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달리오 ④
• 댓글 10개 보기그렇다면 레이 달리오의 베스트셀러 '원칙(Principles)'은 어떻게 나오게 된 책일까? 뉴요커의 기사는 그 발단을 이렇게 소개한다.
2010년 봄, 딜브레이커(Dealbreaker)라는 웹사이트에서 PDF 문서를 하나 입수했다고 한다. 딜브레이커는 (많은 화제와 문제를 일으키고 지금은 폐간된) 가십 뉴스 사이트 고커(Gawker) 스타일의 웹사이트로,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을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달했다. 그런데 그 문서의 작성자가 (업계에서 별난 사람,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알려진) 레이 달리오였다. 브리지워터에서는 모든 직원들이 그걸 읽고 매일 매일의 삶에 적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읽은 딜브레이커 사람들의 반응은, "뭐 이런 게 다 있어? (WTF is this shit?)"였다. 브리지워터 내부에서만 돌아다니던 레이 달리오의 '원칙'이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 문서는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고, 어떤 건 200개가 넘는 "원칙"들이 담겨 있지만, 내용은 대개 뻔한 경구("생각하기 전에 행동하지 말라")에서부터 다윈의 진화론에 나온 얘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것까지 다양했고, 밑줄과 하이라이트, 도표 등이 잔뜩 들어간, 정신없어 보이는 문서였다.
가령 "현실 + 꿈 + 결심 = 성공적인 삶" 같은 공식이 그렇고, 아프리카의 하이에나와 누(gnu) 이야기가 내용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달리오에 따르면 하이에나 떼가 누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하이에나가 불쌍한 누를 공격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결과로 일어나는 일은 양쪽 모두에게 좋다는 거다. 하이에나로서는 자기가 속한 먹이사슬 속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그런 하이에나에게 먹히는 누는 생태계의 일부로서 이익을 누린다는 게 달리오의 생각이다. "누를 죽이고 먹는 것은 진화에 도움이 된다"라는 거다. 이런 단순한 얘기에 "원칙" 같은 거창한 이름을 붙일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이런 이야기가 자신의 경영 철학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가 이런 "원칙"들을 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적용하는 과정이다.
'원칙'의 초기 버전에 따르면 "브리지워터에서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직원들은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것을 무릅쓰고 이를 추구한다"라는 게 있다. 이게 얼마나 자발적인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달리오는 직원들이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흠이나 문제를 발견하면 회사 차원의 "문제 기록장"에 기록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눈에 띄는 것을 적는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에 적어내야 할 할당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구내식당 샐러드 바에 있는 야채가 조금 시들해 보여도 지적을 했고, 회사에는 끊임없이 이런 불만 사항이 제기되었다.
문제가 제기되면 여기에 연루된 직원들을 불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종의 공개 재판을 연다. "완전한 투명성"에 집착하는 달리오는 회사 내에서 오가는 대화는 모두 녹음, 녹화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공개 재판도 녹화해서 나중에 직원 교육 자료로 활용한다. 이런 교육 자료에는 잘못을 한 직원들의 모습이 나오고 "우리는 거짓말을 한 직원을 해고하면서까지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까?"와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물론 답은 "그렇다"이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달리오의 오른팔 그레그 젠슨은 사내에서 자신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또 다른 임원 아일린 머리(Eileen Murray)가 새로운 직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그 직원의 배경과 관련한 중요한 사항을 누락했고, 이메일을 비서와 함께 작성한 사실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다며 당시 기업 자문위원 제임스 코미(James Comey, 훗날 FBI 국장이 된다)에게 조사를 맡겼다. 그 조사는 무려 9개월 동안 진행되었고, 그 결과물은 시리즈 영상으로 제작해서 전 직원이 시청하게 했다.
그 영상 자료의 제목은 "아일린, 거짓말을 하다"였다.
레이 달리오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재즈 뮤지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노동자 계층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가 부자들을 처음 만난 건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할 때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평균 C를 받을 만큼 공부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워낙 언변이 좋아서 집 근처 이름 없는 대학교에 조건부로 입학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학점을 잘 관리해서 나중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들어갔다. 하지만 졸업 후 취직이 잘되지 않아 상황이 좋지 않은 원자재 시장에서 일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고 해고당한다. 자기 상사를 폭행한 혐의와 회사 행사에 스트리퍼를 고용한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달리오는 자기가 골프장 캐디로 일하던 시절에 알게 된 부자 고객들을 통해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부자 여자친구를 통해 사업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 여자 친구가 지금의 아내 바버라(Barbara)로, 밴더빌트 가문의 상속녀다.
