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글릭먼의 답장은 아래와 같다:

친애하는 슐츠 씨,
흑인 아이들을 피너츠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말씀드린 제 편지를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흥미로운 딜레마를 제기하셨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선생님의 편지를 제 흑인 친구 몇 명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이를 가진 부모인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선생님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글릭먼이 보내 두 번째 편지. 첫 편지와 달리 손으로 쓴 것이 눈에 띈다. (이미지 출처: 닐 게이먼의 Tumblr)

흑인 친구들의 의견을 구하겠다는 글릭먼의 편지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두 명의 흑인 친구들과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 부탁해서 의견을 슐츠에게 직접 전하게 했다. 그렇게 슐츠가 받게 된 편지 중 하나는 아래와 같다:

친애하는 슐츠 씨,
흑인 아이가 피너츠 만화에 들어가는 문제로 선생님께서 글릭먼 씨와 주고받으신 편지와 관련해서 아들 둘을 가진 흑인 아빠로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내려다보며 베푸는 태도(patronizing)를 염려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노력을 그런 눈으로 보는 흑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비록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그런 비난은 (흑인 아이를 만화에 포함시킴으로써) 일어날 긍정적인 결과를 위한 작은 대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인종 간의 증오가 끊임없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너츠에서 아이들이 그룹으로 등장할 때 흑인 아이 하나가 여분의 캐릭터로(supernumerary) 등장하기만 해도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제 아이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신들이 묘사되는 방식을 보는 것에 대한 저의 근심을 덜어줄 것이고, 둘째, 일상적인 풍경에서 인종 간의 우호적인 태도를 캐주얼하게 전달할 것입니다.
저는 흑인 아이의 캐릭터가 굳이 여분의 캐릭터로 등장(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 배우처럼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옮긴이)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모여있는 장면에서 흑인 아이가 끼어있게 되면 훗날 흑인 아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날이 온다면 이를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흑인이 여분의 캐릭터로 등장할 때는 대개 교도소 같은 불행한 상황이고, 흑인들이 평범하게 생활하고, 사랑하고, 걱정하고, 호텔이나 회사 건물의 로비에 들어가는 모습, 뉴욕시내를 돌아다니는 풍경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는 영화와 TV, 잡지, 만화 같은 업계에서 이렇게 묘사하는 습관은 교활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이렇게 흑인들의 의견을 직접 듣게 된 슐츠는 생각을 바꾸게 되고, 7월 1일에 해리엇 글릭먼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낸다:

친애하는 글릭먼 씨,
기뻐하실 소식이 있습니다. 7월 29일에 나오게 될 만화에서 만화에 흑인 아이를 등장시키는 문제와 관련해 제가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린 에피소드를 보시면 기쁘실 겁니다.

그렇게 해서 1968년 7월 마지막 주에 흑인 아이 프랭클린 암스트롱(Franklin Armstrong)이 데뷔하게 된다. 아래가 그 첫 장면이다. 주인공 찰리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낯선 흑인 아이가 비치볼을 들고 "이 비치볼이 네꺼냐"라고 묻는다. 찰리가 고맙다고 하자 흑인 아이는 "수영을 하고 있는데 이게 떠다니길래" 가져왔다고 말한다. 찰리는 자기 동생이 칠칠치 못하게 공을 바다에 던졌다고 말한다.

흑인 아이는 찰리와 함께 해변을 걷다가 찰리가 만든 모래성을 보고 "모래성을 만들고 있었구나"라면서 "근데 모양이 좀 이상하네"라고 한다. 그 말에 찰리는 "흠, 그런 것 같네.. 내가 우리 동네에서 일처리 똑바로 하는 걸로 유명한 편은 아니야"라고 대답한다. 찰리 브라운이 평소 어떤 캐릭터를 아는 독자라면 이 마지막 말이 웃음 포인트임을 알 거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이 장면에서 웃음의 소재가 되는 것은 흑인 아이 프랭클린이 아니라, 항상 하는 일이 어설픈 찰리 브라운이다. 프랭클린은 칠칠치 못한 찰리의 동생과 엉성한 손재주를 가진 찰리를 보여주기 위한 조연이자, 관찰자로 등장한다. 위에서 소개한 편지에서 흑인 아빠가 "아이들의 그룹 장면에서 흑인 아이를 하나만 끼워달라"라고 부탁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네 개의 말풍선을 배정받았지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찰리 브라운이다.

좀 더 미묘한 (subtle) 방법으로 전달된 메시지도 있다. 하나는 이 둘이 만난 장소가 해수욕장이라는 사실.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이 백인과 함께 수영장을 사용하는 문제로 갈등이 첨예하던 시절이다. 앞선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미스터 로저스씨의 이웃(Mr. Roger's Neighborhood)에서는 이를 백인 진행자가 흑인 경찰관과 같은 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는 장면을 사용해서 아이들에게 인종 차별을 극복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게다가 흑인 경찰관이 발을 닦을 수건이 없다고 하자 "제 수건을 쓰면 됩니다"라고 제안한다.)

슐츠가 만약 두 아이가 만나는 장소를 동네 수영장으로 설정했다면 당시 대립하고 있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할 뿐 아니라 한쪽의 편을 드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고 이는 갈등의 증폭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슐츠는 함께 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장소를 해수욕장으로 만들어 논쟁을 피했다.

