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행한 글 '상식적인 남자들 ②'에서 '피너츠(Peanuts)'를 그린 만화가 찰스 슐츠가 여성 스포츠의 열렬한 옹호자였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를 공유한 페이스북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렸다:

"피너츠에 흑인 아이는 한 명만 등장해요... 그게 아쉽긴 합니다."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만화에 등장하는 흑인 아이는 단 한 명, 프랭클린 암스트롱(Franklin Armstrong)이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에서는 드라마나 영화, 만화 같은 대중문화에서는 등장인물의 구성이 실제 미국을 구성하는 인구 구성과 비슷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작가와 제작진은 자의든 타의든 이를 반영하기 위해 다양한 인종과 젠더를 포함시켜왔다.

맨 왼쪽에 등장하는 흑인 아이가 프랭클린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노력은 형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가령 백인 캐릭터들이 이끌어 가는 만화나 드라마에 대사가 많지 않은 평면적인 흑인 캐릭터를 하나 넣는 식이다. 이런 캐릭터를 미국에서는 토큰(token, 시늉에 불과한)이라 부른다. 가장 흔한 것이 '토큰 블랙(token black)'으로 마지못해 집어넣은 것처럼 보이는 흑인 캐릭터다. 아래 영화에서 토큰 블랙 캐릭터를 찾아보라. (힌트: 대개 구석에 등장한다.)

영화 '그것(It)'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
1985년 영화 '구니스(Goonies).' 때로는 아시안 같은 다른 인종이 유색인종을 대표해 흑인을 대체하기도 한다.

사실 피너츠에 등장하는 프랭클린은 아주 전형적인 토큰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인물이 아니고, 피부색을 제외하면 특별히 눈에 띌 게 없는 조연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댓글에 남겨진 "아쉽다"는 의견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그런데 이 지적에 대해 다른 분이 "(하지만) 그것도 나름 의미 있는 변화였다고 들었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이 기사의 링크와 함께. 제목은 "피너츠의 캐릭터 프랭클린이 탄생하게 된 사연(How Franklin, The Black 'Peanuts' Character, Was Born)"이다. 길지 않은 기사라 읽어보게 되었고,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관련한 내용을 좀 더 찾아 읽어 봤다. 아래는 그렇게 해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다.

참고로, 링크된 기사는 NPR의 '코드 스위치(Code Switch)'로 발행된 것. 코드 스위치는 21세기 인종문제를 20세기의 전형적인 틀과는 달리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하는 코너로 팟캐스트로도 들을 수 있다.

찰스 슐츠가 피너츠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이다. 슐츠는 이 만화를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렸으니 정확하게 반 세기를 그린 셈이다. 아래의 장면은 1950년 10월에 나온 첫 피너츠로, 주인공 찰리 브라운의 얼굴 외에는 모든 것이 낯설다. 여자 아이 패티도 지난 글에서 소개한 패퍼민트 패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캐릭터로 보인다.

오래 연재되는 만화가 흔히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체도 바뀌고,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변한다. 작가와 함께 만화도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흑인 아이 캐릭터 프랭클린이 그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요소다. 이 캐릭터는 피넛츠가 시작된 후로 18년 동안 만화에 등장한 적이 없었고, 피너츠는 등장인물 전원이 백인인 만화였다. 인종 다양성에 대한 개념이 희미했던 시절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랬던 피너츠에 흑인 아이 프랭클린이 등장하게 된 계기는 1968년 4월, 슐츠가 받은 편지 한 통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옛날 영화에 등장하는 진부한 장치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던 시절이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로스앤젤레스 교외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며 세 명의 아이를 키우던 해리엇 글릭먼(Harriet Glickman)이라는 여성이었다. 타자기로 깔끔하게 쓴 글릭먼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참고로,  킹 목사는 4월 4일에 암살 당했고 글릭먼은 편지를 4월 15일에 썼다.

친애하는 슐츠 씨,
저는 마틴 루터 킹이 세상을 떠난 후로 우리 사회에서  (킹 목사의) 암살로 이어지게 된 상황, 오해와 공포, 폭력의 바다를 만드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해리엇 글릭먼이 슐츠에게 보낸 편지 (이미지 출처: 닐 게이먼의 Tumblr)

글릭먼은 편지에서 미국 사회가 변화해서 인종 사이의 편견을 극복하게 되기까지는 한 세대가 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자라는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데" 매스미디어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 피너츠 만화가 인종 간의 우정과 관용(tolerance)을 도모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피너츠에 등장하는 아이들 사이에 흑인 아이 캐릭터를 넣는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글릭먼은 그 편지를 보내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워낙 인기 있는 만화의 작가가 자신의 편지에 답장을 할 것 같지 않았던 것.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슐츠가 테니스 스타 빌리 진 킹에게서 여성들의 스포츠를 지지해달라고 부탁받은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슐츠는 답장을 보냈다. 다만 긍정적인 답은 아니었다.

슐츠가 글릭먼의 부탁에 왜 난색을 표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슐츠가 보낸 답장은 아래와 같다:

친애하는 글릭먼 씨,
친절한 편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흑인 아이(a Negro child, 당시에는 흑인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옮긴이)를 만화에 넣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에 감사합니다만, 저는 다른 만화가들과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있습니다. 저희 만화가들은 그렇게 하고(=모두 흑인 캐릭터를 삽입하고) 싶지만, 그러면 흑인 이웃들을 내려다보는 태도로 보일 것 같아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해결책을 모르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닐 게이먼의 Tumblr)

위의 글에서 슐츠가 내려다보는 태도라는 표현은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아 번역하기 까다로운 patronizing라는 단어다. 비슷한 표현으로 condescending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혹은 "시혜/자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동등한 인간으로서 보이는 친절이 아니라 남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내려다보듯 "베푸는" 친절이고, 이는 받는 사람에게 모욕감을 준다. 약자를 배려할 때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일이 흔한 한국 문화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슐츠는 흑인 아이를 삽입하는 것이 이런 태도로 비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슐츠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 대부분의 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흑인들과 분리된 커뮤니티에서 살았고 주위에 흑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슐츠가 그린 만화 속 아이들이 모두 백인으로만 구성된 것도 결국 그게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필요로 하고 그걸 바라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절 편지의 마지막 줄이다. 사실 이 사연을 오터레터에서 긴 글로 소개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한데, 슐츠는 "I don't know what the solution is (저는 해결책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로 편지를 맺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단순한 거절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슐츠는 "해결책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대신 자신은 해결책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당장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해결 가능성까지 닫아 버린 건 아니다.

그리고 해리엇 글릭먼은 그 차이를 알아 본듯 하다. 기대하지 않던 답장을 받았고, 비록 표면적으로는 거절이었지만 슐츠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 목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릭먼은 바로 답장을 썼다. 이번에는 타자기가 아니라 직접 손으로 쓴 편지였다.


친애하는 슐츠 씨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