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세상에서 인스타그램에 가장 최적화된 도시가 어디냐"라고 묻는다면 뉴욕이 가장 많은 표를 받지 않을까? 일단 뉴욕은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도 구겐하임 뮤지엄이 가장 많이 사진 찍히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은 얼마든지 많다. 파리, 로마, 베네치아도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는 곳이다.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재미, 아니 흥미로워야 한다. 도시 어디를 가도 전부 비슷비슷해 보이고, 대부분 단일 인종에 단일한 문화를 갖고 있으면 몇 달 만에 소재가 바닥날 거다. 따라서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도시는 멋진 비주얼로는 안되고 문화적, 인종적으로 다양해야 한다. 다양할수록 이야깃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인스타그램의 인기 계정인 @whatisnewyork을 보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아주) 먼 영상들로 가득하지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이다. (주의: 대부분은 본 후에 'What the f**k did I just watch?'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영상들이다.)

비주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인스타 계정 중 하나가 흔히 HONY라 부르는 휴먼즈 오브 뉴욕(Humans Of New York, @humansofny)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뉴욕시 인구보다 훨씬 더 많은 1,15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지만, 이 계정의 주인인 브랜든 스탠튼(Brandon Stanton)은 진정한 멀티채널 인플루언서다. 인스타그램보다 더 많은 팔로워를 가진 페이스북 계정, 웹사이트, 심지어 트위터 계정까지 운영한다.

2010년에 직장을 잃은 후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서 눈에 띄는 사람에게 다가가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스탠튼이 시작한 지 몇 해만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 명성 덕분에 다른 도시에서도 초청을 받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 찍기도 하지만, 그가 다른 도시에서 시작했어도 그렇게 빨리 유명해졌을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긴 하지만 어디에서 시작했어도 그렇게 많은 팬을 모을 수 있었을 거라 얘기하기는 힘들다.

무슨 말인지는 그의 채널 하나에 들어가서 (소셜미디어 채널은 달라도 대부분 같은 콘텐츠가 올라오기 때문에 위의 링크 어디로 들어가도 상관없다) 포스트를 몇 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진은 거의 예외 없이 정면(full frontal) 사진이라서 특별히 작가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찍어도 충분히 찍을 수 있는 사진들이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이야기 끌어내기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도시인 데다가 '문화적 동화'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미국적인 특성 때문에 (그래서 미국에서는 문화의 '용광로melting pot'라는 비유는 '샐러드 그릇salad bowl'이라는 표현으로 일찌감치 대체되었다) 다양한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러티브가 다양하다. 모든 사연이 결국 뻔한 연민과 감동의 내러티브를 따르는 한국식 "휴먼 다큐"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연이 다양해도 그걸 끌어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절대 상냥하지 않은 뉴요커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낯선 남자에게 털어놓고 사진까지 찍게 허용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브랜든 스탠튼은 "두려운과 낯선 분위기, 불편함을 짧은 시간 안에 친밀함(intimacy)으로 바꾸는 기술"이 경쟁자를 걱정하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 (이 얘기는 아래 영상에 등장한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UCD)에서 한 이 특강을 편집한 이 15분짜리 영상은 휴먼즈 오브 뉴욕 팬이라면 꼭 보시길 추천한다.)

그런데 스탠튼은 그 기술을 어떻게 습득할 수 있었을까? 그에 따르면 거절당하는 걸 1만 번 정도 반복하면 깨우치게 된단다. 가령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는 절대 뒤에서 접근하면 안된다는 게 그가 주는 팁이다. 정면에서 천천히 다가가서 상대방이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를 줘야 한다는 거다.

서브웨이 북 리뷰

하지만 오늘 소개하려는 건 위의 두 계정이 아니라 서브웨이 북 리뷰(Subway Book Review, @subwaybookreview)라는 인스타 계정이다. 이 계정은 인스타그램에서 14만 명이 채 안 되는 팔로워를 가지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세계적인 스타들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팔로워를 늘려왔고 이제는 책 읽는 뉴요커들 사이에 제법 잘 알려진 계정이 되었다.

울리 보이터 코엔(Uli Beutter Cohen)라는 여성이 운영하는 서브웨이 북 리뷰는 휴먼즈 오브 뉴욕과 비슷하다. 운영자 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뉴욕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피사체에게 들은 얘기를 간략하게 텍스트로 게재하는 것. 차이가 있다면 서브웨이 북 리뷰는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지하철에서 만난 낯선 뉴요커가 읽고 있는 책이 소재다.

