쪽으로 정책을 끌고 가거나 (일부에서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국민 동원령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최소한 현재 진행되는 전쟁에 대해 커지는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승리로 가는 방법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만약 러시아 내 푸틴 반대 세력의 소행이라면 전쟁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기는 힘들다. 푸틴이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벌인 소행, 혹은 사회불안을 키우려는 행동이었다고 보기에는 러시아가 워낙 암살에 익숙한 곳이라 그 정도로 푸틴의 권력을 흔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결국 이 역시 단순 보복성 이상의 가능성을 생각하기에는 이르다.

긴장하는 헤르손

그럼 현재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우선 전장 두 곳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돈바스 지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 다른 하나는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이다. 우선 동부 전선에서는 팽팽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서쪽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군이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양쪽 병력에게는 치열한 전투이겠지만 전선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하다.

(이미지 출처: BBC)

하지만 남부 전선은 다르다. 러시아는 2014년에 점령한 크림반도(Crimea)를 거점으로 남부의 주요 항구도시인 오데사를 공략해 몰도바(Moldova)에서 분리되어 (국제적으로는 독립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친 러시아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와 연결해 우크라이나의 흑해 접근을 막는다는 큰 그림을 갖고 있다. 개전 이후로 이를 달성하려고 애를 썼지만 오데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미콜라이우(Mykolaiv)에 주둔한 우크라이나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했고, 헤르손(Kherson)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영토를 방어하는 전쟁이었고, 이런 형세는 현재 대부분의 전선에서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런 국면에 변화가 생기려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지역이 생긴 것이다. 바로 헤르손이다.

(이미지 출처: BBC)

헤르손은 남쪽으로 흐르는 드니프로(Dnipro) 강의 서안에 위치한 도시다. (위의 BBC 지도는 이 지역을 확대해서 하구만 보여주기 때문에 강이 동서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고 헤르손은 강의 북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 헤르손은 강의 서안에 접한 것으로 설명한다.) 드니프로 강은 작은 강이 아니다. 러시아군이 대규모로 주둔한 크림반도 위쪽의 지역과 헤르손을 연결하는 다리는 세 개뿐인데 우크라이나군은 그중 가장 중요한 안토니우스키(Antonivskiy) 다리를 파괴했고, 남은 두 다리 역시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받아 사용하기 힘들 만큼 큰 손상을 입었다. 즉, 헤르손을 지켜야 하는 러시아군은 사실상 보급로가 끊긴 채 배수진(背水陣)이 된 상황이다.

이렇게 헤르손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보급로를 끊는 건 이 도시를 대대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밖에 보기 힘들고,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의 헤르손 공격이 시간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도 이를 모르지 않고, 이에 대비해 이미 2만 5,0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켜 공격에 대비하고 있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이들은 독 안에 든 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이를 독일어로 Kesselschlacht, 즉 가마솥 전투라고 부른다. 보급로를 끊고 고립된 병력을 가리키는 고립부(孤立部, pocket)도 결국 같은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량이 파괴된 상황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드니프로 강의 모습. (이미지 출처: DW)

헤르손 너머 크림반도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의 목표는 헤르손 탈환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크림반도 회복이다. 이는 절대 쉬운 목표가 아니다. 아니, 오래도록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던 것이 크림반도 회복이었다. 2014년에 러시아가 빼앗았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의 일부를 조차(임대)해 군사기지로 사용해왔다. 그 유명한, 아니 한 때 유명했던 러시아 흑해 함대의 주요 거점이 바로 크림 반도다.

그런데 어제 월스트리트 저널은 '러시아 군사력의 보루였던 크림반도가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Crimea, Once a Bastion of Russian Power, Now Reveals Its Weakness)라는 분석 기사를 냈다.

러시아가 차지한 크림반도가 불안하다고 분석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

이 기사는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러시아와 싸우는 최전방에 그치지 않고 훨씬 깊숙한 지역까지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Sevastopol)에 위치한 흑해 함대의 지휘본부까지 드론 공격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개전 이래로 러시아군의 병참과 미사일 공격 등의 작전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사용된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는 건 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달 초에는 크림반도 노보페도리우카에 있는 사키(Saki) 공군 비행장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을 받아 크림반도의 핵심 전력에 해당하는 해군 비행단이 보유한 전투기의 절반이 파괴되는 일이 있었다. 이 공격에 사용된 무기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은 분명했다. 이는 지난 4월 러시아의 미사일 순양함 모스크바(Moskva)가 피격, 침몰된 이후 크림반도의 러시아군이 입은 최대의 피해다.

크림반도의 사키 공항. 피습 전(왼쪽)과 후의 위성사진 (이미지 출처: NBC)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되찾겠다는 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여러 차례 밝힌 목표다. 하지만 이 목표는 "러시아군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우크라이나 땅에서 몰아내겠다"라는 목표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의 영역에 속하는 목표였다. 물론 당장 우크라이나군이 크림반도로 진격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방어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크림반도의 휴양지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러시아 관광객들이 줄지어 탈출하고 있다는 뉴스는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의 점령이 일시적이며 우크라이나가 돌아온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라는 젤렌스키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준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는 오스트리아 군사전문가의 말을 인용해서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반격을 할 능력은 없지만 (크림반도 내) 러시아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면서 불안감을 극대화하고 있다"라면서, 이는 러시아 지도부의 심리에 심각한 충격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우크라이나가 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선이 하나 있다. 푸틴이 "러시아(의 영토)가 공격받고 있다"라고 선언해서 총동원령을 발표할 핑계를 주는 것이다. 미국도 무기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러시아 영토는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만큼 이는 중요한 문제다. (물론 크림반도는 불법 점령이므로 러시아 영토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젤렌스키가 당장 대대적인 크림반도 공세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글 서두에서 이야기한 다리아 두기나의 암살이 푸틴의 소행일 수 있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푸틴이 전쟁을 다음 단계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그리고 좀 더 다급하게는 러시아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핑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