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난민들
• 댓글 남기기동유럽의 정치는 복잡하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나라와 민족이 많고 복잡한데 열심히 읽어서 이해한다고 해도 정작 내 삶에 별다른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좀 더 중요한 플레이어들, 그러니까 서유럽이나 중국, 미국 등의 정세를 살펴보는 게 내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에 관심을 끄게 된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그렇지는 않다. 이해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으면서도 동유럽을 넘어 전 세계적인 정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슈들이 있다. 최근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에서 일어난 난민 사태가 그렇다.
난민들이 러시아에 인접한 동유럽 국가 벨라루스에 모이기 시작한 건 지난여름부터다. 흔히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건너오는 이라크, 시리아의 난민들로 알려졌지만 그들의 국적은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나이지리아, 에리트리아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인도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벨라루스를 찾아왔다.
이들이 이렇다할 산업도 없고 인구도 1천만이 안 되는 구소련의 위성국가에 살고 싶어서 찾아온 건 아니다. 난민들은 서유럽 국가, 즉 EU 회원국에 정착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시리아에서 독일행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 벨라루스의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다. 물론 벨라루스는 EU 회원국이 아니지만 전 세계의 난민들을 받아들인 후 인접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같은 나라들로 넘어가게 해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만들어진 난민 사태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벨라루스는 이들에게서 벨라루스 비자 발급 비용과 항공료로 큰돈을 받아 챙겼다. 이 문제를 탐사보도 한 매체들에 따르면 벨라루스 정부가 국영 항공사와 여행사를 동원해 전 세계 난민들을 데려왔고, 그렇게 수도 민스크에 도착한 난민들을 처음에는 호텔에 묵게 한 후에 (난민들이 원하는 대로) 폴란드 국경으로 데려갔고, 그들에게 국경 철조망을 끊을 수 있는 와이어 커터까지 제공했다.
루카셴코의 꼼수를 지켜보던 폴란드는 벨라루스를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지 않기로 하고 국경을 막았다. 수천, 수만의 난민들이 철조망으로 막혀있는 국경 앞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자주 본 장면이 바로 그거다.
그렇게 대치 상태가 지속되면서 9월이 되었고, 기온은 빠르게 떨어졌다. 대부분 더운 나라에서 온 이들 난민이 텐트와 모닥불로 버티기에는 동유럽의 기후는 가혹했고, 얼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난민들은 철조망을 넘으려 했고, 이들을 막기 위해 배치된 폴란드 군인들은 추운 날 물대포를 쏘며 이들의 월경을 막았다.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게 이즈음이다.
내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선진국으로 몰려드는 큰 그림으로 보면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는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난민 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는 과거의 난민 사태와는 다른 새로운 요소가 들어가 있다. 바로 독재자의 난민 무기화다.
루카셴코는 EU 국가들을 향해 "벨라루스는 너희 나라들로 넘어가려는 불법 이민자들을 막아주고 있다"고 큰소리를 쳐왔다. 그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벨라루스를 통한 루트는 난민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 여름부터 일어난 난민 사태는 전혀 다르다. 이번 일은 벨라루스가 EU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돈을 받고 난민을 끌어와서 생긴 일종의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라고 보는 게 맞다.
여기에서 잠깐 벨라루스의 내부 사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평범했던 부부의 투쟁
벨라루스의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마지막 남은 유럽의 독재자"로 불린다. 1994년에 정권을 잡은 후 현재 여섯 번째 임기에 있기 때문에 그의 집권 기간은 러시아의 푸틴보다 길다. 벨라루스 국민들이 그를 그토록 좋아할까? 많은 독재자가 그렇듯 처음에는 국민의 환영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더는 그렇지 않다. 가령 많은 사람이 루카셴코는 작년(2020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루카셴코를 대통령이라고 소개하지만, 선거에 이의가 제기되었다고 적어 놓았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는 80%의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 외에는 아무도 그 결과를 믿지 않는다. 국내의 반대파에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그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적법한 선거가 아니었다는 거다. 만약 선거가 부정 없이 치러졌다면 누가 승리했을까?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라는 여성이 승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티하놉스카야는 정치 경험이 없는 영어 교사, 통역가 출신의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30년 집권을 노리는 루카셴코의 상대가 되었을까?
