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 중에 트럼프주의(Trumpism)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뇌를 빼앗긴 채 주체성 없이 이용당하는 좀비에 비유한다. 물론 자신이 반대하는 정치인을 따르는 사람들을 나치나 좀비에 비유하는 일은 항상 있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처럼 숫자로 확인이 가능한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고 리더의 명령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좀비를 떠올리지 않기는 쉽지 않다.

1년 전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비주얼이 영화 속 좀비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다.

지난 해 1월 6일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의회로 가라는 트럼프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트럼프는 "우리는 미친 듯이 싸워야 한다. 그렇게 싸우지 않으면 나라를 빼앗긴다(We fight like hell. And if you don't fight like hell, you're not going to have a country anymore)"라며 선동했고, 그의 말을 들은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를 확인하는 절차를 저지하러 의사당에 난입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렇게 사망한 시위대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의사당에 난입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 경고를 듣고도 깨진 유리를 통해 문을 통과하려다가 사살된 전직 공군병사 애쉴리 배빗(Ashli Babbitt)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역시 의사당에 침입하려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놀라 달아나는 무리에 깔려 압사한 로잰 보일랜드(Rosanne Boyland)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두 사람 모두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가 승리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승리가 도난 당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트럼프의 말을 충성스럽게 따랐다. (원래 트럼프의 지지자가 아니었던 보일랜드가 의사당에 난입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MSNBC의 팟캐스트는 꼭 한 번 들어볼 만하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숙주(host)에 불과하고, 그들을 조종하는 건 트럼프, 혹은 트럼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비유가 정당할까? 과연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존재일까?

트럼프의 부스터 발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지난달 22일, 오미크론 변이의 위험성에 대해서 대국민 담화를 하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전임 트럼프 대통령에 동의하는 말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며칠 전에 부스터 백신을 접종했다"라고 하면서 "(백신은) 그와 내가 동의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전 행정부와 과학계의 노력으로 미국은 백신을 최초로 만들어낸 국가가 되었다"고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취임 후 트럼프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피했고 굳이 그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때도 그냥 "내 전임자"라고만 표현해왔던 바이든이 이런 말을 하자 언론이 큰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 바이든의 이런 제스처에 트럼프도 화답했다. 그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 중에 바이든이 그렇게 말해준 것을 "듣고 놀랐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라고 하면서 "그(바이든)가 아주 좋은 일을 했고, 이는 나라를 치유하는 프로세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코로나19 백신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면서 백신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다. 코로나19에 걸려 심하게 앓고 병원에 가는 사람들은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는 '옳은 소리'도 했다. 언론에서 이를 두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로 놀라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런 백신 찬양은 지지자들로부터 야유를 들었다. 트럼프와의 대담을 진행하던 빌 오라일리(폭스뉴스의 진행자였다가 성추문으로 물러나 팟캐스터가 되었다)가 "대통령과 저는 모두 백신을 맞았습니다. (트럼프를 향해) 부스터도 맞으셨나요?"라고 묻자 "그렇다"고 답을 했는데 그 순간 청중에게서 야유가 터져 나온 것이다.

트럼프는 그들을 향해 "Don't, don't, don't, no, no."라며 성급하게 제지했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것(That's a very tiny group over there)"이라고 애써 그들의 존재를 축소했다.

동의하지 않는 지지자들

하지만 그들은 트럼프가 말하는 것처럼 소수가 아니다. 지난해 8월 폭스뉴스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의 3분의 1이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계획이 없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12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75%가 앞으로도 맞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그뿐 아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흑인으로 유명한 보수 정치평론가 캔디스 오웬스는 트럼프가 백신을 신뢰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트럼프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종종 잊곤 한다"면서 "트럼프가 속한 세대는 스스로 직접 조사해보지 않고 신문에서 말하는 게 사실(reality)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깎아내리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건 아주 흥미로운 상황이다.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이 트럼프 눈에서 벗어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데, 트럼프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내놓고 트럼프에게 야유를 보내거나 노인 취급을 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만약 트럼프가–가령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들처럼– 완전히 휘어잡고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야유를 보낸 사람들이 다른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이나 위협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기 힘들다.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하는 정치인이 있으면 지지자들을 부추겨 공격하게 하는 트럼프도 백신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해 8월, 자신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앨라배마주에서 집회를 하던 트럼프는 "(여러분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백신은 맞으라고 권합니다! 저도 맞았어요. 백신 좋아요. 접종하세요!"라고 말했다가 청중들의 야유를 받았다.

지지자들의 반대에 부딪힌 트럼프는 웃으면서 "안 맞겠다면 여러분의 자유"이기 때문에 존중한다며 더 이상 백신 얘기를 하지 않고 선택의 자유라는 쪽으로 마무리했다. 백신에 관한 한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주장을 무시한다.

기회주의자(Opportunist)

지금은 미국 정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듣는 트럼프이지만, 2016년에 선거운동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처럼 뜻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아주 잘하는 게 하나 있다면 기회를 알아보고 놓치지 않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로 번역되는 opportunist의 엄밀한 의미는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에 가깝고, 트럼프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순수한 기회주의자에 해당한다.

따라서 트럼프는 자신이 믿거나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절대로 내놓고 반대하지 않고 그들을 향한 문을 닫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2020년 대선을 한 달 앞둔 10월에 NBC 방송이 주최한 타운홀 미팅에서 그가 음모론자들인 큐아넌(QAnon)을 두고 했던 말이다. 큐아넌이 믿는 음모론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악명높은 것이 "민주당과 헐리우드 처럼 진보적인 진영에는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성폭행하고 죽이는 일을 하는 아동성애자 그룹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트럼프는 이런 아동성애자 세력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라는 임무(mission)를 부여받은 후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하지만 큐아넌 사람들은 증거를 대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진보 진영의 소아성애자 그룹이 흔적을 남길 것 같으냐"라고 반문한다.

트럼프가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를 많이 해도 이런 주장을 믿을 리는 없다. 하지만 위의 타운홀 미팅에서 트럼프는 "나는 큐아넌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면서 "하지만 그들이 소아성애(pedophilia)에 대해서 반대하고 싸운다는 건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한 나쁘게 이야기할 이유도, 그들의 허황된 믿음을 깨는 소리를 할 이유도 없다는 태도다.

"There Go My People"

여기에 트럼프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만들어내고 (헌법기관인 의회를 공격하라고 하면 목숨을 바쳐가며 쳐들어가는 지지자들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미국에 존재했나?)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만들어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트럼프는 그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생각을 흡수해서 증폭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프랑스 혁명기에 나온 것으로 유명한 아래의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제 지지자들이 저기 가네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겠어요. 그래야 그들을 이끌 수 있으니까요." 

권력을 "타인을 그의 의지에 반해 복종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한다면 독재 권력은 국민을 그들의 의지에 반해 복종시킬 수 있는 힘일 거다. 트럼프가 집권 기간 중에 보여준 말과 행동을 보면 분명 독재적, 권위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트럼프가 진정한 독재적(authoritarian, 권위주의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독재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트럼프가 미국인 30~40%의 생각을 대변했을 뿐이라는 주장과 그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한 진정한 독재였다는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소름 끼치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