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 매트릭스
• 댓글 5개 보기위대한 예술 작품을 가르는 기준이 뭘까?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가장 위대한 작품일까? 그게 기준이라면 헐리우드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은 2009년에 나온 영화 '아바타'일 거다. 하지만 '아바타'는 그렇게 큰 인기를 끌고도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특이한 영화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인기=위대함'이라는 논리를 미술 작품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 작품이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평론가는 없다.
나는 특정 작품이 얼마나 많이 이야기되느냐가 꽤 믿을 만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 시간이 흘러도 꾸준히 회자되는 작품은 위대한 예술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작품이 좋다, 마음에 든다는 것만으로는 담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서로 다른 해석들이 부딪히고, 경쟁하는 일이 이어질 때 비로소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가령,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와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둘 다 뛰어난 작품성을 갖고 있지만, 전자의 경우 꽤 분명한, 즉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해석이 존재하는 반면, 후자는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존재했다. 이럴 때는 대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더 많은 후대 예술가에게 영향을 준다. (당연한 말이지만,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만큼 작품의 위대함에 대한 확실한 증명도 없다.)
이런 담론은 즉시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차를 두고 일어나기도 한다. 예술가가 당대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좋은 평가를 받는 일도 흔하고(반 고흐), 인기를 끌던 작가가 말년에 유행이 지나 잊혀졌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다시 인기를 끌기도 하고(렘브란트), 특정 시기 혹은 예술 사조가 무시당하다가 후대 평론가들에 의해 재평가(매너리즘) 받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예술가나 작가, 작품이 당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는다면(모차르트, 셰익스피어), 그건 그들의 작품이 시대가 변하고 관객이 변해도 계속해서 의미를 갖는다(relevant)는 얘기다. 이게 가능해지려면 그 작품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교훈이 담겨있거나(이솝의 우화), 처음부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모나리자').
쉽게 떠오르는 예가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다.
1999년에 나온 경고
올해는 이 영화가 나온 지 25년이 되는 해로, 지난달 뉴욕타임즈 영화 평론가 앨리사 윌킨슨(Alissa Wilkinson)이 이를 기념하는 칼럼을 썼다. 제목은 "Here’s Why ‘The Matrix’ Is More Relevant Than Ever"로, 왜 이 영화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매트릭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윌킨슨이 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만 해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20년이 넘게 걸렸으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A.I.가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고,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인터넷에 빠져 지내고 있으니 비록 극적으로 묘사하기는 했어도 영화 곳곳에 현재 인류 사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메타포가 가득하다.
주인공 네오는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모습의 직장인이지만, 밤에는 불법 프로그램을 파는 해커다. 영화 초반에 네오가 자기 아파트에 찾아온 '고객들'에게 프로그램이 든 미니디스크를 건네주는 장면이 나온다. 네오는 책 한 권의 페이지를 파내고 그 안에 불법 디스크를 숨겨 두고 있는데, 이 장면에서 그 책의 표지가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대표작인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한국에는 '시뮬라시옹'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이다.
책이 등장하는 장면은 몇 초밖에 되지 않지만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유는 '가상, 모조, 가짜, 흉내' 등을 의미하는 시뮬라시옹이라는 표현과 이를 사용한 보드리야르의 철학이 이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1990년대였기 때문에 보드리야르의 책은 더욱 적절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이 이 영화에서 갖는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진 건 아니다. 윌킨슨도 글에서 지적하지만, 보드리야르(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가 자기 책에서 나오는'시뮬레이션이 현실(reality)을 추월한다'는 개념을 이 영화가 오해했으며,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표현했다고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 다양하게 나오는 건 단순한 흥행을 넘어 많은 사람이 그 작품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았다는 얘기다.
이 장면을 잘 들여다 보면, 네오가 디스크를 숨긴 지점이 보드리야르의 책에서 "허무주의에 관하여(On Nihilism)"라는 장이다. 윌킨슨은 보드리야르가 이 장에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시스템 내에서 "진실(the truth)"을 주장하는 건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압제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이며, 허무주의는 허무주의로만 맞설 수 있다는 게 보드리야르의 말이다. (윌킨슨은 이 영화를 만든 워쇼스키 자매는 영화에서 사랑을 진정한 답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와 다르다고 한다.)
윌킨슨의 글에서 보드리야르의 철학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그가 가짜 뉴스(fake news)를 언급하는 대목이다.
