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짧은 버전이 조선일보 '박상현의 디지털 읽기'에 실렸습니다. 짧은 버전(여기에는 이철원 화백의 멋진 그림도 있습니다)으로 읽고 싶으시면 여기에서, 좀 더 자세한 버전으로 읽고 싶으시면 아래에서 읽으시면 됩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 중에는 다양한 음모론을 믿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세계는 유대계 갑부가 지배하고 있고, 미국의 진보 정치는 그들의 어젠다를 따른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음모론이 그렇듯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존재한다.

브렉싯 진영에서 사용한 이미지. 소로스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1997-2007)를 조종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가령 20세기에 이름을 날린 천재 투자자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그렇다. 1992년 영국의 금융 위기였던 ‘검은 수요일’에 영국의 파운드화를 투매해서 ‘영국은행을 파산시킨 사나이’로 유명한 그는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을 설립해 각종 진보적 어젠다를 후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에 큰돈을 후원했다. 이런 배경이 그를 보수 유권자들이 미워하는 갑부 1위로 만들었고, 그래서 정치인이 진보적인 어젠다를 추진하거나, 보수진영에서 진보적인 단체를 공격할 때 소로스를 뒤에서 조종하는 인물(puppet master)로 그리는 건, 흔하다 못해 진부해진 묘사다.

그 반대편에는 코크 형제가 있다. 찰스 코크(Charles Koch)와 2019년에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코크(David Koch) 형제는 미국의 10대 갑부 리스트에 나란히 등장했던 기업인들이다. 그들의 회사인 ‘코크 인더스트리즈'는 대부분 공업용 자재를 거래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엄청나서, 수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주면서 자신들 어젠다에 서약하게 했다.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를 신봉하는 코크 형제는 각종 세금과 규제 철폐는 물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정부 정책에도 반대해 진보 진영의 분노를 사며 ‘공적 1호’가 되었다.

물론 코크 형제도 비슷한 묘사를 피하지 못한다. 다만 진보진영은 진부한 이미지를 약간 덜 사용하는 듯.

링의 오른쪽: 피터 틸

하지만 이들은 지난 20세기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하지만, 소셜미디어가 등장하고 그 힘을 잘 이용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정치적 영향력의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미국에서 부의 지형이 변했다. 현재 미국 최고의 갑부 10명 중 8명이 테크 기업 창업자들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한 이들은 공화당, 민주당으로 구분되지 않고, 과거 갑부들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치인들을 돈으로 후원하고 원하는 어젠다를 건네는 방식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전통적으로 친기업적인 공화당 세력이 힘을 잃었다. 부시 가문으로 대표되는 ‘정통 보수’는 새롭게 등장한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사실상 당을 빼앗겼고, 그들을 지지하던 코크 형제 같은 부자들은 당황하고 있다.

이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새로 나온 책 '콘트래리언'을 보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는 사이 테크 기업에서 성공한 21세기 갑부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 피터 틸(Peter Thiel)이다. 페이스북의 초기 투자자로도 유명한 그는 페이팔 이후 헤지펀드로 큰돈을 벌었고, 빅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 기업인 팰런티어를 만든 테크 갑부로, 흔히 진보적인 성향이라고 알려진 실리콘밸리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2016년 대선 때 트럼프를 공개 지지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도 그가 쓴 책 '제로 투 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나온 책 ‘콘트래리언(The Contrarian)’은 틸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고, 반드시 보복을 하기 때문에 주위에서 다들 두려워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온라인 매체 고커(Gawker)에 앙심을 품고, 몇 년 후 소송을 통해 파산시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소송은 자신의 섹스 테이프를 공개한 고커를 상대로 프로레슬러 헐크 호건이 건 소송이다. 틸은 엄청난 소송 비용을 부담하며 뒤에서 도왔고, 호건이 승리하고 고커가 파산 신청을 한 후에 자신이 도운 사실을 공개했다).

피터 틸은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포장하는 걸 좋아한다.

