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터레터에서 2022년에 소개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글의 일부를 인용해 보면 이렇다;

"아우구스트 란트메서(August Landmesser)는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태어나 30대의 젊은 나이에 2차 세계 대전 중에 사망한 수많은 독일인 중 한 사람이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이 남자가 사후 수십 년이 지나 유명해진 이유는 우연히 발견된 사진 한 장 때문이다. 1936년 6월 어느 날, 란트메서가 일하던 함부르크의 조선소에서는 독일 해군의 훈련함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독일은 이미 나치가 지배하고 있었고, 군인들과 함께 진수식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전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오른팔을 앞으로 펴는 소위 ‘나치 경례’ 혹은 ‘히틀러 경례’를 했다.

문제의 사진은 바로 그 장면을 찍은 것이다.

사진 속 단 한 사람만이 그 경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냥 경례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팔짱을 끼고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1991년 독일의 ‘디 차이트’ 신문이 찾아내 공개한 이 사진은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의 기록과 인물들의 사진을 비교한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람은 아우구스트 란트메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당시 그가 겪고 있던 일을 생각하면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란트메서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팔짱 낀 남자'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이나 유럽의 다른 지역에 살면서 나치의 명령을 거부하고 부당한 지시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그들의 용기를 본받자고 다짐하곤 한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나 영화는 인기를 끌었고, 우리는 이들의 실제 모습보다 헐리우드가 해석한 버전에 더 익숙할 만큼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서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2025년에 일어난다면 어떨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보곤 자란 영웅들의 행동을 본받아 부당한 압력에 버티고 저항할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윤석열이 계엄령으로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면, 미국에서는 합법적으로 선거에 이긴 대통령과 정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 시도할 만한 일을 진행하고 있다.

21세기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권위주의 정부에 누가 저항하고, 누가 굴복할까?


트럼프 행정부는 지금 법원의 판결에 소극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엘살바도르행 비행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판사의 중지 명령을 이런저런 핑계로 듣지 않고 있다.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에게는 법원이 자기가 절대 권력으로 가는 유일한 방해물이다. 판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정면으로 거부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피하는 이유는, 그렇게 할 경우 트럼프를 지지한 중도 유권자와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민주당에 힘을 모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법부 장악, 길들이기는 트럼프가 벌이는 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사법 시스템 전체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미국의 대형 로펌들과 싸워 그들을 굴복시키고 있다. 돈 많은 변호사들이 트럼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는 건 트럼프가 현재 벌이고 있는 다른 많은 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이번 일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자.

2016년 선거운동 당시 공화당 당내 경선
이미지 출처: USA Today

트럼프가 처음 출마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당선된 2016년 대통령 선거 때의 일이다. 트럼프가 선거에 출마해서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워싱턴의 한 보수 단체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퓨전GPS(Fusion GPS)라는 사설 정보기관에 트럼프의 뒷조사를 의뢰한다.

뒷조사라고 하면 불법적으로 들리지만, 이는 미국 정치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작업으로, 미국에서는 경쟁자 조사(opposition research)라고 부른다. 상대 후보가 과거에 했던 발언이나 행동 중에서 문제가 될 만한 내용, 혹은 감추고 있는 약점을 찾아내어 공격하는 데 사용한다. 선거용 홍보물, 특히 방송용 홍보물이 소위 '네거티브 광고'인 미국에서 경쟁자 조사는 그런 홍보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 수집 과정에 속한다. 퓨전 GPS는 월스트리트저널 등에서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던 전직 기자가 2011년에 세운 회사로, 2012년 대선 때는 공화당의 밋 롬니(Mitt Romney)의 뒷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공화당 정치인들이 트럼프의 돌풍 앞에 줄줄이 낙마하며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선후보가 되자 퓨전 GPS의 의뢰인은 조사를 포기한다. 한편 힐러리 클린턴이 후보가 된 민주당은 트럼프에 대한 경쟁자 조사를 해야 하는데, 당이 직접 수행하는 대신 민주당이 주로 이용하는 대형 로펌인 퍼킨스 쿠이(Perkins Coie)가 진행했다. 퍼킨스 쿠이의 변호사들은 퓨전 GPS가 이미 공화당 쪽에서 트럼프를 조사해 놓은 자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퓨전 GPS에 계속해서 트럼프 조사를 해달라고 의뢰한다.