"1999년 당시 '가짜 뉴스'라는 표현은 흔하지 않았고, 요즘과 같은 무게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official)' 진실이 무엇이며, 누가 그걸 통제하느냐는 질문은 그때도 이미 많았다. 가령 '매트릭스'가 나왔을 때는 'X파일'이 TV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1999년까지만 해도 '열린 인터넷'은 더 많은 진실을 밝혀줄 거라는 믿음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는 진실뿐 아니라 음모론도, 거짓말도 똑같이 인터넷을 타고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트럼프와 테일러 스위프트
최근 트럼프는 자기가 소유한 소셜미디어에 A.I.로 만들어진 가짜 이미지를 공유했다. 하나는 카멀라 해리스가 민주당의 공식 후보로 등극하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공산당 전당대회로 묘사한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인기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와 그의 팬들이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이미지다. 이미지 생성 A.I.가 등장한 직후부터 미국에서는 2024년 대선에 A.I.를 이용한 가짜 이미지가 확산될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꾸준히 나왔는데, 전직 대통령이 그 많은 경고를 간단하게 무시하고 앞장서서 가짜 이미지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공유한 이미지들이 이제는 일상화된 밈(meme)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16년 대선 때부터 가짜 뉴스는 '농담'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정치적 풍자는 언론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허용되는 게 당연하지만, 1) 조작된 이미지를 접하는 사람들 중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2)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런 '농담'을 만들어 퍼뜨릴 때는 풍자의 경계를 넘어 조작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아래에서 오른쪽 이미지를 실제 사진이라고 믿을 사람들은 많지 않겠지만, 왼쪽은 다르다. A.I.가 생성하는 이미지는 빠르게 정교화하고 있고, 현재 나온 버전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물론 이미지를 자세히 보면 어색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개별 이미지의 진위를 모두 확인할 사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이 흰색 패딩을 입고 있는 이미지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게 그 때문이다. 이미지 내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싫어하거나, 스위프트의 팬이라면 아래의 이미지가 조작임을 구분할 수 있었겠지만, 트럼프는 스위프트의 팬들을 지지자로 만들기 위해 이 이미지를 공유한 게 아니다. 트럼프가 겨냥하는 사람들은 이 이미지가 조작인지를 애써 구분할 시간도, 이유도 없다.
하지만 트럼프가 조작된 이미지를 공유한 진짜—그리고 더 심각한—이유는 따로 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팩트를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심'은 팩트를 확인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강한 의심이 아니라, '세상에는 믿을 게 하나도 없다'는 회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태도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면서도 '미국의 정치는 다 썩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것처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을 국민에게 심어주려는 의도다.
트럼프가 카멀라 해리스의 비행기 앞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의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고 하는 게 그렇다. 트럼프가 조작된 이미지를 대수롭지 않게 공유한다면, 즉 대선 후보가 가짜 이미지를 공유하는 행동이 노멀(normal)이 되면, 그와 대결하는 쪽에서 공유하는 이미지도 조작일 거라는 허무주의, 혹은 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신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된다.
그게 트럼프에게 어떤 이익이 될까?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시도해서 거의 성공할 뻔했던 조작 시도를 생각해 보면 그가 노리는 게 뭔지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내가 선거에 패배하면 그건 부정 투표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선거에 패한 후보가 부정 투표를 주장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투표일 몇 달 전부터 그런 주장을 하는 후보는 트럼프가 처음이었다.
특히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사전 투표에서 부정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사전 투표를 하지 말고 당일 현장 투표를 하라고 독려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전 투표를 했고,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말을 들은 지지자들 사이에 사전 투표율이 크게 떨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대개 먼저 개표되는 선거소 투표에서 트럼프가 앞서다가, 나중에 개표되는 사전 투표에서 바이든에게 따라잡히자 "부정 몰표"라고 했다. 그게 트럼프가 지난 4년 동안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하는 주장의 본질이다.
그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들은 트럼프가 지금 4년 전과 똑같이 선거 결과를 부정하기 위한 사전 작업(ground work)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영화 '매트릭스'가 인기 있다는 게 당연한 귀결처럼 들리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영화 속 주인공이 가상 세계(=매트릭스, 혹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스템')에 남아 있을지, 아니면 힘들어도 현실에 눈을 뜰 것인지를 선택하는 장면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빨간 약(red pill)'을 트럼프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그를 지지하기로 하는 결정처럼 이야기한다. (성격은 약간 다르지만, 진보적인 사회에서 남자들이 역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인 레딧 커뮤니티의 이름도 The Red Pill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많다.)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자매들은 트럼프 지지자나 분노한 젊은 (헤테로) 남성들이 자기들의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작품의 해석은 감독이나 예술가가 독점할 수 없다. 비록 오독(誤讀)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다양한 해석을 낳는 작품은 위대한 작품이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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