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탄생한 소련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흡수했다. 연방 내에 존재하던 여러 공화국들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영향력을 강했던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 제국 내에서 일어난 내전과 스탈린의 실패한 정책, 그리고 2차 대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1950,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서게 된다.

1960년 기준으로 소련의 인구는 2억 1,400만 명이었고, 미국의 인구는 1억 7,900만 명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냉전이 끝날 무렵이었던) 1989년까지도 세계 2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련의 말기를 이야기할 때 경제적, 기술적 침체를 떠올리지만, 냉전의 초중반만 해도 소련은 서구의 많은 국가들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몇몇 정보기관은 소련의 경제적 생산력이 궁극적으로 미국을 앞설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은 거대한 산업기반을 갖추고 있었고, 사용 가능한 원자재와 천연자원, 그중에서도 석유와 탄화수소(hydrocarbons)를 보유했고, 동유럽에 방대한 위성국가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 (이미지 출처: History.com)

하지만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문제와 잘못된 결정들은 그대로 남아서 소련을 괴롭혔다. 특히 부정부패와 지독한 관료주의 문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 사회와 경제를 갉아먹어 성장을 막고 결국 실패하게 했다. 허위 보고서를 제출하고, 직장에서 물건을 훔치는 등의 작은 범죄와 조직 내의 부패는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일상이었다.

소련은 수만 대의 전차와 장갑차 제조하는 등 군사 중공업 부문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대를 만들어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문제는 미국의 경우 경제가 이런 군비 증강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반면, 소련의 경제는 그럴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련은 소비재와 같은 다른 주요 부문에서 미국에 뒤처졌다. 탱크나 제트기, 장갑차는 많았지만, 국민이 열심히 번 돈으로 살 수 있는 세탁기, 소시지, 치즈, 옷과 같은 소비재는 공급이 부족하거나 질이 떨어졌다.

무리하는 습관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전략적 무리수를 두곤 했고, 러시아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위성국가들과 그 국민을 다루는 방법에 문제가 많았다.

위성국가의 연합, 혹은 제국을 유지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상호 동의에 의한 방법무력에 의한 방법이 그것이다. 소련은 두 방법을 모두 사용했지만 후자에 의존하는 일이 잦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이나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 혁명이 일어났을 때를 보면 위성국가의 국민이 연방에 남기를 원하지 않을 때 소련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위성국가들이 반대 의견을 낼 때 탱크를 동원해서 밀고 들어간다면 그 나라 국민의 마음을 사기는 힘들다. 국민의 환영을 받는 좋은 정치체제는 사람들이 나라를 탈출하지 못하게 장벽을 세우고 철조망을 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다.

정치적인 압제와 멈춰선 경제를 경험한 사람들은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을 좋아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연방 내 공화국이나 위성국가에 살던 사람들에게 소련의 영향권에 남아있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이 선택한 답은 후자였다.

흔히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이런 선택권을 사람들에게 줌으로써 가뜩이나 흔들리던 연방을 해체했다고 한다. 이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주변국 사람들이 애초에 소련에서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선택권이 주어졌어도 연방은 유지되었을 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운데)는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CNN)

미국을 비롯해 영어권에서 러시아 편에 서서 우크라이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는 "원래" 러시아의 일부였기 때문에 러시아가 그런 지역을 가지려는 의도는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실제 조사 결과를 무시하는 것이다. 1991년, 우크라이나인들을 대상으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지를 묻는 투표를 실시한 결과 92.3%가 독립을 선택했다. 우크라이나의 모든 행정구(오블라스트)에서 연방 탈퇴가 우세했고, 여기에는 (친러시아계가 많다고 하는) 크름 반도와 돈바스 지역도 포함된다. 발트해 국가들이든, 우크라이나든, 혹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든 상관없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해서 자유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면 이들은 두 팔을 들어 독립을 원했다. 이렇듯 러시아 제국을 괴롭힌 오래된 문제들이 이제는 소련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소련의 붕괴로 시작된 1990년대는 러시아에게는 대혼란이었지만 새로운 희망의 시대이기도 했다. 물론 소련의 붕괴는 큰 충격이었어도 대다수 국민은 독립을 지지했고, 새로운 대통령 보리스 옐친을 지지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에서 독립 국가로 지위가 바뀌어 새롭게 출발한 러시아가 적응해야 할 변화는 쉬운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러시아에는 강력한 산업과 풍부한 자원이 있었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있었고, 교육 수준이 높고 능력 있는 노동력이 있었다. 당시 서방 국가들 사이에는 개방된 러시아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슬라브의 역사에서 이렇게 희망적인 시기 바로 뒤에는 큰 실망과 절망이 따라오곤 한다. 권력의 최상부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는 러시아 경제를 망가뜨렸고, 러시아 국민이 물려받은 자원을 도둑질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러시아의 기업인들 (이미지 출처: The Conversation)