달리오는 56세가 되던 2005년 말에 은퇴 계획을 발표했다.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은퇴할 경우 사업체가 자기 없이 어떻게 운영될지 생각해 봐야 할 나이였다. 특히 헤지펀드는 사람들이 설립자의 브랜드를 보고 투자하기 때문에 설립자가 은퇴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돈이 떠나는 일이 흔하다. 달리오가 자신의 투자 원칙과 경영 원칙을 일련의 룰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은 게 이즈음으로 짐작된다. 그는 브리지워터의 "철학"과 "핵심 가치"를 정리하는 메모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처음 나온 버전이 277개의 원칙이다. 이후 달리오는 계속해서 다른 원칙들을 추가했고, 2017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격인 '원칙'은 그렇게 모은 원칙들을 담고 있다.
그가 원칙들을 모으기로 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철학을 알리려는 것을 넘어 일종의 '컴퓨터 시스템' 즉, 달리오 봇을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 시스템은 프린스(Prince, 원칙 Principles의 줄임말), 프리오스(PriOS, Principles Operating System)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시도되었는데, 이를 인공지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억 달러를 투자했고, 업계 최고의 인재를 영입했다.
그렇게 데려온 사람이 데이비드 페루치(David Ferrucci)다. 그가 IBM에서 만든 인공지능 왓슨(Watson)은 유명 게임쇼인 제퍼디(Jeopardy!)에 등장해서 인간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기염을 토했고, 오래도록 질문과 대답이 가능한 AI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 투자자가 자신의 투자 원칙을 담은 AI를 만든다고 하니 페루치에게도 매력적인 프로젝트였다.
달리오는 페루치가 자기의 심복인 그레그 젠슨 밑에서 일하게 했다.
달리오는 영화 '그녀(Her)'에 큰 감명을 받아 영화 속 AI의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에게 이 시스템의 목소리를 맡기자고 했지만 요한슨 측으로부터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일을 시작한 페루치는 달리오가 만든 체계가 엉망임을 발견했다.
이 시스템("프린스")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직원에 대한 평가(rating)였다. 그런데 AI가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들어갈 룰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페루치가 와서 보니 달리오가 사용한 방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그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더블 블라인드(double blind, 실험자, 피검자 모두에게 정보를 숨겨 편향을 제거하는 방법), 익명 조사 등은 수행하지 않았고, 그런 룰을 사용했을 때 과연 더 나은 결과가 나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기초적인 회귀 분석도 없었다. 한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달리오는 "나는 회귀 분석을 안 믿어"라고 했단다. 실제로 브리지워터에서 달리오의 '원칙'에 입각해 투자할 경우 결과는 더 나쁘게 나왔다.
페루치는 달리오의 부탁대로 '프린스'를 만들면서 자기가 IBM에서 만들었던 왓슨을 모델로 삼았다. IBM의 엔지니어들은 AI를 만들기 위해 수백만 개의 문서, 신문 기사, 책 등을 입력, 학습시켰다. 프린스의 경우 현재 진행되는 논의를 듣고 달리오의 '원칙들' 중에서 해당되는 것을 찾아 적용하는 게 목표였다. 따라서 브리지워터의 '투명성 도서관'에 저장된 각종 녹음, 영상 자료를 가져다가 각 상황에 적절한 달리오의 원칙을 찾아 연결해 보려 했다.
페루치의 팀은 이 목표의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리오가 세운 원칙들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년이 흘러 2014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달리오는 페루치 팀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는 미팅을 열었다. 프린스의 직원 평가 능력을 확인하기로 하고 1,000명이 넘는 직원에 대한 평가 결과를 뽑아 살피던 달리오는 많은 직원들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걸 알고 있는 직원들의 점수가 너무 높게 나왔다는 거다. 달리오는 그런 걸 볼 때마다 지적을 이어갔고, 페루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그걸 본 달리오는 "아니, 내가 지적을 하고 있는데 왜 받아 적지 않는 거지?"하고 물었다. 페루치는 "다 듣고 있어요." 이 대답을 건방지다고 생각한 달리오는 "당신은 내 밑에서 일하는 거야"라고 했고, 페루치는 "저는 그레그 (젠슨) 밑에서 일하는데요"라고 반박했다.
화가 난 달리오는 방 안에 있는 다른 직원들을 둘러보며 "지금 페루치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고, 그의 비서는 재빨리 아이패드를 사용해 즉석 투표를 실시했다. 직원들의 투표 결과, 페루치가 틀렸다는 결정이 나왔다. 달리오는 페루치에게 직원 평가와 관련해서 수정해야 할 것들이 뭔지 지적하는 리스트를 주면서, "이렇게 만들어요"라고 했다. 페루치는 리스트를 보면서 이렇게 답했다."이건 유효하지 않은 알고리듬이에요. 레이, 이건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명령을 받아 수행할 수 없어요."
