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패배 ③ 러시아의 논리
• 댓글 남기기앞의 글에서 말한 이유로 러시아 정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라스푸틴의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두긴)보다는 전직 외무부 장관의 말을 들어보는 게 좋다. '프리마코프 독트린'은 서구의 전문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도 있지만 몇 가지 주요 원칙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 않다.
프리마코프 독트린의 첫 번째 원칙은 러시아는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반드시 약화시켜야 하며, 미국이 지배하는 단극(unipolar) 세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러시아가 옛 소련이 남긴 공간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고, 이 지역의 통합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당연히 발트해 국가들이나 우크라이나처럼 한 때 소련의 일부였던 나라들은 서구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러시아가 과거 바르샤바 조약에 포함되었던 나라들에 대한 통제권을 확장할 수 있다면 더 좋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확대되는 것은 피해야 하고, 이를 저지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이는 논리적으로 아주 단순한 귀결이다. NATO의 안보 보장을 받고 있거나, 유럽연합(EU)에 경제적으로 통합된 나라에 대해 러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이를 통제하는 건 훨씬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구소련의 국가들은 개별적으로는 러시아에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러시아로부터 가해지는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군사적 압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가령 에스토니아 같은 나라가 NATO에 가입하게 놔둔다면 결국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괘씸한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러시아 정부 인사들은 이것은 러시아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어 수단이라는 주장
러시아의 독트린과 전략적 사고는 방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주장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침략당했다. 러시아는 국경선이 대부분 평지에 넓게 퍼져 있어서 방어하기 쉽지 않다.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히틀러 때문에 외세의 침략에 트라우마가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이유는 완충지대(buffer zone)를 만들기 위함이다.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은 러시아를 침범할 수 있는 적에게서 영토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국이거나, 개방된 초원지대에 비해 방어가 유리한 산지처럼 방어에 유리한 요충지(choke points)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지역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러시아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이런 확장 전략이 러시아로서는 정당한 안보적 이익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지구상에 어떤 나라도 방어에 유리한 국경선을 가질 권리를 타고 나지 않는다.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에 물어보라. 아니,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들(이들의 국경선은 과거 식민 지배자들이 그냥 일직선으로 그어 놓았다)에 물어보라. '러시아에는 방어할 수 있는 국경선이 필요하다'라는 주장은 이 나라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은 자국의 방어와 주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러시아가 조금 더 안전하게 느끼고 싶으니까 폴란드,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존재할 권리는 희생되어도 좋다는 주장은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지구상에서 다른 나라들에 의해 침략당할 가능성이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다. 러시아인들은 종종 NATO가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나의 질문은 이거다. 이 나라들이 "자, 이제 러시아를 침공하자"라며 군을 동원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유럽의 국가들이 정말로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지리적인 경계선이 좀 더 있는 것이 정말로 도움이 될까? 과거 바르샤바 조약국이나 소비에트 연방 내의 국가들을 완충지로 갖고 있었던 건 나폴레옹의 침략이나 2차 대전 때는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핵무기의 시대다. 만약 어느 나라가 러시아를 없애버리겠다고 전쟁을 벌인다면 이는 핵전쟁을 의미한다. 침략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이를 막으려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핵탄두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재래식 무기를 가진 나라들의 침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만약 NATO의 탱크들이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한다면 러시아는 이들을 향해 전술핵무기를 쏠 것이라서 그렇다. 침략국의 탱크들이 수도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군한 상황이라면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과도한 반응이라고 나무랄 나라는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국방부 장관(1997~2001)을 지낸 이고르 세르게예프가 국방 예산의 배정에서 핵무기를 최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러시아가 재래식 무기에서 NATO의 화력에 밀린다고 해도 핵무기가 있는 한 러시아의 영토는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변국을 합병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러시아의 독트린이 있다면 이는 정당방위라는 전략적 이해와는 무관하다. 이를 "자위(self-defense)"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NATO의 확장은 러시아의 영향력에 대한 위협이지, 러시아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목표에 도덕적 가치가 없어도 러시아의 (거대) 전략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러시아는 구소련이 남긴 지역을 지배하고 싶어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NATO의 영향력을 약화하고 그 확장을 저지하려 한다. 또한 단극 세계 질서 내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약화하려 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략적 균형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한다.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서도 전략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보자.
