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몇 가지 중요한 판결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미국의 대학 교육과 관련한 판결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오터레터에서도 소개한 적극적 우대조치의 위헌 판결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학자금 대출 탕감에 대한 위헌 결정이다. 두 판결 모두 보수 대법관들의 일치된 의견으로 나온 것으로, 진보 쪽에서는 이 결정에 유감을 표했다.

그런데 뉴욕 대학교(NYU)의 교수이자, 팟캐스트 등 다양한 방송 활동을 하는 스캇 갤로웨이(Scott Galloway, 이 사람에 대해서는 오터레터에서 '울먹이는 갤로웨이'라는 글을 통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가 조금 다른 견해를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 내놨다. 적극적 우대조치의 취지 자체에는 공감하지만 인종을 바탕으로 한 우대 정책에는 반대하며, 무엇보다 이를 둘러싼 논쟁이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원칙론에 입각해서 내놓을 수 있는 비판론처럼 들릴 수 있지만, 갤로웨이는 아주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는다.

오터레터에서 이 글의 전문을 번역해서 소개하기로 한 이유는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갤로웨이의 글이 미국의 대학 교육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대학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꼭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연장해 주는 약물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 약물이 더 오래 살게만 해주는 게 아니라, 더 행복하게 해주고, 더 건강하게 해주고, 더 부유하게 해주고, 부부관계도 더 좋게 만들어 준다면 어떨까? 좋은 소식이 있다. 그런 약물이 이미 존재한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소수가 이걸 독차지해서 쌓아둔다는 거다.

이 약물의 이름은 고등교육(higher education)이다. (갤로웨이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수명이 더 길고, 더 행복하며, 소득도 높고, 부부관계도 더 좋다는 통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옮긴이) 미국은 이 약물을 가장 많이 생산할 뿐 아니라, 그 어느 나라의 경쟁업체도 따라올 수 없을 만한 순도를 자랑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교라는 약물을 복용하면 임금은 4배가 된다. 게다가 미국에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엄청나게 커진다. 수백만 명의 외국인 학생이 이런 약물을 복용하기 위해 미국에 온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이 약물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담쟁이덩굴(=아이비)로 덮인 담장과 어마어마하게 비싼 학비 뒤에 숨겨두고 있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우리는 이 좋은 약물을 백인에게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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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숫자는 1960년,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이렇게 세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흑인 학생의 수다. 15퍼센트가 아니라, 15명이었다.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이렇게 말했다. "오래도록 쇠사슬에 묶여 지내던 사람을 어느날 갑자기 풀어주고 출발점에 세우고는 이제 남들과 똑같이 경쟁하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 엘리트 고등교육을 좀 더 공평하게 나눠 갖도록 도와주었다. 1980년부터 2020년 사이 아이비리그 대학교에서 백인이 아닌 학생들의 비율은 14%에서 50%로 상승했다.

인종으로 구분한 아이비리그 학생들. 밑에서부터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 태평양계, 원주민, 외국에서 온 유학생

적극적 우대조치는 꾸준히 논란이 되어왔고, 인종에 기반한 입학 결정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여러 차례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최근 대법원은 대학교 입학에 인종을 고려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함으로써 적극적 우대정책을 폐기했다.

나는 이 결정이 옳은 답(이지만, 질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밑에서 이야기)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적극적 우대조치를 싫어했다. 미국인의 74%가 대학교 입학에서 인종은 조금도 고려되어서 안된다고 답했다. 캘리포니아주는 1996년에 공립 대학교에서 적극적 우대조치의 사용을 금지했고, 이 조치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2020년에 있었지만 주민투표에서 14% 포인트 차이로 패했다. 인종에 기반한 적극적 우대조치의 효과는 끝났다. (아이비리그 대학의 인종별 학생 구성을 보여주는 위의 도표 참조.) 미국 사회에서 인종은 여전히 강력한 동력(powerful force)인 건 맞다. 하지만 인종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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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최상위층 출신의 학생은 표준화된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고, 대학에 진학할 확률도 높다. 하버드 대학교에 재학 중인 흑인, 라티노, 원주민 학생 중 71%는 부모가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의 소득이 미국 중위값보다 높은 집에서 왔다. 이런 엘리트 집단을 인종을 기준으로 재구성해봤자 여전히 엘리트주의(elitism)다.

X축: 부모의 소득 순위, Y축: 자녀의 대학 진학률
X축: 부모의 소득, Y축: 학생의 SAT 점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요소로 등극한다. 부모의 소득은 대학 진학율만 결정하는 게 아니라, 10대 임신율부터 기대수명까지 삶에 중요한 많은 것들을 결정한다. 흑인 아이들은 백인 아이들에 비해 가난할 확률이 높은 게 사실이지만 (갤로웨이가 링크한 기사 의 제목은 "흑인의 가난은 백인의 가난과 다르다"이다–옮긴이) 그들의 성공 가능성을 더 잘 보여주는 거시지표는 인종이 아니라 그들이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소득은 불평등을 보여주는 대용물(proxy)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불평등이다.

대학 입학에서 인종이 아닌 (경제적) 계층을 반영하는 것을 선호하는 미국인들이 2배로 많다. 계층을 사용하는 방법은 작동한다. 나의 모교인 UCLA와 버클리는 인종을 반영하지 않고도 연방 펠 장학금(Pell grant: 저소득층 학생에게 주는 국가 지원금으로, 상환 의무가 없다–옮긴이)을 받는 학생의 비율이 항상 전국 최고다. 2021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들(UC라 불리는 학교들)에 입학생은 인종 다양성에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펠 장학금을 받는 학부생의 비율 (이미지 출처: US News & World Report)

대법원의 판결로 레거시 입학(legacy admissions, 기부자, 동문의 자녀에게 입학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옮긴이)을 손봐야 한다는 논쟁이 다시 점화됐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돈많은 부동산 개발업자의 자녀가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최고의 대학교에 남들보다 쉽게 들어가는 건 옳지 않다. 대학교 입학 사정관들도 이를 알고 있다. 하지만 돈많은 동문들이 만족할 경우 더 많은 기부금을 내고, 그 돈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을 도울 수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런 정당화는 고등교육의 비용이 상승하고 엘리트주의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효력을 잃는다.

지난 50년 동안 대학 등록금은 16배 올랐다. 그러는 동안 점점 더 많은 대학의 합격율이 10% 미만으로 낮아지고 있다. 이건 대학들이 의도한 것("a feature, not a bug")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게 있다. 등록금의 증가로 인한 피해가 모든 학생들에게 동등하게 돌아가는 건 아니다. 돈이 많은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넉넉하게 쥐어준다. 하지만 대학들이 공급을 인위적으로 제한한 결과, 중산층 출신의 똑똑한 학생들이 우수한 대학교와 같은 수준의 등록금을 내지만 장학금을 받을 기회가 적은 학교, 혹은 교육의 질과 졸업장의 가치가 떨어지는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미국에서 소득 기준으로 상위 0.1%에 해당하는 가정의 아이가 엘리트 대학에 입학할 확률은 하위 5% 가정 아이의 80배다.

대학생들이 입는 스웨터에 학교 로고 대신 "카스트 (제도)"라고 적어 넣는 게 차라리 솔직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Facebook)
교육비와 가정의 실질 중위소득

'교육의 님비화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