러시아의 경제가 민영화되는 과정은 너무나 부패하고 문제가 많았다. 러시아 경제의 민영화는 궁극적으로 자원과 산업이라는 옛 소련의 국부(國富)를 올리가르히의 손에 집중시키는 작업이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막대한 부를 손에 쥐게 되었고, 대부분의 국민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살인적인 실업률로 고생하게 된다. 국가가 부패를 통제하는 데 또 다시 실패하면서 국민의 기대수명을 비롯한 국민 삶의 지표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일반 국민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어땠을까? 군대가 탱크를 몰고 가서 의회 건물에 포격을 한다면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모습으로 보일까? 그게 1993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그 뒤로 푸틴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러시아는 지금의 모습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옐친은 1993년 10월 의회 건물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헌정위기를 초래했다. (이미지 출처: National Security Archive)

잃어버린 유산

이제까지 러시아의 과거를 살펴본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러시아가 잃어버린 힘과 영향력(power and influence)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세계 무대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가 잃어버린 유산을 이해하지 않고 그들이 생각하는 큰 그림(거대 전략)과 독트린(doctrine)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다른 나라와 그 지도자를 분석할 때 저지르기 쉬운 큰 실수 중 하나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것들에 가치를 두고 있을 거라 짐작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 전략적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판단하려 한다면 '우리가 그들의 위치에 있다면 무엇을 이루려 할 것인가' 라는 렌즈를 통해 판단하면 안 된다. 그들이 이루려는 게 뭔지를 판단해야 한다.

가령 푸틴은 집권 이래 러시아 국민 삶의 질이나 경제적 성장을 최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수천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도 이를 생산적인 인프라나 러시아인을 위한 서비스를 키우는 데 사용하는 대신 군수 산업에 크게 투자했다. 이는 그가 완전히 다른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러시아의 거대 전략을 생각할 때 러시아의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저작물을 떠올린다. 두기는 분명 흥미로운 인물임이 틀림없고, 라스푸틴을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소련이 무너진 후 국민볼셰비키당을 창립하는 데 일조했는데, 이들은 극우민족주의와 볼셰비즘(혹은 스탈린주의)을 결합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두기는 러시아 내에서 영향력 있는 책을 많이 썼고, 그중에는 '지정학의 기초'라는 것도 있다. (좀 다른 얘기지만 두긴의 딸 다리아는 사실상 아버지와 같은 비즈니스를 하다가 2022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자동차에 설치된 폭탄이 터져 숨졌다.)

두긴은 영어도 잘 구사하기 때문에 해외 미디어에 자주 등장한다. 2016년 BBC에 출연한 두긴.

두긴의 '지정학의 기초'는 러시아의 군사참모학교에서도 교재로 사용하는 책으로, 러시아가 어떻게 하면–세계를 정복하지는 않아도 최소한–유라시아를 지배할 수 있는지를 소개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제안 중 하나는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하기 위해서는 세계 질서에 어느 정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긴이 주장하는 변화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으로 의미가 없고, 문화적으로도 중요하지 않고, 인종적으로도 차별점이 없으므로 (러시아에) 합병되어야 한다는 것이 두긴의 생각이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면, 우크라이나 침략에 앞서 푸틴이 했던 긴 연설에서다.

하지만 합병이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웃 국가로서 잘 지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몰도바, 핀란드, 그리고 조지아의 일부, 코카서스, 그리고 심지어 몽골리아도 합병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러시아에 합병되지 않을 지역들도 최소한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긴은 심지어 중국도 이론적으로 러시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면서, 중국은 여러 개의 나라로 쪼개져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황당한 주장들이고, 사실상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얘기다. 이런 책이 러시아에서 영향력이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두긴은 러시아 정부에서 일한 사람이 아니며, 그의 생각이 러시아의 공식적인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정부가 하는 일을 두긴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살펴보는 건 적절하지 않다.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그보다는 좀 더 공식적인 문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외무장관을 지낸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의 생각을 담은 저작이 그거다. 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2014년에 러시아의 관영 방송에 나와서 훗날 역사학자들이 "프리파코프 독트린"이라고 부르게 될 거라며 일련의 원칙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프리마코프가 세운 이 원칙들이야말로 지금의 러시아가 전략적 결정을 내리게 될 기초였다.


'전략적 패배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