크름 반도로 가는 길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와 독트린이 어떤 것인지 대략 감이 잡혔다면 이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한 러시아의 정책이 그런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취약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주장은 동의하기 힘들다. 2014년 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러시아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관계는 꽤 좋았기 때문이다. 2010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린 '승리의 날'(전승기념일) 퍼레이드에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함께 행진했다. "지금 보면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래의 사진들을 보라. 폴란드 군인들이 붉은 광장을 행진하는 사진이다. 폴란드만이 아니다. 프랑스, 미국, 영국도 군인들을 보내어 붉은 광장을 함께 행진했다.
서방 국가의 군인들이 붉은 광장에서 러시아군과 함께 행진했던 게 고작 15년 전의 일이다. 그 나라들의 군대가 지금 러시아를 행진하고 있다면 그건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의 행진일 거다. 무엇이 이런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을까? 바로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이다.
2014년에 일어난 유로마이단 혁명은 당시 친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끌어내렸다. 이는 야누코비치가 국민 절대다수가 바라던 유럽연합(EU) 가입 논의를 전격 중단하고 서명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혁명이 진행된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는 대신 이와 관련해서 러시아가 내린 결정에 초점을 맞춰보자. 당시 푸틴의 판단은 고차원의 체스 게임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렇다.
우선 크렘린은 야누코비치에게 유럽연합 가입 논의를 위한 협력 협정을 중단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게 첫 번째 실수다. 푸틴의 두 번째 실수는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하도록 허락했거나 부추긴 것이다. 다른 나라로 도망한 대통령이 정당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실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반응한 방식이다. 러시아의 선택지를 두 개의 극단적인 예로 설명해보자. 한쪽 끝에는 새롭게 선출된 정부와 공개적으로 논의를 하면서 러시아의 '소프트 파워'와 영향력을 재설정한 후, 서서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과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인기를 회복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 내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게 해서 그것을 핑계로 러시아 군대를 보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방법이 있다. 러시아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군대는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그들 중에는 야누코비치 지지자들도 존재했다. 따라서 그때 러시아군이 들어갔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푸틴은 가장 덜 위험한 중간을 선택했다. 러시아 군대를 보내어 크름(크림) 반도를 점령한 것이다. 크름 반도 합병으로 푸틴과 러시아 정부에 대한 국민적인 인기는 크게 올라갔다. 서방 세계의 반응도– 아마 푸틴이 예상했던대로–미미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여기에는 지불해야 할 심각한 전략적 비용이 숨어 있었다. 우선 우크라이나 정치의 숫자 변화다. 러시아가 합병한 크름 반도 내에는 원래 친러시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 반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은 우크라이나 선거에서 더 이상 투표를 하지 않고 러시아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다. 친러시아 유권자들이 우크라이나 정치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감소한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가 주권국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은 과거처럼 러시아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NATO도 달라졌다. 2014년 이전만 해도 NATO는 우크라이나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 NATO의 모든 훈련과 안보 지원 활동은 러시아가 크름 반도와 돈바스에서 벌인 일을 중심으로 성장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상대로 하드 파워(hard power, 무력)를 공개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소프트 파워와 영향력을 많이 희생했다. 그렇게 해놓고 우크라이나가 서방 세계 쪽으로 이동하자 깜짝 놀란 것처럼 반응했다. 옆집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가서 마당을 차지한 후에 그 이웃과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푸틴은 과거 미디어에 나와서 크름 반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은 전혀 없으며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완전하게 존중한다고 했기 때문에 2014년의 침공은 더욱 명분을 잃는다.
하지만 그렇게 일어난 크름 반도 합병도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것과 같은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를 확정 짓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2014년의 일로 영향력을 잃었어도 영토는 얻었다. 그리고 전쟁은 아직 불가피하지 않았다.
'전략적 패배 ④'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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