당시 트럼프는 러시아와 사업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푸틴에게 빚을 졌다는 루머가 있었다. 트럼프는 이런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러시아가 듣고 있으면 힐러리가 감춘 이메일 3만 개를 좀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트럼프는 그 부탁을 농담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훗날 로버트 멀러(Robert Mueller) 특별 검사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힐러리의 개인 이메일을 해킹하는 첫 시도가 트럼프가 그 말을 한 날(2016년 7월 27일)에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퍼킨스 쿠이(로펌)의 의뢰로 트럼프의 뒷조사를 하고 있던 퓨전 GPS는 이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하기로 한다. 영국의 전직 정보요원인 크리스토퍼 스틸(Christopher Steele)이 그 전문가였다. 그렇게 해서 스틸이 작성한 문서가 악명 높은 '스틸 문서철(Steele dossier, 스틸 도시에)'이다. 17개의 메모로 구성된 이 스틸 문서철은 트럼프가 모스크바에서 성매매 여성과 벌인 행각부터 러시아와의 구체적인 공모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 전체는 지금도 아래 웹사이트에서 읽어 볼 수 있다.

Dossier - The Moscow Project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정보 수집은 경찰의 수사와 다르다. 수사하는 경찰의 경우 궁극적으로 법정에서 사실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주장을 뒷받침할 분명한 증거를 수집하지만, 스틸 문서철에 포함된 메모는 사실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어차피 내부용이기 때문이다. (스틸에게서 문서를 전달받은 로펌은 민주당과 힐러리 클린턴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 안에는 사실로 밝혀진 내용도, 사실임을 증명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트럼프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러시아에 가서 미팅을 한 것도 사실이고, 러시아가 미국 선거에 개입한 것도 사실이지만, 트럼프의 모스크바 성매매 등의 내용은 한두 다리를 건너서 습득한 내용이라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트럼프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며, 민주당의 음모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훗날 로버트 멀러 특별 검사가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결론 내린 이후로 관련자들에 대한 보복을 공공연하게 다짐했다.

문제는 정치계에서 경쟁자 조사는 불법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2017년에 임기를 시작한 후에 법무부를 동원해 퍼킨스 쿠이가 음모를 꾸몄는지 수사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그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한 사람(Michael Sussman)을 기소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파트너 변호사는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참고로, 1년 매출이 10억 달러가 넘는 퍼킨스 쿠이는 소속된 변호사가 1,000명이 넘는, 세계 53위 규모의 로펌이다. 트럼프는 이 로펌을 샅샅이 조사하게 했지만, 보복하는 데 실패했다. 이게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의 일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에게 패한 후로 퍼킨스 쿠이는 트럼프를 더욱 화나게 했다. 자신의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트럼프가 부정 투표를 주장하며 결과를 뒤집으려고 변호사들을 미국 전역에 보내어 소송을 진행했는데, 그들이 상대한 민주당 측 변호사가 퍼킨스 쿠이의 스타 변호사 마크 엘리아스(Marc Elias)였다. 엘리아스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트럼프 측의 부정선거 주장을 법정에서 모조리 꺾어버렸다.

마크 엘리아스는 한 편에서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지만, 트럼프와 지지자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트럼프는 엘리아스가 속한 퍼킨스 쿠이를 상대로 소송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트럼프의 변호사들을 상대한 마크 엘리아스 변호사
이미지 출처: Law.com

문제는 이렇게 대형 로펌이 트럼프와 대결하는 모습은 로펌의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에는 공화당과 주로 일하는 로펌들과 민주당과 일하는 로펌들이 따로 있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치세력 한쪽과 척지는 게 좋을 리 없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마크 엘리아스가 로펌을 떠나게 되면서 퍼킨스 쿠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는 어떤 대통령도 상상하기 힘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기가 미워하는 로펌들을 위협하기 시작한 거다.


'굴복과 저항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