평범한 사람이 뜻하지 않게 역사의 한 가운데 서게 되는 일이 있다. 티하놉스카야와 그의 남편 세르게이 티하놉스키가 그런 사람들이다. 아내는 영어를 가르치고 남편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이 부부가 루카셴코와 대결하게 된 건 이들이 집을 한 채 사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 부부는 2019년에 벨라루스 남부 도시인 호멜(Gomel)에 농장이 딸린 집을 하나 사는 과정에서 지방자치단체와 정부 공무원들의 관료주의의 참맛을 보게 된다. 관료주의야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지만 구 소련의 위성국가, 그것도 독재를 벗어나지 않은 나라라면 어느 수준일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인 세르게이는 21세기 다운 해결책을 찾아낸다. 바로 유튜브였다.
세르게이는 나이트클럽 운영 외에도 콘서트, 뮤직 비디오와 광고 일도 하던 사람이었고, 이 재능을 발휘해서 벨라루스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유튜브 채널을 하나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채널은 만들어진 첫해에 14만 명의 구독자를 끌어들였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디언스는 세르게이 불만에 공감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벨라루스 국민들이었다.
세르게이의 유튜브 채널이 국민적인 관심을 끈 이유는 그가 단순히 자신의 얘기만 한 게 아니라 전국을 돌면서 벨라루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채널이 인기를 끌면서 야당 정치인들도 영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의 공영방송 채널보다 10배 이상 많은 구독자를 갖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소식은 루카셴코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세르게이의 차를 미행하는 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내의 출마
세르게이 티하놉스키의 인기가 결국 자신에 대한 비판임을 잘 아는 루카셴코 대통령은 급기야 세르게이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2020년 5월, 체포됨과 동시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루카셴코가 세르게이를 가둔 걸 보면 온라인 소셜미디어를 통한 풀뿌리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건 세르게이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내 스베틀라나가 옥중의 남편을 대신해서 대선 출마를 한 것이다. 자신은 겁이 많아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았다는 스베틀라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출마했다고 했다. 세르게이의 출마를 막기 위해 그를 체포한 루카셴코는 스베틀라나의 출마는 막지 않았다. 벨라루스같은 보수적인 사회에서 여성을, 그것도 아무런 정치 경험이 없는 가정주부를 대통령으로 뽑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그랬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워낙 심각한 선거 부정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니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스베틀라나가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루카셴코의 80% 득표를 믿는 사람은 없다. 부정을 통해 승리한 루카셴코는 스베틀라나가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남는 것을 좋아할 리 없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스베틀라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옆 나라(이면서 벨라루스와 달리 EU 회원국인) 리투아니아로 망명한다. 그리고 일종의 망명 정부 수반처럼 각국 정상들과 만나면서 루카셴코의 독재를 막아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압력
루카셴코는 원래 푸틴과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서방세계, 특히 EU와 대립하는 모습을 본 푸틴은 루카셴코의 효용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애틀랜틱의 기사에 따르면 이 시점에 러시아에서 루카셴코 "구조대책(rescue package)"을 보냈다고 한다. EU의 제재를 받아 곤란해진 경제를 돕고 무엇보다 국민들의 봉기를 막을 수 있는 각종 '비법'을 전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벨라루스의 미디어는 이때부터 빠르게 러시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EU의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골칫거리였던 벨라루스가 푸틴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걸 불안하게 지켜봤겠지만, 법과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방세계는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풀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이 북한을 제재하는 것을 봐서 잘 알지만, 돈 많은 나라들의 제재는 독재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다. 푸틴이 도움을 준다고 해도 경제규모가 한국보다 작은 러시아(2020년 기준)보다는 유럽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루카셴코가 벌이는 행동은 워싱턴이 관심을 끌 때마다 북한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도발과 다르지 않다. 가령 지난 5월, 그리스 아테네를 출발해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라이언에어 항공기를 강제 착륙시킨 건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벨라루스는 이 항공기가 자국 영공을 지나는 순간 "항공기에 폭발물이 있다"는 이유로 전투기를 보내 강제 착륙시켰다. 물론 폭발물 핑계는 거짓말이었고 진짜 이유는 그 비행기에 탄 언론인이자 민주 운동가인 로만 프로타세비치를 체포하기 위함이었다.