브리지워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달리오에게 강하게 반박하는 장면은 직원들에게 아주 낯설었다. 하지만 외부인이 그렇게 하는 건 본 적이 있었다. 달리오가 세계적으로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하버드 대학교 교수를 초청해 대화를 나눴던 때다. 그 자리에서 달리오는 역사는 모두 주기가 있기 때문에 그 변화 리듬을 알면 경제 변화의 규칙을 만들 수 있고, 어느 나라가 흥하거나 망할지 예측 가능하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퍼거슨은 정중하지만 분명한 말로 "역사의 전개를 모델링하는 방법은 없다"라며, "부채가 많은 나라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델링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다리를 떨던 달리오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럼 X발 당신의 모델은 뭔데? (Where's your fucking model, Niall?)"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런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퍼거슨의 주장이었지만 달리오는 작동을 멈춘 로봇처럼 보였다. 둘의 이야기를 듣던 직원들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달리오는 페루치를 해고하고 싶었겠지만, 그건 아주 난감한 일이었다. 당시 페루치는 브리지워터에서 달리오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퀀트투자(quantitative investing)은 투자의 미래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페루치가 브리지워터에서 나오는 순간 경쟁사들이 달려들어 그를 모셔갈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브리지워터 투자자들에게 왜 페루치 같은 인물이 떠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달리오로서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따로 만났다. 페루치는 더 이상 평가 알고리듬 작업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달리오는 뭘 해주면 회사를 떠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페루치는 '엘레멘털 코그니션(Elemental Cognition)'이라는 AI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브리지워터나 투자와는 무관한 순수한 AI 기업이었다. 달리오는 그 스타트업에 수천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하고 하나의 조건을 요구했다. 근무시간의 절반은 브리지워터에서, 절반은 스타트업에서 일해달라는 것이었다. 페루치는 승낙했다.
페루치가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자 달리오는 페루치를 대신해서 프린스를 완성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렇게 찾은 인물이 존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이다. 애플의 엔지니어로 일하며 아이맥과 아이팟의 개발을 주도해서 "아이팟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후에 팜(Palm)에 일하기도 한 업계 최고의 전문가였다. 달리오는 루빈스타인을 첫 2년 동안 5,000만 달러(약 650억 원)의 보수와 브리지워터의 공동대표직을 제안해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게 영입된 루빈스타인이 문제를 깨닫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브리지워터의 직원들은 그를 앉혀 놓고 슬라이드와 비디오를 보여주며 달리오의 원칙들을 설명했다. 루빈스타인은 직원들이 자기 상사에게 조사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물론 달리오도 등장했다)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티브 잡스와 일했기 때문에 상사가 일일이 간섭하고 지시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런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대단한 철학을 가진 양 스스로를 추켜세우지는 않았다.
그는 달리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레이, 당신의 원칙은 375개나 됩니다. 그렇게 많으면 원칙이 아니죠. 토요타에는 14개의 원칙이 있고, 아마존의 원칙도 14개예요. 성경에는 10개가 있고요. 375개는 원칙이 아니라, 작업 매뉴얼입니다."
몇 달이 지나자 루빈스타인은 원칙이라는 시스템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브리지워터는 수천만 달러를 들여서 원칙을 기준으로 하는 평가 시스템을 만들고 있지만, 그게 뭐냐고 질문하면 그에게 돌아오는 답은 "신뢰성"을 측정해서 수치로 보여준다는 거였다. 많은 직원이 IBM 출신의 데이비드 페루치가 만든 비밀 공식인데, 정확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루빈스타인은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는 페루치처럼 기업에 소속된 컴퓨터 과학자들과 오래 일해서 잘 아는데, 그들은 임원들에게 자기가 하는 일을 불필요할 정도로 반복해서 작은 디테일까지 설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일할 때 힘든 건 그만하고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는 게 아니다. 결국 루빈스타인은 페루치를 불러내 대화를 하기로 했다. 그가 신뢰성을 도대체 어떻게 계산하는 거냐고 묻자 페루치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창피해서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브리지워터의 직원들 중 신뢰성을 높게 평가받는 직원들은 복잡한 알고리듬이나 인공지능을 통해 그런 점수를 받은 게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레이 달리오 봇(artificial Ray Dalio)"이 되었기 때문이다. 브리지워터에서 신뢰성을 높게 평가받는 방법은 CEO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거다. 브리지워터는 신뢰성(believability)이 아니라, 신앙인들(believers)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루빈스타인은 달리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레이, 이건 종교예요."
그리고 그날로 퇴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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