이런 결정을 두고 비겁하게 우회하는 행동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 비판이 (존재한다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슐츠는 뜨거운 논쟁점을 살짝 피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백인 독자들의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고 (흑인 아빠의 제안대로)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인종 갈등 극복의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가령 위의 에피소드에서 두 번째 장면을 보면 프랭클린이 "내가 저기에서 수영하고 있었는데"라는 말이 그렇다.

미국에는 '흑인은 수영을 하지 못한다'라는 오래된 스테레오타입이 존재한다. 실제로 매 해 미국에서 익사사고로 숨지는 아이들의 숫자는 흑인이 백인의 세 배에 달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종차별의 역사가 있다. 공공 수영장에 흑인이 입장하는 것을 금하던 시절이 있었고, 대중문화는 흑인이 수영을 못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묘사했고, 이는 미국인들의 사고에 뿌리깊게 남았고, 심지어 흑인은 물에 잘 뜨지 않는다는 속설까지 생겼다. (이 역사에 관해서는 아래의 10분짜리 영상이 아주 잘 설명한다. 꼭 한 번 보시길 바란다.)

그런데 찰스 슐츠가 그린 흑인 아이 프랭클린은 등장한 첫 장면에서 "내가 저기에서 수영하고 있었는데"라고 말한다. 흑인과 백인이 같이 물에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흑인 아이도 수영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 것이다. 해리엇 글릭먼이 슐츠에게 처음 보낸 편지에서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부탁을 슐츠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이행했는지 볼 수 있다.

이런 슐츠의 세밀한 설계는 프랭클린이 등장한 두 번째, 세 번째 장면(strip)에도 등장한다. (이 세 개는 아마 3주에 걸쳐 게재되었겠지만 하나의 에피소드를 구성하고 있으니 함께 읽으면 좋다.)

두 번째 줄에서 찰리는 프랭클린에게 가족이 모두 함께 해변에 온 거냐고 묻자 프랭클린은 그렇지는 않고 "우리 아빠는 베트남에 있다"라고 한다. (이 만화가 나온 1968년은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던 때다.) 그 말을 들은 찰리는 "우리 아빠는 이발사인데, 우리 아빠도 전쟁에서 싸웠다"라면서 정확하게 무슨 전쟁인지는 모른다고 말한다.

프랭클린은 찰리에게 야구를 같이 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찰리가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 게 나의 문제"라고 하자 프랭클린은 "너 야구 잘 하니?"라고 다시 묻는다. 그 뒤에 찰리가 하는 말이 펀치라인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그 문제로 패널 토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있어." 찰리 브라운의 어설픈 운동 실력이 또 한 번 웃음의 소재가 된다.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줄의 대화를 높게 평가한다. 두 아이는 아빠가 모두 참전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피부색만 다를 뿐 서로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다. 게다가 흑인인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전쟁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흑인들도 같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사회적인 코멘트라는 것.

마지막 줄을 보자. 모래성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찰리는 프랭클린의 도움을 받아 크고 훌륭한 성을 만들 수 있었다. 흑인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나 범죄자로 묘사하던 당시 콘텐츠를 생각해보면 이 한 장면이 지닌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이 만화를 보는 아이들은 서로 다른 인종이 함께 노력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듣게 된다.

하지만 찰리가 멋진 모래성을 감상하는 동안 프랭클린의 엄마가 프랭클린을 부른다. 새로 사귄 친구가 그렇게 해변을 떠나는 것을 본 찰리는 "너 언제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갈 수 있냐고 너희 엄마에게 물어봐!"라고 소리 높여 말한다. 그리고 같이 야구도 하고 모래성도 만들자고. 그때 찰리의 여동생이 와서 "오빠 비치볼이 또 (바다에 빠져서) 하와이로 가고 있다"라고 알려주고, 찰리는 피너츠 만화를 대표하는 유명한 대사 "Oh, good grief (오, 맙소사)"를 하면서 끝난다.

'Oh, Good Grief'는 피너츠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빈스 과랄디의 유명한 앨범 제목이기도 하다. 강력 추천.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래도 흑인 아이 프랭클린 암스트롱은 토큰 블랙(token black)일까? 토큰 블랙 맞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요 인물에서 빠져 있고, 평면적인 캐릭터다. 주요 인물들은 전부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 이 만화에서 슐츠는 프랭클린을 농담의 소재로 삼는 모험을 하는 대신 평범한 조연을 맡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슐츠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기 힘들다. 글릭먼의 편지로 시작되는 프랭클린 '탄생의 비밀'을 안다면 이는 성의 없는 립서비스의 결과가 아니라 작가가 문제에 관심 있는 시민의 제안을 진지하게 듣고 흑인 부모의 부탁에 귀를 기울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피너츠 콘텐츠를 관리하는 피너츠 월드와이드는 올해부터 '암스트롱 프로젝트(The Armstrong Project)'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흑인 학생들이 많이 입학하는 것으로 유명한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의 모교이기도 하다)와 햄튼 대학교(Hampton University) 각각 10만 달러를 기부해 애니메이션과 영화, TV업계에서 일하려는 학생들에게 인턴십 기회와 멘토링을 제공하는 프로젝트인데, 글릭먼의 제안으로 탄생하게 된 프랭클린 암스트롱 캐릭터의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