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드레드 스콧을 블로우 가족으로부터 사들인 군의관 존 에머슨의 이야기를 했다.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스콧은 자신이 에머슨에게 팔리게 되자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혔다고 전해지고, 따라서 스콧은 존 에머슨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드레드 스콧이 회고록을 남긴 것도 아니니 정확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의견과는 달리 존 에머슨은 그다지 나쁜 노예주인이 아니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우선 에머슨은 북부에서 태어나 자랐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군의관이 된 사람이다. 살면서 백인이 노예를 부리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가 흑인 노예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를 대하는 태도는 북부에서 자유로운 흑인들을 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 백인과 동등한 취급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가축이 아닌 사람으로 대했다는 얘기다.

그런 에머슨은 왜 노예를 구했을까? 당시 에머슨과 같은 장교들은 외진 지역으로 발령받아 갈 경우 요리를 비롯해 각종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이 경우 노예를 구해서 일을 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아마 그가 살면서 만났던 흑인들은 '노예 12년'에서 주인공이 살았던 위와 같은 환경(0:25 지점)과 비슷한 삶을 살았을 수 있다.

순전히 추측만도 아니다. 존 에머슨은 미군에서 복무하면서 춥고 외진 지역(위스컨신 테리토리, 지금의 미네소타주)에 파견 나갔을 때 자신의 노예 드레드 스콧에게 난로를 주기 위해 부대에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담당자와 싸움이 붙어 주먹다짐까지 했다고 한다. 백인 장교가 노예를 위해 다른 백인과 싸움을 한다는 건 흔한 일은 분명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일 하나로 존 에머슨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결론을 내리려는 건 아니지만 일종의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에머슨의 다른 면도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 아이린 (샌퍼드) 에머슨은 다른 얘기다. 존은 아이린을 남부 루이지애나주에서 만나 결혼했는데, 아이린은 노예주인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남부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이 말은 아이린은 남편 존과 달리 노예를 "노예 취급"하는 데 익숙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 아이린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드레드와 해리엇 스콧부부, 그리고 그들의 두 딸을 유산으로 물려받으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수 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존 에머슨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유언장에는 스콧 부부를 노예, 즉 재산으로 아내에게 남긴다는 말이 없다. 따라서 애초에 노예와 노예주의 관계가 무효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법도 글도 모르는 노예가 이런 문제를 꼼꼼하게 챙겼을 가능성은 적고, 무엇보다 존 에머슨의 발령지마다 따라다녔던 터라 자연스럽게 그 집안의 노예로 취급받았다. 게다가 평생을 노예로 살았던 사람이 자유의 몸이 된다는 건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평생 다니던 직장을 나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 당장 먹고 살 일과 거처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 경제적 환경이 노예들을 묶어두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작용했을 것이다.

1840년대 미주리주

소송을 시작할 당시 드레드 스콧은 이미 40대 중반을 넘긴 상황이었다. 당시 남성 노예의 평균 수명이 35세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할 때 그는 이미 노예로서의 노동력을 많이 상실한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소송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아내와 두 딸의 자유가 중요했다. 자신은 몇 년을 더 살지 모르겠지만 약 23년 연하였던 아내는 아직도 살아야 할 날이 많았다. 게다가 딸들이 자라고 있었다. 흑인 노예 여자아이가 8살을 넘기면 다른 집으로 팔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는 딸아이들과 생이별을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선례였다. 앞의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백인 노예주가 자신의 노예를 데리고 북부 자유주에 오래 머물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그 주의 법에 따라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고 힘든 재판을 거쳐야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았다. 만약 주인이 자유주에서 노예를 데리고 일정 기간 이상 거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으면 그 주의 법을 기준으로는 일종의 '불법 구금죄'가 성립한다. 노예를 유지할 수 없는 지역에서 누군가를 강제로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기간 중에 노예를 때렸다면 자유인을 폭행한 폭행죄도 성립한다. (이 둘은 드레드 스콧이 아이린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 내용에 포함된 항목들이기도 하다.)

가운데 초록색 점이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가 위치한 곳이다.

무엇보다 1820, 30년대에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점점 더 많은 노예들이 이러한 법을 알게 되면서 소송들을 통해 자유를 찾고 있었다. 스콧 부부는 미주리주에 살면서 이런 방법으로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바로 소송을 하지 않고 10년 넘게 기다렸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예에서 풀려나기 위해 소송을 거는 순간 노예는 백인 주인에게서 보복을 당하는 일이 흔했고, 재판이 끝날 때까지 소유권이 관할 보안관에게 넘어가서 사실상의 구금상태에서 노역을 해야 했다. 이길 수 있을지 모르는 싸움인데 당장 자신의 환경은 더 나빠질 수 있다.

