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짧은 버전이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 게재되었습니다.


며칠 전 미국 정부가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여기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1800년대 초부터 1970년 즈음까지 운영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아이들을 위한 기숙학교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다. 그런데 학교 주변에서 최소 500구 이상의 아이들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일부에 불과하고 집단 매장지를 포함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어서 묻혔는지 아직 모른다.

미국의 백인들은 1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원주민 아이들 수 만 명을 부모에게서 떼어내어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왔다. 어리게는 4살짜리부터 십 대 아이들까지 "문명화" 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내어 수 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단체 생활을 시키면서 사실상 원주민 문화를 말살해왔다.

갑자기 이런 일이 밝혀진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원주민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캐나다에서 이런 (지금은 폐교가 된) 기숙학교들 주위에서 아이들의 시신이 집단적으로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조사도 그렇게 사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의 일부다.

아래 글은 이번 뉴스가 나오기 전인 지난달 말에 쓴 것이다.

지난해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뉴스가 연이어 캐나다에서 나왔다. 5월에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 위치한 한 원주민 기숙학교 터에서 아이들의 유해로 보이는 시신 215구가 발견되었고, 6월에는 서스캐처원주의 또 다른 원주민 기숙학교 근처 이름이 없는 무덤에서 시신 751구가 발견된 것이다. 모두 아이들의 유해인지, 사망 원인이 무엇인지는 즉각 밝혀지지 않았지만 충격적인 뉴스였다.

하지만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캐나다에서 운영된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얘기는 아니었다. 그 학교들은 캐나다 정부와 가톨릭 교회가 원주민 아이들을 백인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운영했던 139개의 기숙학교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이 기숙학교지, 어린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 내어 멀고 먼 곳으로 데려다가 모아 놓은 강제 수용소나 다를 바 없었다. 한 학교에서만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었다고 알려졌을 만큼 위생과 의료여건이 엉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멀쩡히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고아 취급을 받았고,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건 학교와 교사(대개는 신부와 수녀)였기 때문에 그들이 아이들을 학대할 경우 아이들은 아무 데도 호소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성폭행을 비롯한 각종 폭행이 흔하게 있었고, 참다못해 달아나는 아이들도 많았다고 하니 기숙학교에서의 삶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캐나다 정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관행이 캐나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세계 각국의 원주민과 기숙학교 문제에 대한 유엔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이렇게 아이들을 강제로 끌어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한 행위는 미국과 캐나다는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 같은 영어권 국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아프리카와 중동, 심지어 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도 일어났다. 19세기와 20세기에 세계 곳곳에서 똑같은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이런 잔인한 행위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를 떠올려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먼저 기술적 선진화를 달성한 문화의 시각에선 자신들보다 뒤처진 것으로 보이는 문화는 저급하고,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교육과 교화의 대상이다.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식민지 사람이나 원주민은 풀어야 할 ‘숙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 혹은 정복자들은 제 발로 그들의 땅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그 해결책이라는 건 결국 둘 중 하나다. 죽여서 없애거나 같이 살 수 있는 존재로 탈바꿈을 시키는 것. 학살을 어떻게 해결책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과거에는 많은 문화에서 학살은 충분히 선택 가능한 옵션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난징대학살이나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은 그런 이성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 정부가 19세기에 내린 결정이 그와 같은 이성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결정을 설명하는 유명한 문구가 “사람은 살려 두고, 인디언은 죽여라(Save the man; kill the Indian)”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사람’과 ‘인디언’은 한사람이다. 이 말은 사람(원주민)은 죽이지 말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인디언, 즉 인디언의 정신과 문화를 없애라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직후인 1869년에 수립된 정책에 따라 원주민 기숙학교가 세워져 인디언 문화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문화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면, 아이를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와 공동체에서 떼어 놓은 후 다른 언어와 문화를 주입시켜 “인디언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호주부터 미국까지 원주민 아이들을 끌고 와 수용한 학교들이 아이들의 고향에서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세워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부와 학교, 교회의 생각에 학교가 집에서 가까우면 쉽게 집으로 달아날 것이기 때문에 아예 집으로 도망할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2002년에 발표된 영화 ‘토끼 울타리’(Rabbit-Proof Fence)는 가족과 생이별한 아이들 세 명이 기숙학교를 탈출해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에서 어린아이들은 9주 동안 무려 2400㎞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물론 영화화할 만큼 극적인 사연이었던 것이고, 얼마나 많은 아이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길을 잃고 죽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렇게 잔인한 행동이 실제로 얼마나 이성적으로 계산된 것이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후 미국으로 가서 미주리주 상원의원과 내무장관(1877∼1881)을 지낸 카를 슈르츠의 설명을 들어 보면 된다. 그는 “전쟁에서 인디언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들이는 경제적 비용은 100만달러지만, 인디언 아이 하나를 8년 동안 기숙학교에 보내는 데 드는 비용은 1200달러에 불과하다”며 강제 기숙학교를 옹호했다. 슈르츠 한 사람만의 주장도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내무장관 헨리 텔러 역시 “인디언을 상대로 10년 동안 전쟁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은 2200만달러인데, 3만명의 인디언 아이들을 1년간 교육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그의 4분의 1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들이 생각한 ‘교육’은 학살의 대안이었고, 그런 대안을 찾은 이유는 (당연한) 도덕이나 인권, 인류애 때문이 아니라 그게 더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죽이는 것보다 돈이 덜 들어가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려왔다면 그 아이들을 과연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교육했을까? 원주민 기숙학교 주변에서 발견된 수백, 수천 구의 시신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럼에도 원주민 기숙학교를 제안한 사람들은 당시 미국 기준으로는 원주민을 배려하는 정치인들이었고, 그래서 ‘인디언의 친구들’이라고 불렸다. 사람을 죽이지는 말고 문화만 죽이자고 했다고 그런 호칭을 받을 만큼, 원주민이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시절이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 미국 내 원주민들의 삶이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던 캐나다의 기숙학교에서 발견된 아이들의 시신에 대해 교회는 어떤 사과를 했을까? 교황은 시신들이 발견된 지 무려 1년 가까이 지난 이달 초에야 사과문을 발표했는데 “가톨릭 교회의 멤버들이 그렇게 잔인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가톨릭 교회가 한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가 벌인 행동이라는 식의 발뺌이라는 비판이 있다.

게다가 이런 일이 과거 한때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앰네스티의 보고서에 따르면 21세기에도 중국에서는 ‘문화적인 동화’를 이유로 신장위구르자치구 위구르족의 문화를 말살하는 강제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인류는 19세기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