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짧은 버전이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 게재되었습니다.


일본에 강제점령을 당한 역사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물은 금기나 다름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일본과 손을 잡았던 제국주의 독일의 나치 정권에 대한 미국인들의 감정도 비슷할 거로 생각하기 쉽다.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들이 독일인들에게 가진 감정이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진 감정과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미국은 독일에 점령당한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독일계 이민자들도 많았고 (물론 이들은 전쟁 중에 조롱과 차별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꽤 많았는데 2차대전을 계기로 모두 영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주류 미국인들의 눈에 독일사람들은 적이었지만 인종적으로 같은 백인이었다. 무엇보다 2차대전 직전의 독일과 미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나치 수준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는 유대인을 내놓고 차별하는 관행이 있었고, 나치 인종차별의 근간이라고 하는 우생학적 사고는 사실 당시 미국이 수출한 것에 가깝다.  

물론 미국이 2차 대전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헐리우드 버전의 역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미국과 나치 독일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히틀러 경례'로 알려진 경례법이다.

팔짱 낀 남자

아우구스트 란트메서(August Landmesser)는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태어나 30대의 젊은 나이에 2차 세계 대전 중에 사망한 수많은 독일인 중 한 사람이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이 남자가 사후 수십 년이 지나 유명해진 이유는 우연히 발견된 사진 한 장 때문이다. 1936년 6월 어느 날, 란트메서가 일하던 함부르크의 조선소에서는 독일 해군의 훈련함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독일은 이미 나치가 지배하고 있었고, 군인들과 함께 진수식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전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오른팔을 앞으로 펴는 소위 ‘나치 경례’ 혹은 ‘히틀러 경례’를 했다. 문제의 사진은 바로 그 장면을 찍은 것이다.

사진 속 단 한 사람만이 그 경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냥 경례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팔짱을 끼고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1991년 독일의 ‘디 차이트’ 신문이 찾아내 공개한 이 사진은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의 기록과 인물들의 사진을 비교한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람은 아우구스트 란트메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당시 그가 겪고 있던 일을 생각하면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란트메서는 사진 속 행사가 있기 5년 전인 1931년, 취업의 기회를 얻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런데 1935년 이르마 에클러라는 유대계 여성과 약혼을 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쫓겨났다. 그는 개의치 않고 이르마와 결혼했지만 나치가 만든 ‘독일 혈통 보호법’에 따라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다. 곧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그들은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때가 사진 속 진수식이 열린 시점이다. 그가 팔짱을 끼고 경례를 거부한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란트메서가 거부한 경례는 할리우드 영화들을 비롯한 대중문화에서 나치독일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이 경례법은 독일에서는 불법이지만, 몇몇 나라에서는 네오나치들이 아직도 사용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이후 극우세력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미국에서는 2차 대전 때 미국의 적이었던 나치의 깃발과 성조기가 함께 나부끼고, 소총을 든 채 나치 경례를 하는 일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에서 나치 경례법을 사용한 것은 네오나치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벨라미 경례법

믿기지 않겠지만,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팔을 앞으로 뻗는 경례법은 19세기 말부터 1940년대까지 미국에서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었다. 나치 경례나 히틀러 경례가 아니었고, 나치와 전혀 무관한 행동이었지만 모양은 똑같았다. 바로 벨라미 경례법(Bellamy salute)이다. 기독사회주의 목사였던 프랜시스 벨라미(1855∼1931)는 현재 미국에서 사용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의 초기 버전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벨라미는 1892년, 한 청소년 잡지에 자신의 국기에 대한 맹세를 소개하면서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오른팔을 높이 들어 이마 근처에 대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함께 낭독하라”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1941년미국의 초등학생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모습. 당시 미국에서는 ‘벨라미 경례법’으로 알려진 이 경례는 나치 경례법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경례법을 제안한 건 벨라미가 아니라, 청소년 잡지의 편집장 제임스 업햄이었는데, 업햄은 팔을 들어 올리면서 두 발의 뒤축을 큰 소리가 나게 붙이는 동작도 포함했다.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는 나치 경례법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미국에서는 벨라미의 국기에 대한 맹세와 이 경례법이 함께 퍼져나갔고, 전국 학교의 학생들이 이를 따라 했다. 이는 이 경례법이 나치나 미국 등 특정 국가나 세력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당시에 유행하던 방식이었음을 보여준다. 벨라미가 쓴 글에 학생들이 “군대식 경례”를 하자고 한 것으로 보아 이런 경례법은 전체주의 국가는 물론, 미국에서도 군사문화가 일반에 확산된 것 같다.

하지만 1940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벨라미 경례법은 미국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할 때 손을 가슴에 얹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문화를 거부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넌 것으로 유명하지만, 훗날 미국 내 나치 동조자이자 백인우월주의자로 활동했던 찰스 린드버그가 같은 경례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서구인들이 고대 로마식 경례법이 존재했다고 착각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렇다면 나치를 비롯해 서구인들은 이 경례법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사람들은 이 경례법이 로마에서 왔다고 믿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로마식 경례법(Roman salute)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는 많은 서구 국가의 이상에 가까운 국가였다. 미국은 로마의 공화정을 모델로 생각했고, 나치 독일은 제국을 건설한 로마의 군사력에 매력을 느꼈다. 미국과 독일이 독수리를 상징물로 삼은 것도 로마를 흉내 낸 것이고, 두 나라의 많은 공공건물이 신고전주의 양식을 통해 로마풍을 따랐다. 경례법도 그중 하나였다.

근본 없는 경례법

하지만 여기에는 역사적 오류가 존재한다. 고대 로마가 남긴 예술작품과 기록 어디에도 손을 뻗어 경례했다는 얘기는 없기 때문이다. 황제가 오른손을 높이 드는 제스처를 하는 모습은 동상 등에서 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력자가 군중에게 화답하는 권위의 상징이지 군중이 권력자에게 하는 경례와는 거리가 멀다.

학자들은 19세기 유럽인들이 이 경례법을 로마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 근원을 신고전주의 회화, 특히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찾는다. 로마 공화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삼 형제의 신화를 그린 이 작품은 애국심과 남성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체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림 속에서 삼 형제는 아버지가 들고 있는 칼 앞에 맹세하는데, 이는 훗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만들어낸 독일과 미국 모두에 하나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자크 루이 다비드, '독수리기의 분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이 경례법을 사용한 다비드는 1791년에 그린 프랑스 혁명 기념작 ‘테니스 코트에서의 맹세’에도, 나폴레옹 황제를 그린 ‘독수리기의 분배’(1810)에서도 같은 동작의 경례를 사용했다. 당시 유럽회화의 최고봉이었던 프랑스, 그리고 그 나라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역사 화가였던 다비드의 작품에서 이렇게 꾸준히 사용되었으니 이 경례법이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은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나치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경례법이 결국 프랑스 화가가 만들어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지지만, 존재하지도 않던 전통이 만들어지고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특히 근대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함부르크의 조선소에서 나치 경례를 거부했던 란트메서는 이듬해 아내와 함께 독일을 탈출하려다 실패한 후 감옥에 갇혔고, 죄수들로 이루어진 부대에 배치되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이었던 아내는 결국 붙잡혀 강제수용소에서 다른 많은 유대인과 함께 살해당했고, 둘 사이에 태어난 두 딸아이 잉그리드와 이레네는 고아가 되어 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되었다.

나치 독일이 인정하지 않았단 란트메서와 이르마의 결혼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1951년, 함부르크 시의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해 가을 잉그리드는 친아버지의 성을 따라 자신의 성을 란트메서로 바꿨고, 이레네는 엄마의 성인 에클러를 사용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