드레드 스콧은 소송보다는 대가를 지불하고 풀려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스콧 부부의 노예주인 아이린 에머슨이 끝내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소송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재판을 시작한 이상–그리고 이제까지의 판례를 보면–스콧 부부가 노예를 벗어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이길 조건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첫 재판에서 승리한 게 그 증거다.

하지만 노예주 아이린이 항소를 하는 시점에서는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1840년대 세인트루이스.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북을 오가는 배들이 정박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1840년대의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 노예제도 폐지 문제로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주에 따라서는 흑인들이 노예에서 풀려나는 게 어려운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는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이 늘어나면서 이를 싫어하는 백인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었고, 아예 노예가 아닌 흑인이 이주해 오는 것을 막는 법이 생기기도 했다. 한두 명의 흑인이 자유인이 되는 것은 눈감아 줄 수 있었겠지만, 점점 많은 흑인들이 노예에서 풀려나고 이를 연방 차원에서 도우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가만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백인들에게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드레드 스콧에게 아주 불리한 사회적 분위기였다.

미주리 타협

백인들에게 노예제도는 재산권의 문제였지만, 이를 조금만 확대해 보면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예제도를 유지해서 소득원을 보호하려는 쪽에서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정치적인 파워를 가져야 했고, 이는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쪽도 다르지 않다. 노예를 부릴 수 없는 주의 농부(소농)와 공짜나 다름없는 노예를 사용해서 거대한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둘 사이에는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은 결국 법을 만드는 의회에서 대결해야 한다.

이런 싸움을 잘 보여주는 것이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이라는 협정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처음 동부의 몇 개 주로 시작해서 서쪽으로 점점 영토를 넓혀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전쟁 없이 일시에 거대한 땅을 얻은 거래가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주와는 다르다)라고 불리던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가 이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미국에게서 1500만 달러의 돈을 받고 팔았다. 1803년에 있었던 이 거래를 루이지애나 구입(Louisiana Purchase)라 부른다.

프랑스가 미국에 팔았던 땅, 루이지애나 테리토리. 현재의 주들을 오버랩해서 보여주는 지도로, 숫자 '03'이 들어간 지점이 지금의 미주리주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의 영토가 넓어진다고 해서 바로 주(state)가 되는 게 아니다. 주나 시 같은 행정구역은 땅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행정의 대상이 되는 주민이 필요하다. 주민이 많아지고 그들을 대표하는 행정적 필요가 생겼을 때 자치단체가 생기고 연방 단위에서 의석이 배분된다. 따라서 미국의 영토이지만 주로 승격하지 않은 곳은 그냥 테리토리(Territory, 영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이 많아지고 자신들의 대표자를 연방의회에 보내겠다고 요구하게 되면 주로 승격하게 된다. 미국이 독립할 때 존재했던 13개 주 외의 대부분의 주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미주리 타협'이 발생한 계기는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미국 영토에 편입된 지역의 일부에서 주민들이 주로 승격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아래 지도를 보면–테리토리를 제외한–노예주(빨간색)와 자유주(초록색)는 각각 11개로, 노예주와 자유주가 동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양쪽 진영에서 연방 상원에 각각 22명의 대표를 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상원의원은 주의 인구, 크기와 상관없이 무조건 주마다 2석이 배정된다.)

그런데 미주리가 주로 승격하면서 노예제도를 합법으로 유지하겠다고 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팽팽하게 이뤄지던 노예주-자유주의 균형이 24 대 22로 깨지게 되기 때문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현재 어떤 주에도 속해있지 않은 특별 행정구역인 워싱턴 DC의 주민들이 주로 승격해달라고 하는 주장에 민주당이 대체로 찬성하고 공화당이 반대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민주당 우세인 지역이라 공화당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나는 미주리주에 노예를 허용하라는 남부주들과 이를 막으려는 북부주들의 갈등을 봉합하는 방편으로 나온 것이 바로 미주리 타협이다. 이 합의에 따르면 연방 정부는 미주리주가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대신, 연방정부에서의 균형을 위해 당시 매사추세츠가 가지고 있던 지금의 메인(미국 동북부 끝에 있는 주) 지역도 주로 승격시켜서 노예주와 자유주의 균형을 12대 12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도 계속 추가될 새로운 주에서도 미주리주의 남쪽 경계에 해당하는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북쪽(파란색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그 아래에서 노예주가 새롭게 탄생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자유주를 탄생시켜 의회에서의 균형이 깨지지 않게 하겠다는 합의를 했다.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남부주의 반대로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하는 대신 확대되는 것만은 우선 막아보자는, 말 그대로 타협(compromise)였던 것이다. 이게 1820년의 일이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건국의 아버지이자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미주리 타협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는 미국의 연합에 조종(弔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은 40년 후의 일이지만 미국은 노예 문제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고 미주리 타협은 이미 돌아서기 시작한 두 지역을 당분간 묶어두려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노예주인 이야기 ④'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