서브웨이 북 리뷰를 시작한 울리 보이터 코엔

하지만 책과 그 책을 읽는 독자는 분리하기 힘든 경우가 많고,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흐른다. 가령 아래의 포스팅을 보면 소피라는 이 여성은 SNL로 유명해진 코미디언 티나 페이(Tina Fey)의 회고록 'Bossypants'를 읽고 있었다고 한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서 뉴욕에 온 소피는 지금 작가, 배우, 코미디언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자신에게 영감을 준 코미디언이 티나 페이였고, 이 책은 벌써 여러 번 읽었지만, 다시 읽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은 나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렇게 책을 통해서 접근하는 울리 보이터 코엔은 (휴먼즈 오브 뉴욕의) 브랜든 스탠튼 보다 '작업'이 좀 더 용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 코엔은 타고난 뉴요커가 아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고, 미국에 처음 와서는 서부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3년에 뉴욕에 오게 되었는데 이 낯선 도시, 특히 불편한 뉴욕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엉뚱한 모험을 했다가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하는 일이 자신의 커리어가 된 거다. (아래는 그가 뉴욕을 대표하는 퍼블릭 라디오 방송국 WNYC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인터뷰가 나온 'All Of It'은 내가 즐겨듣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뉴욕은 책의 도시다. 세계적인 출판사들이 모인 곳이고, 세계적인 저자들이 살거나 자주 들르는 곳이다. 물론 뉴욕을 그렇게 만든 건 뉴요커들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저자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가 뉴욕이기 때문이다. 울리 보이터 코엔은 뉴욕에 와서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는 중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로 했을까? 코엔은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공감 능력(empathy)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겠다고 작정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렇다. 그의 생각은 맞았고, 긴장하면서 처음 다가가 말을 건넨 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단다)과 좋은 대화를 나눈 후에 용기를 얻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7년 동안 1천 명이 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지하철 노선에 따라 승객들의 책 읽는 습관이 다를까? 그렇다고 한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글자(A, B, C, D..) 노선에 탄 승객들이 숫자(1, 2, 3, 4..) 노선에 탄 승객들보다 눈에 띄게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한다. '글자=책'이라는 잠재의식의 작용이라기보다는 글자 노선은 숫자 노선에 비해 역과 역 사이의 거리가 멀고 멀리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을 들고 타는 승객이 많다는 게 코엔의 가설이다.

지하철 승객들이 책을 더 많이 읽는 요일은? 수요일과 목요일은 뉴욕 지하철에서는 책 읽는 날이라고 할 만큼 많이 읽고,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적다. 주의 한중간은 아마도 가장 (책 속으로) 탈출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Toni Morrison rules the subway!"

뉴요커들이 많이 읽는 저자가 있나?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를 읽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는데,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책은 토니 모리슨의 책이라고 한다. ("Toni Morrison rules the subway!") 'Beloved,' 'The Bluest Eye,' 'Sula' 같은 책들은 2013년에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가장 자주 만나는, 뉴욕 지하철 승객들의 애서라고.

모리슨의 책 외에 유난히 뉴욕 지하철에서 눈에 많이 띄는 책 하나가 있다면 이 책이란다:

뉴요커라면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을 것 같은데? 맞다. 그런데 흔히 자기계발서(self-help books)는 여성들이 읽는 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는 남성들도 자기계발서를 지하철에서 당당하게 읽는 걸 자주 본다. (남자들은 운전하다 길을 잃어도 물어보지 않는다는 신화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불필요한 남성성이 사라진다는 건 좋은 징조로 보인다.)

울리 보이터 코엔은 인터뷰 후반부에 교포작가 이민진(Min Jin Lee)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There isn't any question that a book can't answer. You just have to find a right book(책에서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은 없다. 적절한 책을 찾기만 하면 된다)."


코엔의 인터뷰 모음은 최근 책으로도 나왔다. 제목은 'Between the Lines.' 흔히 '행간'으로 번역되는 이 표현 속 라인(lines)은 지하철의 노선을 의미하기도 하는 중의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언뜻 들으면 'Between the Lions'처럼 들리기도 한다. 미국의 공영방송 PBS에서 10년 동안 방송했던 어린이용 독서 프로그램으로, 뉴욕 공공도서관에 들어갈 때 두 개의 사자 석상 사이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두고 지은 이름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