틸이 원래 민주당 어젠다를 싫어할 뿐 아니라, 모든 정치인과 정부 조직 자체를 불신하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끌렸다는 말이 있지만, 어쨌거나 현재 트럼프 지지 세력과 연결된 유일한 테크 갑부다. 그는 피터 틸은 트럼프 당선 직후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와 트럼프의 회동을 주선했다. 그 결과인지 페이스북은 트럼프 재임 기간 내내 트럼프와 지지자들의 가짜 뉴스를 단속하지 않고 놔두었는데, 앞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저커버그의 이런 결정에도 틸이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링의 왼쪽: 마크 베니오프

그런가 하면 같은 실리콘밸리에서 세계 최대의 고객 관리 솔루션 기업인 세일즈포스를 만들어 키운 마크 베니오프는 틸과 비슷한 나이(50대)이지만 전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 베니오프는 틸이 트럼프를 지지한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힐러리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가진 젠더 문제 해결에 목소리를 높이는 진보 남성이다. 특히 2015년에는 (훗날 트럼프의 부통령이 되는)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가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정책을 추진하자 “세일즈포스를 인디애나주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해 철회하게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베니오프는 “페이스북은 담배 회사와 똑같다”며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근 내부자 폭로로 이제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견해지만, 베이오프가 몇 년 전 이 말을 했을 때만 해도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끼리는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을 깼다고 박수를 받았다. 단순히 다른 갑부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까지 우리가 사용해온 자본주의는 죽었으며, 이제는 주주들(shareholders)을 넘어서 이해당사자들(stakeholders)을 위한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야 하며, 비즈니스, 즉 기업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한 좋은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게 독창적인 주장은 아니다.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면 많은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거라는 자유방임주의적 사고(피터 틸의 믿음이기도 하다)가 환경을 파괴하고, 중산층을 무너뜨리며 21세기를 디스토피아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은 근래 들어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고 있다. '주주/기업–소비자–노동자'라는 전통적인 틀을 넘어 환경과 사회 등을 기업활동의 이해당사자로 포함해야 비로소 우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부동산 가격이 "미쳤다"고 소문난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가진 세일즈포스의 설립자이자 CEO가 그런 진보적인 주장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곳곳을 다니며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디어를 보는 관점

지갑의 힘을 빌려 사회적 주장을 하는 갑부들의 실제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주지사에 대한 소환(recall) 선거가 있었다. 넷플릭스 CEO와 저커버그 부부 등 많은 테크 갑부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각 진영에 엄청난 돈을 기부했다. 우리 돈으로 약 3500억 원이 들어간 소환 선거의 결과는 부결이었고, 개빈 뉴섬 주지사는 직을 유지했다. 큰돈과 시간, 정치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이 선거를 두고 미국인들은 갑부들이 현실 정치에 정말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편 21세기 정치에서는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돈의 힘을 눌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다. 그는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출연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4년여가 지난 후 주요 소셜 플랫폼에서 퇴출당한 채 2024년 대권에 재도전하는 트럼프가 당장 후원금 모금보다 소셜미디어 기업을 직접 창업하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그때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베니오프의 트윗

그렇다면 베니오프와 틸은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할까? 둘 다 페이스북은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트위터의 계정은 둘 다 살아있는데, 틸의 경우는 약 28만 명 정도의 팔로워가 있지만 한 명도 팔로우하지 않고 트윗도 2014년에 '제로 투 원'이 나왔을 때 홍보용으로 올려놓은 게 전부다. 하지만 베니오프는 트위터를 꽤 열심히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미디어에 대해 가진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 틸은 고커 미디어를 파산시켰고, 베니오프는 재정적 어려움에 빠진 타임(TIME) 매거진을 인수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타임이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읽던 매체라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베니오프는 이 잡지 인수를 통해 돈을 벌려는 건 아니며, 추가의 미디어 기업을 인수할 생각도 없다고 한다. ("부자라도 매체는 하나만 사면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말을 비롯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면 아래 영상을 권한다).

그렇다고 피터 틸이 매체와 무관한 건 아니다. 흔히 틸이 거느린 실리콘밸리의 인맥을 '페이팔 마피아(PayPal Mafia)'라고들 하지만 그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는 건 아니다. (유튜브 창업자들이나 일런 머스크도 페이팔 마피아에 속하지만 틸과는 많이 다른 사람들이다). '콘트래리언'을 보면 틸의 진정한 동지들은 그가 스탠포드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87년에 만든 '스탠포드 리뷰(Stanford Review)'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졸업한 후에도 이 잡지의 편집부에서 일한 후배들을 채용하거나 정치적으로 지지해왔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진보적인 환경(대학교 캠퍼스들이 그렇고, 전반적인 미국의 미디어 환경도 그렇다)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틸에게 스탠포드 리뷰는 "소수"가 자신의 생각을 알릴 수 있는 채널인 동시에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을 확인하고 함께 뭉쳐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너 써클'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지지 선언 후에 그가 보인 행보 역시 그렇게 이너 써클에 들어가고, 이너 써클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진정한 권력자, 막후 조종자가 되려는 틸이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조지 소로스의 이미지를 풍긴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콘트래리언'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들이 좀 더 진보주의자들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소로스가 사용한 방식을 의식적으로 따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