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제퍼슨은 노예 문제가 미국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노예제도가 미국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본인은 많은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였고, 세상을 떠난 아내의 배다른 동생인 노예 샐리 헤밍스(Sally Hemmings)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고도 자신의 아이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퍼슨 개인의 모순임과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태생적으로 가진 모순이었다.

이런 모순이 한동안 잠자고 있다가 새롭게 얻은 영토가 주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정치적 이권 다툼으로 번지며 깨어난 것이다. 1857년에 나온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판결의 배경이 미주리 타협이 이뤄진 1820년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이거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21세기 미국의 그 어떤 논쟁보다 훨씬 더 뜨거운 정치적인 배경을 가진 사건에 대해 근래에 나온 어떤 논쟁적인 판결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작년(2022년)에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1973)이 위헌이라고 결정한 미국 대법원의 판결이 지독하게 정치적 판결이라고 악명이 높지만, 미국 역사상 최악의 판결은 '드레드 스콧' 판결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대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질 때마다 결정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보수와 진보를 번갈아가며 나왔지만 양쪽 모두 사용한 표현은 "드레드 스콧 판결 이후 최악의 판결"이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말하자면 미국 사법부 역사의 히틀러 같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