분노한 EU 국가들은 벨라루스의 강제 착륙 행위는 항공기 납치이며 '국가 주도의 테러 행위(act of state terrorism)'라고 규정하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EU는 과거에도 각종 인권위반 사례로 벨라루스에 대해 경제적 제재를 하고 있었지만 더 강력한 제재를 내리기로 한 것이다.
루카셴코가 전 세계 난민들을 전세기까지 동원해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사건 후에 일어난 일이다. EU가 자신을 국가수반으로 인정하지 않고 추가적인 경제 제재를 가하자 오히려 판돈을 키우기로 한 것이고, 그래서 나름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 인위적인 난민사태를 만들기로 한 거다. 왜냐하면 현재 유럽의 정치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난민 문제이기 때문. 잘 사는 독일은 메르켈 총리의 결단으로 많은 난민을 받아들였지만 (이에 대해서는 '메르켈은 옳았다'에서 설명했다) 어느 국가도 난민을 무한히 받아들일 수 없다.
게다가 EU의 다른 국가들, 특히 경제 규모가 작고 민족주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집권을 포기하는 행동일 만큼 어려운 문제다. 특히 벨라루스와 접경하고 있는 폴란드가 그렇게 반이민 정서가 높은 나라다. 따라서 만약 루카셴코가 시리아와 이라크의 난민을 폴란드에 쏟아 놓으면 이들은 폴란드 정치를 흔들 것이고, 이들이 다시 국경을 넘어 EU의 다른 국가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서방국가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대화를 시작할 것이라는 게 루카셴코의 계산이었던 거다. 즉, 북한의 김정은에게 핵미사일이 협상을 끌어내는 도구라면 루카셴코에게는 난민이 바로 그렇게 장기판의 말(pawn)이다.
그 후에 일어난 일
그 결과 루카셴코는 간절히 원하던 메르켈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메르켈은 통화 내내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미스터 루카셴코"라 불렀다고 전해졌다.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은 루카셴코는 결국 얼어 죽을 위기에 닥친 난민들을 국경지대에서 창고로 옮겨 수용하고, 원하는 난민들은 본국으로 다시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돌아갈 곳이 없다"며 벨라루스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결국 벨라루스가 난민을 수용하게 된 셈이다.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한 루카셴코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벨라루스를 제재하려는 EU와 미국의 노력도 끝나지 않았다. 미국과 EU, 영국, 캐나다는 지난 목요일, 이민자를 무기화한 루카셴코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규탄하면서 경제적 제재를 크게 높인다고 발표했다. "이런 행동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보여주겠다"라는 것이다.
이 발표가 나온 직후 루카셴코는 "그렇다면 러시아에서 EU 국가들을 연결하는 가스관을 막겠다"라고 위협했다. 난민으로 안되면 연료를 무기화하겠다는 거다. 하지만 EU를 상대로 연료를 무기화하는 건 푸틴의 카드이지 루카셴코가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러시아가 생산한 가스이기 때문이다.
푸틴은 루카셴코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경고했고, 이를 들은 루카셴코는 푸틴의 상한 심기를 달래려는 듯 "(러시아가 2014년에 우크라이나에 침공, 합병한) 크리미아는 실질적(de facto) 러시아 땅"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번 겨울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를 크게 의식한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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